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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제 취향인 영화들 추천1

분류: 영화, 글쓴이: 랜돌프23, 20년 8월, 댓글20, 읽음: 112

저번에는 호러 영화 몇 편을 추천해드렸습니다. 물론 호러 영화도 되게 좋아하지만, ‘호러’만 좋아하는 건 아닌지라, 이번엔 다른 장르를 포함해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영화 몇 편을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쉴 새 없이 내리는 장마 속에서 제가 추천해드린 영화가 조금이라도 즐거움을 드릴 수 있다면 기쁘겠습니다. (이 놈의 비가 인명피해만 안 내면 좋을텐데… 요즘엔 뉴스를 틀기가 무서울 정도입니다) 참고로 숫자는 순위가 아니라 그냥 나열한 순서입니다.

 

1. 디스트릭트9

개성 있는 외계인 영화입니다. 외계인 영화지만 기존에 알고 있던 외계인의 이미지에서도 탈피하고, 기존 스토리에서는 봐왔던 것과는 다른 ‘외계인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면서도, SF적이고 판타지적인 게 아니라 다큐멘터리와 같은 거칠고 생생한 리얼리즘이 느껴지는 연출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한편으로는 그 안에 노골적이고 신랄하다고 여겨질 정도의 인간에 대한 풍자, 사회에 대한 풍자가 드러나는 게 일품입니다. 비현실적이거나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종류의 스토리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없는 영화였습니다. 지금도 무척이나 애정하는 외계인 영화인데, 지금까지 나온 외계인 영화와는 조금 색다른 것을 보고 싶다는 분들께 감히 추천드립니다.

 

2. 케빈에 대하여

보고나서 정말 머리를 망치로 한 번, 아니, 여러 번 두드려맞은 것 같은 영화였습니다. 정말 한없이 속이 답답해지고, 참담하고, 끔찍하고, 공포스럽고, 무서우면서 슬픕니다. 흔히 말해지는 ‘괴물은 만들어지는가, 태어나는가'(잔혹범죄는 환경/양육에 의한 것인가, 유전에 의한 것인가)에 관한 섬뜩한 고찰이자, 가해자의 가족이라는 지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연좌제와 책임연대제는 사회적으로 정당한가), 가해자와 피해자가 정말로 칼로 두부 자르듯이 명확하게 나뉘는 게 맞는지 심란하게 합니다. 괴물 같은 영화입니다. 지금도 이 영화를 생각하면 심란합니다. ‘살인자에게 사연이나 사정은 필요없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긴 하지만, 그건 살인자에게 ‘사실은 나쁜 놈이 아니었어’라고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 된단 뜻이지, 왜 그런 사건이 발생했는지 원인을 파악하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원인을 알아야 예방도 하고 모두가 안전해질 수 있죠. (범죄심리학도 이런 이념에서 나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정말로 악은 어디서 탄생하느냐는 질문을 잔인한 방식으로 제시합니다. 그 답에 대해선 영화를 본 관객 각자가 생각해볼 일이죠. 이 영화를 가지고 다른 사람과 토론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한편으로는 솔직히 두 번 볼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악’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 그려본다면 이 영화처럼 묘사하고 싶다는 욕심은 생깁니다. 보는 사람에게 가슴에 돌덩어리를 얹는 것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그런 이야기 말이죠.

 

3. 더 랍스터

보고나서 ‘와, 나도 저런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 기상천외하고 독특한 영화입니다. 세계관이란 이렇게 짜서 이렇게 보여주는 거라고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고, 관객을 감독이 만든 기이한 세계에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일단 멱살을 잡고 끌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아무리 봐도 납득이 안 되는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설정의 세계에서 지극히 상식적이고 기본적인 것을 호소하며 느끼게 합니다. 이 영화 하나만 보고 이 영화를 만든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는 죄다 찾아봤습니다. 참고로 저번에 공포 영화 추천할 때 나왔던 ‘킬링디어’도 같은 감독입니다.

이 영화는 뭔가 더 쓸 게 없네요. 뭐라 말로 표현하기가 좀 어려운 영화입니다. 한 마디로 기이하고 기괴한, 인위적이고 낯선 연출과 분위기가 일품입니다. 제가 주변인에게 망설임없이 추천하는 영화 중 하나입니다.

 

4. 레퀴엠

‘마약을 하면 안 된다’라고 백 번 말하는 것보다 이 영화 한 번 보는 게 직방일 거라 생각합니다. 말 그래도 마약에 자기 인생을 바친 인물들의 창창했던 미래에 대한 진혼곡(레퀴엠) 같은 영화입니다. 마약이 사람의 인생을 파탄으로 끌고 가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묘사됩니다. 정말 자비 없이, 끔찍하고 잔혹하게 말이죠.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다시 영화를 처음부터 보면 마약으로 인해 그들의 인생이 어떻게 망쳐질지가 훤히 보이기 때문에 인물들에 대한 연민과 참혹한 심정이 복잡하게 교차합니다. 다른 의미로 ‘공포’스럽고 ‘잔인’한 호러 영화입니다.

더불어 영화의 편집과 연출이 기가 막힙니다. 정신 없이 휙휙 돌아가고 빠르게 나열되는 이미지들이 세련되게 (한편으로는 자극적으로) 표현됩니다. 도저히 그 느낌과 감각을 소설에 적용시킬 방법은 없지만…;; 영화를 본다기보다는 체험하는 기분에 가까웠습니다. 그 경험이 독특해서 바로 그 자리에서 이 영화를 3번을 반복해 봤었습니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초기작 ‘파이'(라이프 오브 파이 아닙니다. 원주율의 파이π입니다)도 멋진 영화입니다. 흑백이지만, 잘 만든 영화는 그래픽과 흑백이 중요한 게 아니죠.

주변에 마약에 흥미를 가진 사람이 혹-시라도 있다면 꼭 이 영화를 보여주십쇼. 두 번 보여주십쇼.

 

5. 월-E

하지만 제가 무시무시한 영화만 보는 건 아닙니다. 저도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걸 좋아합니다. 가장 좋아하는 3D 애니메이션이 뭐냐고 물어보면, 저는 망설임없이 ‘월-E’라고 대답합니다. (2위는 라따뚜이)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SF가 있을 수 있을까요? 그것도 둥글둥글하지도 않고 각지고 투박한 모습인데, 대사도 별로 없는데, 픽사는 어떻게 이렇게 애정이 가는 로봇 캐릭터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걸까요? 정말 이 영화의 제작자들은 천재가 틀림없습니다! 세상에, 사람도 아니고 로봇들의 사랑 이야기에 몰입하고 흐뭇한 표정을 지을 줄이야! 그리고 픽사 영화에서 종종 나오는 세상의 아웃사이더를 향한 따뜻한 시선이 이 영화에서도 드러납니다. ‘너는 사용법에서 어긋난 고장난 존재야’가 아니라, ‘남들과 조금 다를 뿐, 다른 방식으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라고 말해주는 것 같은 것 말이죠.

위에 제가 추천드린 영화들을 보고 정신이 피폐해진 것 같아 힐링이 필요하다고 여겨지시면 이 영화를 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그건 그렇고 월-E 레고 갖고 싶은데 너무 비싸 ㅠㅠ

 

6. 판의 미로

제가 가장 사랑하는 판타지 영화입니다. 얼마 전에 다시 이 영화를 봤다가 울었… ‘헬 보이’로 처음 알았던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본격적인 팬이 되게 한 영화입니다. 시대의 비극과 동화풍의 판타지를 적절하게 섞어서,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파시즘의 잔혹함과 비인간성을 적나라하게 고발합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타인의 희생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파시즘, 아무 생각 없이 위의 명령만 따르는 이들이 만들어낸 전쟁, 동화를 믿지 않는 어른들이 만든 지옥 같은 세상과 대비되어 세상에 태어난 게 고통이고 고비이자 시험인 아이들, 어른들의 욕심과 전쟁 속에서 갈 곳 없이 소외되는 아이의 모습이 많은 것을 이야기해줍니다. 위에서 나온 ‘디스트릭트9’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 오히려 인간성에 대한 물음을 강하게 던지는 작품입니다. 손에 눈 달린 대머리 괴물(…)만으로 기억되기엔 영화 자체의 메시지와 뒤틀린 잔혹 동화 같은 연출, 스토리가 너무 좋습니다. 이 영화만 가지고도 할 얘기가 태산이라서 장면 하나 하나를 들며 몇 페이지라도 써내려갈 수 있지만, 그랬다간 저 혼자 아는 거 나왔다고 신나서 떠들어대는 꼴이 되므로 지양하겠습니다 ㅋㅋㅋ 아무튼 어두운 분위기의 동화, 뒤틀린 판타지의 느낌이 궁금하시다면 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이 영화를 본 직후 동경의 마음으로 동화풍의 잔혹한 이야기를 써보려고 몇 번 시도해봤었는데, 잘 안 되더라고요. 역시 흉내로는 본래 작품의 완성도를 따라잡지 못 하는 모양입니다.

 

2편은 언제 쓸지 모르겠습니다. 장마가 끝나고 너무 더워서 무더위와 열대야로 고통받고 있을 때 다시 쓰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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