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극
제가 실제로 창작을 시작한 건 그로부터 십수년뒤이긴 하지만, 어쨌든 언젠가 창작을 할 정도로 처음 ‘이야기’에 깊이 빠져든 계기는 존 포드의 영화 ‘수색자’였습니다.
사실은 그 장르의 가장 전형적인 결말이지만 당시 서부극을 처음 보는 저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마지막 장면에서 거의 숨이 멎을 뻔 했지요. 그게 21세기 초반의 일인데, 그 후로 그렇게 얼얼한 감동을 느낀 것은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와 ‘숨’을 읽었을 때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각 그 책이 아니라 수록작을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SF로 창작을 시작한 이후, 어느 날 제 고향이 서부극이라는 걸 떠올리고 서부극도 한 번 써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면서 요새 저 말고도 다른 서부극 쓰는 작가가 있나 이곳저곳 검색해보니, 또 생각보다 있기는 있더군요. 완전히 죽어버린 옛날 장르는 아니었습니다. 정말 반가운 일입니다.
다만 요새 서부극 상당수는 ‘무법세계에서의 모험담’인 것 같습니다. 사실 고전적인 서부극의 주제는 모험보다는 황야의 광막함과 쓸쓸함,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떻게는 살아숨쉬는 인간들의 공동체거든요. 고전적인 비평가들은 이것을 ‘야만, 폭력’을 대표하는 황야와 ‘문명, 질서’를 대표하는 개척촌의 대립, 그리고 황야와 마을 양쪽에 발을 걸친 서부사나이(문명과 질서를 세우지만 그 수단은 폭력인)의 구도로 설명했고, 그러면서 미국 개척시대를 찬양하는 미국애국적이고 보수우파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이야기라고 보았지만, 사실은 황야를 개척해서 문명을 세우는 것보다도 그냥 황량한 풍경 그 자체가 고전 서부극의 정수라는 게 점점 더 지배적인 평이 되어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면 그 안에서 신나는 모험을 하든 전쟁을 하든 고독한 싸움을 하든 사랑을 하든 황야만 나오면 다 서부극이라는 얘기도 되죠. 그래서 역시 고전 서부극이든 요즘 서부극이든 보게 되면 반갑습니다.
혹시 또 서부극 좋아하는 분이 계실지 궁금합니다.
추신. 하찮은 수다 끝에 붙이기 민망한 이야기지만, 최악의 폭력에 맞서 문명과 인간성을 세우려고 싸우는 미얀마 시민들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