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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 발렌타인]날 버린 엄마, 날 구슬한테 시집보냈네

분류: 내글홍보, 글쓴이: lion96, 20년 2월, 읽음: 42

로즈 발렌타인이란 이름은 누가 생각한 걸까?

정말 아저씨가 지은 이름일까? 혹시 산장에 드나드는 등산객들에게 주워들은 건 아닐까? 난 물때 낀 유리컵 속 적갈색 술을 지그시 바라봤다.

“봐라봐라. 때깔이 기가 맥히지? 이게이게 기냥 나오는 때깔이 아니다. 맛은 또 을매나 직이는지 니 아나? 시바스? 발렌타인? 그노마들이 용써도 요거요거한테는 맥을 못 쓸끼다. 이름도 장미 아이가, 장미. 니도 이제 고3이니까 한 잔 해 볼래?”

얇은 눈의 산장지기 아저씨는 벌건 얼굴로 내 얼굴에 침을 튀기며 아름다운 수제 담금주의 오묘한 빛깔을 자랑하느라 내 표정 따윈 관심도 없었다. 그리고 애증으로 맺어진 오랜 절친이신 내 아버지는 저 로즈 발렌타인으로 인해 저세상 같은 꿈나라로 가신지 오래됐다. 나 또한 쪽방 구석 모서리에 구겨저서 숨소리도 내지 않고 곤히 주무시는 아버지 따윈 돌아보지도 않고 술잔만 바라봤다. 복분자 아니면 산수유가 꽤 들어갔을 법한 향긋한 술이 부르는 소리를 기다리고 싶었다. 만약 흑장미만으로 만든 술이라고 했다면 곧이곧대로 믿을 수 밖에 없는 신비한 빛깔이 노래하는 목소리가 궁금했다.

“니 아부지도 참 불쌍한 인간이라. 니 엄마랑 그렇게만 안 됐어도 여기서 이리 썩을 인재가 아이다. 서울에서 뭘 해먹어도 해먹을 인간이 여그서 뭐하는 짓인지. 에잉”

난 장밋빛 술이 부르는 소리를 기다리느라 열 살때, 아버지를 처음 만나고 나서 하루에 한번씩 듣는 하나마나한 소리를 귓등으로 넘겼다. 한 잔 정도면 들을 수 있을까? 한 잔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이제 비가 그칬나? 소리가 안 들리네. 너도 어여 아버지 모시고 가그라. 나도 이제 잘란다.”

아버지를 만나고 몇 년이 지난 후부터 비 오는 날이면 술 취한 아버지를 어깨에 걸고, 등에 업고 집으로 돌아가는 게 일상이 됐다. 그래서 아저씨가 담근 묵직한 투명 플라스틱 통를 향해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섰다.

아버지와 눈을 맞출 수 있게 될 만큼 내 키가 커지자, 아버지는 술에 취해 엄마의 이름을 내 등뒤에서 속삭였다. 어릴 땐 아버지가 부르는 엄마의 이름이 신기하고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 부질없게만 느껴졌다. 열살 때, 아버지의 이름과 연락처만 알려주고 떠난 엄마나, 그런 엄마를 잊지 못해 술에 취해서만 속삭일줄 밖에 모르는 아버지나, 그런 두 사람을 부모로 둔 내 팔자나 다 부질없고 아무짝에도 쓸모없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난 아버지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엄마란 단어를 아버지 앞에서 소리내는 건 너무 잔인해서 내 마음마저 아플 정도였다. 그렇게 아버지한테 할 수 없는 말들이 쌓였지만 난 내색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안방에다가 내던지고 바깥에 내어놓은 빨랫감을 걷으러 마당으로 나갔다. 빨래는 빗물에 젖어 축축했고 마당 한켠 대자리에 말려둔 바삭한 시래기도 축 늘어졌다. 빨랫감을 품에 안고 마루에 놓고 나서 시래기는 대자리 째 말아서 부엌 안으로 옮겼다. 비가 그친 뒤라 그런지 산 공기가 더없이 맑았고 하늘도 오랜만에 별을 보여줬다. 그 때, 난 수돗가 하수구에서 반짝이는 뭔가를 발견했다. 하수구에는 조금 큰 알사탕 크기의 구슬이 있었다. 불투명한 구슬을 집어 들고 밝은 달 쪽으로 들어 올려봤다.

여러 가지 색이 뒤섞인 구슬은 불투명했다. 매끈한 표면만으로는 문방구점에 파는 싸구려 유리구슬인지 값비싼 옥구슬인지 알 수 없었다. 난 구슬을 수돗가에서 깨끗이 씻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의 불을 켜고 그것도 모자라 앉은뱅이책상의 스탠드 등까지 켰다. 밝은 불빛 아래 구슬은 바깥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였다. 순간 구슬에 검붉은 띠가 살짝 흘렀고 난 다시 눈을 부라리며 찬찬히 살펴봤다. 어두운 수돗가에서의 모습과 별 다른 게 없는 구슬은 내 손안에서 따뜻하게 데워졌다. 순간 수돗가에서의 청명하고 맑은 촉감이 떠올라서 충동적이지만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럽게 구슬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난데없니 내 입에서 주문 아닌 주문이 흘렀다.

“로즈 발렌타인, 로즈 발렌타인. 날 엄마에게 데려다줘.”

난 감은 눈을 떴다. 내 입으로 뱉은 말을 나 조차도 믿을 수 없었다. 열 살 이후로 소식도 없는 엄마를 소리내어 말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혹시나 아버지가 들었을까 불안해져서 주위를 보려고 급히 고개를 돌렸다.

눈을 뜬 세상은 찬 바람이 흐르는 바깥이었다. 시멘트 바닥에 흙먼지가 날리고 차갑고 매캐한 공기에 재채기를 할 뻔했다. 멀리서 누군가가 안간힘을 쓰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난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쇠파이프가 바람을 가르고 날카로운 칼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소리 한 가운데에는 대 여섯의 남자들이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마스크를 쓴 한 사람을 몰아서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운데에 있는 마스크는 대여섯의 장정들에게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둔하고 절도 없는 남자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 중 한 놈이 가운데에 둘러싸인 마스크의 긴 머리를 뒤에서 잡자 잠깐 움찔했고 그 틈으로 나머지들이 공격했다. 검은 마스크는 재빠르게 머리를 잡은 놈의 뒤로 돌아서 손목을 꺾고 중구난방으로 나서는 남자들의 헛발질을 다 막아냈다. 그 중 한 놈이 칼을 뽑아들고 마스크의 옆구리로 달려들었다. 난 재빨리 바닥에 구르는 각목을 잡았다. 남자가 칼을 든 팔을 휘두르려는 순간, 각목을 잡은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저절로 움직였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남자가 쓰러졌다.

-몸을 숙이고 팔을 들어올려.

알 수 없는 목소리에 내 몸이 움직였고 걷어 올린 팔이 쥔 각목에 다른 한 놈의 턱에 맞아 쓰러졌다.

-오른쪽을 보고 몽둥이를 두 손으로 꽉 잡고 내려쳐.

그러자 내 오른쪽을 공격하려는 두 놈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스크도 그 사이 나머지를 처리했다. 흙먼지가 가라앉은 바닥에는 남자들이 쓰러졌고 마스크와 난 어느 새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무연아?”

마스크를 벗은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본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엄마.”

살짝 마른 얼굴의 엄마가 그 동안 상상했던 모습과 너무 닮은 듯 다른 듯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엄마는 어느 새 내 손을 잡고 물었다.

“너 여기서 뭐해? 아빠는?”

“아빠?”

아빠의 얼굴을 떠올린 그 순간, 엄마와 나는 집 앞 대문 앞에 서 있었다. 내가 어리둥절하고 고개를 사방팔방으로 돌리는 사이, 엄마는 내 손을 끌고 조심스럽게 집 마당 쪽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현관 옆에 놓아둔 잡동사니 쓰레기를 모아둔 녹슨 드럼통 뒤에 숨었다. 집 안에서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연이는 어디 있지? 어서 내놔.”

아빠는 작고 낡은 마루에 빨랫감을 무릎에 하나씩 펴고 있었다. 마당을 채우고도 남을 존재감을 뿜어내는 한 여자가 아버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 겁도 많아진다고 하던데 정 의원한테는 아닌가 보네.”

예의바르고 점잖기로는 선비가 따로 없다고 마을에서 소문이 자자한 아버지의 말투가 거칠어서 어색하고 낯설었다. 난 아버지가 드리우는 분노 앞에서 끄떡없는 여자를 자세히 보았다.

“무연이도 제 엄마처럼 아니 제 엄마보다 더 훌륭하게 클 수 있어. 아비가 되서 딸자식 잘 되는 걸 원치 않는 겐가?”

“아비 앞에서 딸자식 데려가겠다는 말을 하는 사기꾼 말을 믿으라 하니 참나.”

“무연이가 엄마를 찾지 않던가? 언제까지 친엄마랑 떨어져 살 게 할 거지?”

아버지는 빨랫감을 천천히 폈지만 엄청 참고 있음을 멀리서도 알 수 있었다. 아니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주체할 수 없는 게 분명했다. 엄마도 없는 주제에 이어달리기에서 1등했다고 재수없다며 머리를 잡아챈 초등학교 동급생과 그의 엄마를 노려보던 아빠의 모습이 딱 저랬기 때문이다.

“무연이가 친부모와 떨어지게 만든 장본인이 할 소리는 아닐 텐데.”

“고등학교 때부터 오로지 바른 길로만 자란 현주를 꼬드겨서 팔자를 망친 장본인이 할 소리도 아니지.”

몰래 대화를 듣고 있는 나는 엄마의 이름이 들리자 엄마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했다. 그리고 저 얼굴과 저 목소리를 똑똑히 기억했다. 날 버려야만 살 수 있다고 엄마의 이름을 부르며 협박한 저 여자.

“이제 곧 총선이고 머지않아 대선이 있어. 현주가 이제 내 옆에서 제대로 실력을 발휘해야하려면 무연이가 옆에 있어야해. 그럼 무연이도 무연엄마도 잘 풀리는 건 당연지사지. 언제까지 모녀를 떨어뜨릴 셈인가?”

“무연엄마를 움직이려면 무연이가 있어야 한다고? 남들 먹는 세월을 당신은 어떻게 비켜가서 이 지경까지 됐지? 바른 길? 가난한 무연엄마 가족들을 꼬드겨서 무연엄마를 수족처럼 부려먹고 나선 무연이가 들어서자마자 버린 주제에 어디 와서 감히? 그런 당신을 너무도 존경했던 현주가 이제 와서 아쉬워졌나? 당신의 더러운 뒤치다꺼리를 해줄 인사가 그렇게 없던가? 그래서 친딸을 버리고 자기에게 오라고 한걸 거절한 현주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팽개치고는 이제와서 뻔뻔하게 무연이까지 찾아? 그러고도 감히 현주라는 이름을 입에 담아?”

아버지는 마루에서 일어나 분노로 짙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 손에 죽고 싶단 말을 직접 와서 해주니 거절하면 예의가 아니겠지?”

“더러운 자식. 누구보다 더 무연엄마를 아꼈던 건 바로 나야. 어디 개차반도 울고 갈 쓰레기 같은 네 놈이 그 애한테 손대지만 않았더라면, 그 애가 바른 길로 정진했더라면 네놈과 이렇게 말 섞을 일 따윈 없었어.”

“우리를 내버려둬요.”

어릴 적, 엄마와 단둘이 살던 단칸방에 신발신은 발로 쳐들어와서 나를 버려야만 엄마가 살 수 있다고 협박한 저 여자를 향해서 말했다.

“내가 잊을 줄 알아? 이 마귀할멈아? 어서 우리집에서 나가.”

분노가 온 몸을 타고 손끝에서 발끝까지 뻗어나갔다. 바지주머니에 넣어둔 구슬마저 뜨끈뜨끈한 게 느껴졌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날 바라보는 두 사람과 내 뒤에서 숨죽이고 있을 엄마가 너무 짜증이 나고 무엇보다도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 이 순간, 세 사람 전부 다 나에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들이었다.

-그것이 그대의 소원인고?

-그래, 그게 내 소원이야.

난 머리와 맘속에 들리는 알 수 없는 물음에 즉각 대답했다.

-처가 바라는 걸 들어주지 않는 다면 지아비의 도리가 아닐 터.

내 머릿속 목소리가 멈추자마자 난 가슴을 열고 크게 소리쳤다.

“당장 우리 집에서 꺼져!”

내 외침에 땅바닥에 두 다리가 떨어져갈 듯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마당 한 가운데 번개가 떨어졌고 두 눈을 찌를 것 같은 불길과 눈부심이 가라앉자 천천히 눈을 떴다. 마당은 아무 것도 없었다. 신발도, 수돗가에 뒤집어놓은 대야도, 비누곽도 다 날아가고 아무 것도 없었다. 낡은 평상도 사라진 마당에는 아버지와 자취를 감춘 드럼통 뒤에 있던 엄마와 나 뿐이었다.

“무연아.”

“아버지.”

“무연아빠.”

그 소리에 아버지는 고개를 돌렸다. 엄마의 목소리를 들은 아버지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못한 채 굳어버린 듯 서있었다.

“그럼 약속대로 내 처를 데려가겠네.”

맑고 낯선 목소리에 모두 고개를 돌렸다. 내 뒤에는 흰 옷을 입은 검고 긴 머리를 한 남자가 서있었다.

“누구세요?”

“당신 누구야?”

나와 아버지 아버지의 물음에 남자가 대답했다.

“이 처자의 지아비요. 처자의 친모와 한 약조이니 자초지종은 천천히 들으시게나.”

“처? 지아비? 당신 이게 무슨 소리야?”

“아니, 난 그게. 정 의원이 날 쫓는 것도 모자라서 무연이를 어쩌고 하겠다니까 너무 다급하기도 하고 나도 죽을 거 같아서 도저히 혼자 어쩔 수 없어서 그만….무연이를 보호해주겠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죽을 뻔 해? 지금은? 당신 괜찮아?”

아버지가 엄마를 향해 등을 돌리고 다가가려고 하자 내 앞의 남자가 말했다.

“그럼 난 이만 내 처와 가보겠네.”

흰 옷의 긴 머리를 한 남자는 내 손을 잡고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난 엄마와 아버지의 재회가 눈앞에서 놓치는 걸 막지 못한 채 어디론가 멀리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두렵지 않았다. 수돗가에서의 청량한 감촉이 다시 떠올랐다. 내 머릿속에서 또렷하고 분명하게 기억나는 건 오늘은 발렌타인 데이이고, 날 버린 엄마가 날 구하기 위해서 신기한 구슬에게 날 시집보냈다는 것이다. 하얀 비단으로 감싼 어깨에 폭 안긴 내 머리 위로 남자가 물었다.

“헌데 로즈 발렌타인이 뭐하는 작자요?”

lion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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