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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과 단편

분류: 수다, 글쓴이: 수오, 17년 4월, 댓글9, 읽음: 136

(리체르카 님께서 쓰신 자게 글을 보고 급하게 생각나는 대로 써본 것이기 때문에 비유가 좀 조악할 수도 있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예를 들어, 어느 머잖은 미래에, 태양계에서 적당히 멀리 떨어진 성운에 있는 행성에 방문한 두 인간 남매가 있다고 생각해 보죠. 누나는 탄피엔(TanPien), 남동생은 잔피엔(JanPien) 정도로 칩시다. 우스꽝스러운 이름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남매가 이 행성에 와서 한 눈에 반해버린 그 것이 ‘무엇’인 가가 훨씬 더 중요하죠. 남매가 사랑에 빠진 것은 지구인도 아니고, 외계인도 아니었습니다. 남매는 행성의 중앙 도시 1.DE-a를 마주하자마자 한 눈에 매혹당했습니다. 정말, 도시와 결혼해서 영원히 미래를 약속하고 싶을 정도로 도시는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이 행성에서 오래 살 수 없습니다. 남매는 행성에 도착한 지 몇 시간 만에 지구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저 아름다운 도시를 이 행성에 두고 가야만 한다는 마음 아픈 현실 앞에서, 누나와 남동생은 슬픔에 잠깁니다. 1.DE-a에 머무르던 행복하던 시간은 끝나고 남매는 지구로 돌아왔습니다. 남매는 이 지구에 발을 딛자마자 결심합니다. 그 아름다운 도시를 이 지구에서 재현해 내기로 한 것입니다.

 

누나 탄피엔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행성에 머무는 동안 1.DE-a 도시에서 주워 모은 부스러기들을 꺼냈습니다. 지구에는 절대 구할 수 없는 재료이며, 도시를 하나 짓기에는 형편 없이 부족한 양입니다. 탄피엔은 이 작은 재료들로 1.DE-a를 모사한 미니어처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거대한 도시를 작은 미니어처로 만드는 일은 무척 세밀한 작업이기에, 부품 모양이 미립자 단위로만 달라져도 금방 실수가 티난다는 게 문제입니다. 하지만 누나는 시간을 들여 자신이 본 도시를 떠올리고 또 떠올리며 미니어처를 완성했습니다. 얼마나 공들여 만들었는지 낚시줄 만한 두께의 핀셋으로 문을 열었다 닫아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제 누구나 1.DE-a의 구성 성분과 똑같은 재료를 쓴 도시의 정경을 한 눈에 볼 수 있을 것이며, 1.DE-a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미니어처를 감상하는 지구인 누구도 그 집 안에 들어가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뭐 어떻습니까? 그 아름다운 모습을 감상하는 것 만으로도, 행성에 가본 적 없는 지구인은 그 때 탄피엔이 느꼈던 감동을 비슷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잔피엔은 그 미니어처를 보고 불만을 토했습니다. 1.DE-a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잘 만들어진 미니어처였지만, 비례가 기괴하게 뒤바뀌어 있었습니다. 가령 1.DE-a의 중심에 자리잡은 ‘선의 동굴’은 잔피엔의 기억에는 도시 크기에 비하면 너무나도 조그매서 제대로 보이지 않는 명소에 불과했건만, 탄피엔의 미니어처에는 동굴이 너무도 크게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잔피엔이 불만을 이야기하자 탄피엔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답했지요. “동굴이 잘 보여야 해.” 잔피엔은, 명소를 원래 모습보다 크게 표현해 놓고 생활상이 담긴 지역을 덧없이 조그맣게 표현해 놓은 탄피엔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동생 잔피엔은 1.DE-a를 그대로 지구 위에 재현하기로 했습니다. 도시를 만들기로 한 것입니다. 물론 1.DE-a와 모든 것이 똑같을 수는 없습니다. 작은 우주선으로는 1.DE-a를 구성하는 그 엄청난 재료들을 싣고 올 수 없기에, 모든 재료는 최대한 비슷한 모습으로 지구에서 구하기로 했습니다. 최대한 그 때 본 정경들을 떠올리며, 잔피엔은 지구 위에 1.DE-a를 건축해냈습니다. 물론 문제는 있습니다. 건설하는 데에 시간도 돈도 너무 많이 듭니다. 그리고 행성에 몇 일 머문 잔피엔의 지식으로는 그 행성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었기에 최대한 그럴싸한 방법으로 흉내내다보니 자세히 살펴보면 1.DE-a와 다른 부분도 한두군데가 아닙니다. 하지만 장점도 있지요. 자재 크기가 좀 다르다고 해서 티는 나지 않습니다. 건물이 견고하게 서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요. 잔피엔이 만든 도시를 걷는 지구인들 누구나, 그 도시를 걸으면 자신이 1.DE-a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자재 재질도 건축 양식도 다르기 때문에 그건 잘 모사된 착각일 뿐입니다. 그러나 민속촌에 간 사람이 ‘이 물건은 조선에 없었던 물건이다’라고 불평할 수 없듯이, 그건 무척이나 사소한 일입니다. 내친 김에 만들어진 집을 분양 해도 괜찮겠죠. 물론 1.DE-a에서 사는 것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탄피엔은 잔피엔이 만든 도시를 방문하자마자 불만을 토해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우상의 첨탑’은 어딨어?” “이제 곧 도착할 거야, 세 시간만 걸어가면 돼.” “거길 언제 걸어가!” “가는 길에 분수에서 물도 떠마시고 다리도 좀 두드리며 가다보면 되지, 왜 또 불만이야?” “다리 아프다고! 게다가 이건 왜 이렇게 지어놓은 거야! 난 갈래!” 잔피엔은 자신이 공들여 만들어 놓은 도시를 무시하고 떠나버리는 탄피엔이 야속했지만, 탄피엔은 탄피엔 나름대로 도시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잔피엔이 만든 도시가 1.DE-a를 닮았어도, 그 때의 추억이 선뜻 살아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탄피엔이 사랑해온 그 도시는 ‘우상의 첨탑’이 멋지고 ‘선의 동굴’을 바라보며 절로 도취되는 추억으로 가득했거든요. 언제까지고 마냥 걷고 걸으면서 조악한 찌꺼기로 만들어진 도시를 지켜봐야 하는 과정은, 탄피엔의 마음 속에 담긴 소중한 추억을 해칠 뿐이었습니다.

 

번외편. 탄피엔 잔피엔 남매와 동행했던 생체 확장형 인공지능 시(Shi)는 1.DE-a의 감상을 묻는 지구인들에게 ‘누군가의 얼굴에 부딪혀 침을 토해내는 호치키스’, ‘소스를 부어놓은 탕수육’, ‘파도를 휘젓는 손’, ‘즙이 후두둑 떨어지는 레몬’, ‘부러지는 숟가락’ 이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시가 보여주는 이미지를 보며 1.DE-a의 정경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의 감상을 듣고 나서 1.DE-a에 방문한 사람들은 모두 하나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지요. “역시 찍먹보다는 부먹이야.”

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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