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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 기자목, 너의 이름은.

분류: 수다, 글쓴이: 한켠, 17년 6월, 댓글25, 읽음: 119

현재(2017.06.04)릴레이 상황

자유게시판 릴레이 전개도 v.170531

[릴레이] The horror.. The horror..

이 소설의 끝을 써보려 해

 

나쁜 마녀가 택시를 박차고 나간 후 영국쥐는 문을 잠그고 그대로 눈을 감고 뒷좌석에 늘어졌다. 잠시만, 잠깐만 쉬자. 생각을 정리해 보자. ‘생각은 짧게, 행동은 잽싸게’가 영국쥐의 평소 좌우명이었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감자마자 창문을 깨고 영국쥐의 멱살을 잡은 손 때문에 영국쥐는 생각할 새도 없이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멱살을 잡지 않은 다른 한 손이 영국쥐의 주먹을 가볍게 막았다.

“뭐야, 누구야?”

“저는 로봇입니다. 고도의 기술로 잘 만들어진 안드로이드죠. 이름은 ‘천가을’.”

엄청난 다작의 작가, 아니 희대의 연쇄살인마. 하루 한 건씩 사건을 처리하는 성실함 덕분에 ‘최종병기’라 불리는 킬러. 스냅백을 눌러쓰고 뿔테 안경을 끼고 청바지에 스니커즈를 신고 체크남방에 집업후드를 입은 공대너드 같이 생긴 이 여대생이 그 ‘천가을’이라고? 그러고보니 얼핏 기계과 전공이라고 들은 것 같기도 했다. 1대 아이라비는 천가을을 시켜서 공기청정기처럼 생겼지만 외부의 미세먼지를 정화하기는 커녕 미세먼지 속의 중금속 독성물질만 응축시켜서 분출하는 기계를 개발하고 있었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은 창문을 열지 않으니 밀폐된 집안에 이 살인기계가 독성물질을 내뿜으면…부검을 해도 ‘미세먼지 때문에 이승탈출 넘버원’ 이라고 할 게 뻔했다. 1대 아이라비가 갑작스럽게 죽는 바람에 기계 개발은 엎어지고 미션완수이벤트 경품으로는 시중에서 파는 정상적인 공기청정기가 나갔다.

“기자목…그 자를 잡아야 해…나와 기자목 둘 중에 누가 먼저 죽는지 해 보자고. 감히 아이라비 자리를 노리다니…”

1대 아이라비는 연구실에서 자주 그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기자목은 영리하게 리뷰왕 상품만을 챙겼고, 먼저 죽은 건 1대 아이라비였다.

“혹시 1대 아이라비의 복수를 하려고?”

“아니, 붕붕이 보내서 왔어요.”

붕붕, 이 도마뱀 같은 노인네.

“난 두 번 다시 붕붕이랑 엮이고 싶지 않은데. 다른 사람한테 앵겨붙든가.”

“인생을 셧다운 하고 싶어?”

설마 진짜로 안드로이드였나. 아까 창문을 깨고 멱살을 잡던 완력은 분명히 여대생의 힘이 아니었다. 영국쥐는 공손하게 택시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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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은 병원 꼭대기의 펜트하우스에서 최고급 블루투스 스피커로 ‘오늘의 굿밤뮤직’이라고 적힌 CD를 틀고 요염하게 고양이자세로 요가를 했다. 마음만은 유지태였다.

‘기자목 그 놈의 음악취향은 조잡해. 브릿G에선 내 음악만 들어야지.’

붕붕은 기자목이 누굴 노리는지 알고 있었다. 다들 기자목이 2대 아이라비 자리를 노린다고 믿고 있지만 기자목은 누가 2대 아이라비가 되건 관심 없었다. 그깟 아이라비 자리, ‘기자목의 손’인 이연인에게 던져 주고 쳐다 보지도 않을 놈이다. 기자목이 노리는 자는 따로 있었다. ‘기자목의 눈’이라고 불리며 브릿G사무실에 CCTV를 달고 1대 아이라비를 감시하던 한켠이 자기가 도청한 내용을 브릿G에 폭로하고 살해당했을 때 바로 알아차렸어야 했다. 한켠은 기자목에게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명령을 받았고, 거부할 수 없는 명령에 따르는 대신 위험을 알리고 죽는 쪽을 택했다. 기자목이 브릿G의 기능이 달라진 걸 공지되기도 전에 알아차리고, 자꾸 개발자에게 간식을 보내려고 할 때 짐작했어야 했다. 기자목이 노리는 자는…

“진진자라자 진진자라 환상의 똥꼬~쇼!”

붕붕은 음악 볼륨을 더 높였다. 건축업자들이 자재를 빼돌렸는지 펜트하우스인데도 방음이 취약했다. 아래층 정신병원 환자들의 미친 짓이 다 들렸다. 역시 살인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짓이었다. 브릿G에서는 살인하다가 정신줄을 놓은 킬러들을 이 병원에 감금했다. 킬러들은 주로 아무말 대잔치를 해대며 미쳐갔다. 미쳐도 곱게 미칠 일이지, 붕붕은 쯧쯧 혀를 찼다. 붕붕이 수족처럼 부리던 나쁜 마녀는 약간 관음증이 있었다. 건너편 모텔을 훔쳐보곤 했는데 그 덕에 이번 작전을 짰으니 아주 쓸모없는 병은 아니었다. 영국쥐가 기자목을 해치우거나 아니면 시간을 끌어주길 바랐는데 영국쥐의 역량은 딱 후자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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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내가 이 택시에 탈 줄 어떻게 아셨어요?”

“모텔에서부터 보고 있었거든. 아까 방에 침입했을 때 침대에 누워 있던 게 나였어. 네가 들어오기 좋은 위치의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지.”

“아, 그 창녀?”

“성매매 여성이라고 해야지. 성은 판매자만 있는 게 아니라 구매자도 있으니까.”

“…그럼 같이 있던 남자는?”

“죽었어. 쓸모 없는 자였지. 그래도 나를 이연인으로 알고 죽었으니 행복해. 마조히스트였어. 작품마다 리뷰공모를 했던 인간이었어. 자기 작품이 리뷰로 두들겨맞는 걸 좋아하더군. 물론 너한테 맞았을 때도 엄청 좋아했어.”

영국쥐는 ‘공대 너드’처럼 보이려고 애쓴 듯 한 천가을을 흘끗 보았다. 화려하고 매혹적인 이연인하고는 정확하게 반대인 얼굴과 패션이었다.

“잠깐, ‘행복할 거야’가 아니라 ‘행복해’라고? 어떻게 확신하지?”

“기계는 정확해. 기계는 틀리지 않아. 나는 늘 확신하지. 내 판단은 늘 옳아. 그러니 내 말 들어. 황금열쇠 내 놔.”

“붕붕이 시켰어요? 줬다 뺏으라고?”

“아니, 내 판단이야. 황금열쇠 가지고 브릿G사무실로 가. 아이라비는 기자목을 잡으려고 했어. 도발을 했지. 그래서 기자목이 정수기에 독을 탄 거야. 영국쥐 당신을 시켜서. 한켠이 설치한 CCTV를 붕붕은 알고 있었지. 당신은 아이라비 자리에 욕심이 있었어. 이연인에게 겁먹지 않았다면 지금도,”

“틀렸어.”

영국쥐는 말을 끊었다. 천가을은 무표정했다.

“손 떨지 말고 운전해.”

“천가을, 누구 편이죠? 기자목? 붕붕? 1대 아이라비? 내 편은 아니죠?”

“개발자. 나를 창조하신 분. 인류멸망의 원대한 꿈을 꾸고 계시는 분. 그 분은 처음에 나를 살인병기로 창조하셨지만, 직접 한 건씩 연습하면서 학습하는 것보다는 빅데이터, 집단지성으로 나라는 AI를 학습시키는 게 더 빠르다는 결론을 내리셨지. 그래서 브릿G를 설계하시고 계속 나에 맞게 개선하고 계시지. 기자목 때문에 그 분이 잘못 되신다면, 나도 어떻게 될 지 몰라. 나는 그 분을 지켜드려야 해. 당신이나 아이라비한텐 관심 없어.”

‘얘 설마 붕붕의 병원에서 탈출한 앤가, 어린 나이인데, 안 되었네…’

영국쥐는 긴장이 풀릴 뻔 했다. 천가을은 택시 트렁크에서 가방을 들고 내렸다. 영국쥐는 사무실 금고에 황금열쇠를 넣고 돌렸다. 허탈할 만큼 쉽게 열렸다. 금고에는 쪽지 한 장이 있었다. 1대 아이라비의 필체였다.

‘rumpelstiltschen’

“이게 뭐야?”

“독일어. 룸펜슈틸츠헨.”

“독일어도 할 줄 아세요? 못 하는 게 뭔가요…와, 진짜 인간이 아니세요.”

‘제정신 아닌데 힘 센 애가 제일 무섭다. 대충 맞춰 주자.’

“그래서 그게 뭔데요?”

“아이라비는 이걸로 기자목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 룸펜슈틸츠헨은…”

천가을이 얼굴을 뜯어냈다. 이연인의 얼굴이 나왔다. 천가을은 가방을 열고 가슴을 교체했다. 부품일 뿐이었지만, 어쩐지 민망해서 영국쥐는 뒤로 돌았다.  갑자기 폭발음이 들렸다. 설마 개발자가 한 짓인가, 붕붕인가, 아니면…

“천가을!”

“이름은, 이름은…”

“내 이름은 영국쥐가 아니라…”

영국쥐가 자기 이름을 말하기도 전에 천가을이 폭발했다.

“영국쥐 네 이름 말고! 기자목, 너의 이름은!”

영국쥐는 눈을 감았다. 눈물이 흘렀다. 이것도, 무스비였다.

한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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