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개월 – 1 (제1회 종말 문학 공모전 대상작)

  • 장르: SF, 호러 | 태그: #최경빈 #종말문학공모전 #종말
  • 평점×23 | 분량: 135매
  • 소개: 어느날부터 여자들이 하나둘 남자로 변해버린다. 여자가 사라지는 종말의 세상,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군상의 민낯을 만난다. 제1회 종말 문학 공모전 대상 수상작. 더보기

10개월 – 1 (제1회 종말 문학 공모전 대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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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성탄절

그날도 그가 아내를 사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누군가 그에게 아내를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언제나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내에 대한 사랑을 매일 같이 자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사랑을 자각하지 않는 순간에도 사랑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가 그날 아내를 사랑했는지 혹은 사랑하지 않았는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한 건 그가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고 자각하는 빈도가 잦았던 시절은 이미 이십여 년 전에 지났다는 것과, 그 전날 밤 그가 당직으로 집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사실뿐이다.

아내가 불임으로 인한 우울증을 수십 년째 앓고 있다는 사실이 아내를 향한 그의 사랑에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자식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 어쩌면 아내가 몇 번의 자살기도를 할 정도로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두 사실 모두 아내를 향한 그의 사랑에 영향을 끼쳤을지 모른다.

혹은 두 사실 모두 아내를 향한 그의 사랑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어찌되었든 그는 이십여 년간 성실한 남편이었고, 비록 다정하진 않았지만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아내의 우울증이 영향을 끼쳤다고 확신할 만한 일은 그의 사랑이 아니라 그날의 일이었다.

그날, 그는 당직을 마친 터라 몹시도 피곤했다. 그는 어서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차를 몰았다. 길에는 성탄절을 맞아 전구를 단 나무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반짝이는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는 차를 돌렸다. 제과점에 들려 작은 케이크를 하나 샀다. 케이크에는 산타와 눈사람이 장식되어 있었다. 그는 케이크 상자를 옆 좌석에 싣고 다시 차를 집으로 몰았다.

집에 도착한 그는 아내를 불렀다. 아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케이크 상자를 식탁 위에 두고는 안방으로 걸어갔다. 안방 문을 열려다가 멈칫하고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식탁으로 돌아와 케이크 상자를 집어 들었다. 케이크 상자를 한 손에 든 채, 그는 안방 문을 열었다. 삐걱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는 아내를 보았다.

아내는 천장에 목을 맨 채 축 늘어져 있었다.

그는 케이크 상자를 떨어뜨렸다.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주저앉지 않기 위해 벽을 짚었다. 잠시 동안 멍하니 아내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아내에게로 다가섰다. 무언가 조금 이상했다. 아내의 시신을 바라보며, 그는 무엇이 이상한지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는 눈을 의심하며 시신을 가까이서 살폈다. 사실을 확인한 그는 충격에 빠져 시신의 얼굴을 자세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그는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비록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의 아내가 맞는 듯했다.

아내는 남자로 변한 채 죽어 있었다. 마침내 그는 주저앉고 말았다.

1. 어느 연인

세상은 작년 12월 25일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왜 하필 크리스마스부터였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날의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들떠 있었다. 눈이 오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다. 크리스마스는 그 자체만으로 사람들을 설레게 만들었다. 누군가는 그날에도 공장에서 먼지를 마시고, 누군가는 전 날의 당직으로 쌓인 피로에 종일을 잠자는데 보내고, 또 누군가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을 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리에 반짝이는 알록달록한 불빛과 가수들이 부르는 캐럴, 그리고 어쩐지 평소보다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데 만족하고 있었다.

그날이 좀 특별한 날이었더라면 사람들이 받은 충격 역시 덜 했을까, 또 내가 그날을 이토록 생생하게 기억하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면 머릿속이 무거워진다. 현실감이 없는 보도였고, 휴일의 기분에 젖은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TV를 껐다. 각자 데이트를 하고 술을 마셨다. 나 역시 그랬다. 누군가의 장난이려니, 어차피 별로 믿음도 가지 않는 언론의 오보이려니 했다.

조금 더 믿을 만한 거짓말을 하지, 웃어넘기며 여자 친구의 손을 잡았다. 여자 친구 역시 웃었고 우리는 계속 걸었다. 그 때의 여자 친구가 입은 검은 코트를, 하얀 목에 두른 푸른 목도리를, 또각또각 소리가 나던 적당한 굽의 구두를, 투명한 듯 반짝이던 매니큐어 바른 손톱을, 만약 그날이 크리스마스가 아니었더라면 이토록 생생하게 기억하진 않았을 텐데. 이틀 전에 입은 옷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나인데. 그런 생각들을 하며 신의 저주를 원망한다.

3일 전에 받은 전화는 그녀에게서 걸려온 열흘만의 전화였다. 그 열흘간 우리는 단 한순간도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전화를 할 필요 역시 없었다. 불치병에 걸린 아이의 손을 꼭 붙잡고 곁을 떠나지 않는 엄마처럼, 난 그녀의 손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희망에서라기보다는 필연적인 절망에 대한 위로였다.

그녀의 손을 잡고, 그녀의 반짝이는 손톱을 쓰다듬고, 그녀의 머릿결을 매만지며, 두려움에 질린 그 검고 선명한 눈동자를, 나 역시 불안을 감추지 못해 흔들리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우리는 열흘을 내리붙어 있었다. 모든 순간을 마지막 순간이 될까 불안해하며, 혹여나 함께 있는 지금을 세월 지난 후에 잊게 될까 머릿속에 꾹꾹 새기며, 그녀의 살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녀의 매끈한 손톱을, 자꾸만 쓰다듬었다.

단 세 시간에 불과했다. 갈아입을 속옷이 필요했고 장을 볼 필요가 있었을 뿐이다. 불안해하는 그녀를 안심시키고, 그녀의 집에서 나와 내 방에 들러 속옷을 챙기고, 마트에서 귤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그녀와 떨어져 있던 시간은 세 시간뿐이었다.

그녀에게서 단절된 지 세 시간 만에 걸려온 전화를 받은 후 난 들고 있던 귤을 떨어뜨렸다. 귤을 고르는 내 곁에 서 있던 마트 직원은 별 일 아니라는 듯 떨어진 귤을 집어 들었다. 그는 그러한 일에, 그러니까 전화를 받은 고객이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들고 있던 귤을 떨어뜨리는 것과 같은 일에 익숙했던 것일까. 혹시 그도 여자였을까. 지금 생각해 보니 그의 키는 자그마했고 얼굴선도 고운 편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며, 장바구니를 마트 한구석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채 그녀의 집이 아닌 나의 집으로 돌아오며, 전화기 너머 흐느끼던 목소리를, 그 낮고 굵직한 음색을, 익숙한 듯 낯선 목소리가 숨을 삼키며 중얼거리던 낱말들을, 고막에 달라붙은 듯 귓가에서 떠나지 않는 미안하단 말들을, 곱씹고 다시 곱씹었다. 그녀의 방으로 찾아갔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건 이미 집에 돌아와 베개에 얼굴을 묻었을 때였다. 그리고 난 찾아가지 않았다.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사흘 동안 나는 그녀와 함께한 추억들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지냈다. 함께 밤을 새운 날, 추운 계절엔 꼭 붙어 있다가도 더운 계절엔 손에 땀이 난다며 슬며시 잡은 손을 놓던 나날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두 달 전의 크리스마스가 생각이 났다. 함께 보낸 두 번째 크리스마스, 그녀의 푸른 목도리, 매니큐어 바른 반짝이는 손톱. 이제는 목도리를 둘러줄 수도, 손톱을 매만질 수도 없을 것이다. 더 이상은 그녀와 함께 할 수 없다. ‘그녀’는 없다.

지난 두 달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따금 떠올리던 망상들이, 우리는 남들과 다를지도 모른다는, 우리만은 특별할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희망의 잔상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소용없을 것을 알면서도 수시로 떠오르는 헛된 기대의 파편들을, 단지 떠올랐다는 것만으로 위로받으며 서로의 눈을 바라보던 두 달. 그럼에도 기대가 무너질 순간의 절망이 두려워 서로에게 그 희망을 감추던, 각자 가슴 깊숙한 곳에 희망을 파묻던 나날들의 적막함이 후회로 남아 날 괴롭혔다.

우리는 지난 두 달간, 아니 붙어 있던 열흘간이라도 희망을 가져야 했을까. 혹시 희망을 놓아버린 우리의 보잘것없는 의지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닐까. 왜 우리는 우리가 특별할 것이란 믿음을 그리도 쉽게 포기해 버렸을까.

앞날에 대한 막연함이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허파를 짓눌렀다. 이제는 그 어떤 여자도 사랑할 수 없을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건 그녀와의 사랑을 과대평가하는 감수성이 아닌, 지극히 현실적인 전망일 뿐이다.

세상은, 아니 인류는 멸망해 가고 있다. 천천히, 혹은 빠르게, 인류는 번식을 할 수 없는 상태로, 더 이상 후손을 남길 수 없는 상태로, 죽어갈 것이다. 사라져갈 것이다. 여자가 사라져 간다. 12월 25일 이후, 모든 신생아는 남자로 태어나고 여자들은 소녀건 할머니건 남자로 변해가고 있다.

더 이상 태아는 수정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그렇다. 오늘 아침 본 뉴스에서 아나운서가 밝힌 성비 추정치는 이미 7:3을 넘어섰다. 이제 더 이상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여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을 즈음에는 세상에 여자가 없을 테니까.

사랑은 사랑으로 잊으라던 케케묵은 처방전은 실효성을 잃었다. 지구에 남자만 남는 순간은 머지않아 도래할 것이다. 두 달 만에 삼분의 일이 넘는 여자들이 남자로 변했다. 모든 인류에 대한 거세. 수컷의 슬픔은 공포와 절망의 색채를 띠었고, 수컷의 세상은 미쳐갔다.

남은 여자들이나마 유린하려 눈을 벌겋게 뜬 광기어린 사람들이며, 일찌감치 동성애로 눈을 돌린 영리한 사람들, 다 포기하고 경건히 수음하는 사람들, 그러한 무리 속에 이제 나 역시 속할 터였다. 절박하고 치열한, 그러나 아무런 희망도 없는 멸망의 심연, 그 한가운데에서 다만 내가 조금 특별한 점은 여느 이별한 연인과 같은 ‘평범한’ 실연의 아픔을 겪고 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연인과의 이별은 그 상황이 어떻건 다른 모든 가치를 무색하게 만들고 한 사람을 단지 슬픔에 젖게 만든다. 그래서 난 거세된 수컷의 공포에 질린 어떤 한 부류에 속하기보단 한 명의 철저한 개인으로 실연의 슬픔에 지배당하고 있다. 나는 근본적인 절망보단 추억과 그리움 때문에 괴로웠다.

사흘 만에 집을 나섰을 때, 자취방의 냉기가 아닌 한 겨울 저녁의 공기가 뺨에 시리게 달라붙을 때, 나는 세상이 그대로라는 안도와 좌절을 동시에 겪어 기분이 묘해졌다. 여전히 바삐 지나다니는 사람들, 그러나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여자들. 여전히 건물마다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는 간판들, 그러나 벽마다 쓰인 세상을 저주하는 낙서들. 여전히 쌩쌩 지나다니는 차들이 변한 점은 전보다 신경질적이라는 것 정도였다.

신호등이 바뀐 횡단보도에 화를 내듯 끼익 소리를 내며 멈추는 승용차와 그 차를 향해 거친 욕설을 뱉으며 횡단보도를 건너는 행인들. 그 행인들 사이에 껴서 나 역시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리고 횡단보도의 끄트머리에서, 행인들이 피해가는 어떤 것이 버려져 있는 그 곳에서,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버리는 그것을 보았다.

뚱뚱한 고양이. 하지만 이제는 고양이가 아닌 고양이 시체일 뿐인 뚱뚱한 고양이. 어느 난폭한 차가 잔뜩 성을 내며 지나갔기 때문일까. 혹 전화기 너머 굵은 목소리에 절망한 어느 운전자의 좁아진 시야 때문일까. 으깨어진, 원래는 흰색과 갈색이 적당히 섞여 있었을, 이제는 납작하고 빨간 고양이.

그 고양이를 바라보다 날카로운 경적소리를 듣고 황급히 인도에 들어섰을 때, 그 큰 경적소리만큼 화가 났을 봉고차가 쌩-하는 소리를 내며 지나갔을 때, 나는 문득 언젠가 그녀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저렇게 뚱뚱한 고양이는, 아마 임신한 고양이일 거야. 내가 키우던 고양이는 임신하니까 온 몸이 다 뚱뚱해지더라.

지하철을 기다리며 머릿속의 고양이를 지우기 위해 떠올린 생각은, 놀랍게도 사회는 아직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비록 말도 못할 혼란 중이지만, 어쨌든 지어지던 건물은 마저 지어지고 은행 속의 예금도 꼬박꼬박 이자로 불어나고 있다. 수많은 회사와 가게들이 망했지만, 그래도 아직 사람들은 법을 지키고 돈을 번다. 인류가 멸망할지라도 당장 죽지 않는 한 먹고는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가고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거의 망했다. 파스타가 잘 팔리기엔 여자가 너무 적어졌다. 1년간 아르바이트를 해 정이 꽤 들었던 데다가 사장도 사람이 좋았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 파스타 집을 고깃집으로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장은 장사가 잘 되던 가게인지라 미련이 꽤 남는 모양이었다. 아니, 사실 그보단 정신이 반쯤 나가버린 것 같았다. 2주 전쯤, 내가 가게를 그만두겠다고 말했을 때, 텅 빈 홀에서 주방장과 함께 TV를 멍하니 보고 있던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달 며칠 일했지?”

“3주 일했습니다.”

“어차피 나와서 한 것도 없잖아.”

내 표정이 굳어지자 사장은 고개를 선선히 끄덕이며 말했다.

“농담이야. 입금해 줄게. 수고했다.”

그러나 사장은 2주가 넘도록 입금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다시 사장을 만나기 위해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지하철이 도착하고 아이부터 노인까지 남자뿐인 지하철에 올라탔다. 지하철은 여자들이 다니기엔 너무 위험한 곳이 되어버렸다. 여자들은 이제 인류의 3할밖에 남지 않았고, 그나마 남은 이들도 숨어 있기에 급급했다. 괜히 밖을 돌아다니다가는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었다.

아무리 사회가 가까스로 유지되고는 있다지만, 범죄를 억제하는 힘이 나날이 약해져 가고 있는 것은 자명했다. 그래서 지하철엔 남자만 있었다. 애초에 남자였던 자들과, 남자가 되어버린 자들이 절망 가득한 한숨을 내쉬며, 그래도 살아야겠기에 한 차 가득 붐비고 있는 것이다.

한 정거장이 지났을 때 새롭게 탄 사람들 역시 남자뿐이었다. 그 중에 여든은 되어 보이는 한 노인이 노약자석에 앉았다. 노약자석 옆에 서 있던 난 그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구멍이 숭숭 뚫린 모자. 깊게 팬 팔자 주름. 흰 솜털이 수북한 귀, 그리고 혈관이 천천히 뛰고 있는 낡고 건조한 손. 지하철이 한강을 지날 때, 노인은 힘겹게 허리를 돌려 창밖을, 밤의 강과 그 어둠 속 수면 위에 일렁이는 주홍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창에 노인의 얼굴이 비쳤다. 노인의 무테안경 너머로 보이는 희미한 눈동자를, 세월에 바랜 듯 연해진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횡단보도에 죽어 있던 고양이를 떠올렸다. 죽은 고양이의 뱃속에서 죽어갈 핏덩이들을, 그리고 그녀의 반짝이던 조그맣고 예쁜 손톱을 떠올렸다. 그녀는 이제 그 길쭉하고 모양 좋은 손톱을 잘랐을까, 손톱을 덮고 있던 얇고 반짝이는 막을 벗겨냈을까. 그녀의 손톱이 노인의 눈동자처럼 흐릿해진다.

강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이 축축해진 듯싶어 난 고개를 돌렸다. 저 만큼 산 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지금의 현실을, 신의 저주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 지독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지, 상상해 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시 힐끔 본 노인의 회색 눈동자에서 한강의 불빛이 일렁였을 때, 문득 그녀의 손톱이 아직 반짝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뚱뚱한 고양이의 뱃속에서 새끼들이 꾸물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지하철은 한강을 지나쳤다. 다시 어두운 터널로 들어선 지하철의 창은 세상 대신 차 내부를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노인은 다시 허리를 돌려 정면의 허공을 응시했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5분쯤 걸어 도착한 가게는 닫혀 있었다. 지금껏 정기휴일 외에는 가게를 닫는 일이 없던 사장이었기에 가게 문이 닫혀 있는 건 무척 의외였다.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아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은 갔지만 전화는 받지 않았다. 문득 사장에게 돈을 받는 일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 사실 사장이 말한 대로 3주간 일하면서 받은 손님은 하루에 한두 팀이 고작이었다.

대개는 가게에 앉아 사장, 주방장과 노닥거린 것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난 돈이 필요했다. 계획했던 대로 이번 학기를 다니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받아야 할 돈을 점잖게 거절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싶었지만 모아 놓은 돈은 그리 많지 않아 당장 두세 달이 빠듯했다.

돈이 얼마나 사람을 치졸하게 만드는지, 스스로를 외면하게 만드는지, 이젠 무언가 삭막하다는 느낌 외에는 잘 들지 않을 정도로 무뎌졌다. 세상이 이렇게 된 마당에 당장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어쩔 수 없다. 3주 치 월급이 힘들면 그 절반이라도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닫힌 가게 문 앞에 잠시 쭈그려 앉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 가게 앞 작은 횡단보도의 불이 바뀌고 익숙한 얼굴이 걸어왔다.

“어쩐 일이냐?”

주방장은 담배를 한 대 입에 물며 말했다.

“사장님 안 나오시나봐요?”

물음에 물음으로 답한 나를 주방장은 빤히 쳐다봤다.

“응, 그저께부터.”

“이제 장사 그만 한대요?”

“아니, 집에 일이 좀 생겼다나봐.”

주방장은 담배를 깊게 내뿜었다. 불혹 즈음의 몸속을 휘젓고 나온 연기가 닫힌 가게 문 앞에서 흩어졌다.

“주방장님은요?”

“나야 뭐 저녁에 집에서 할 것도 없으니 앉아 있기나 하려고 나온 거지. 알잖아, 우리 사장 자기 없을 땐 장사 안 시키는 거.”

“네.”

난 몸을 일으켜 섰다. 오래 쭈그려 앉아 있어서인지 다리가 저려왔다.

“월급 아직 안 넣었디?”

“네.”

“정신이 없어서 그런 거니까 곧 넣어줄 거야.”

“무슨 일인데요?”

“마누라가, 그렇게 됐대.”

그리고 오랜 침묵이 감돌았다. 말없이 서 있는 내게 주방장은 잘 가라고 말하곤 가게 문을 열기 위해 열쇠를 꺼냈다. 쭈뼛거리며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가 다시 한 번 주방장을 불렀다.

“주방장님.”

“왜?”

“저 담배 한 대만 주세요.”

“너 담배 안 피우잖아.”

“그냥 하나만 주세요.”

주방장은 담뱃갑에서 담배를 한 대 건네면서 물었다.

“불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물고 걸으며, 난 사장과 몇 번 본 적이 있을 뿐인 사장의 아내, 그리고 딱 한 번 가게에 놀러왔던 사장의 두 어린 아들들을 떠올렸다. 가혹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는 지나가는 한 남자에게 라이터를 빌려 담배에 불을 붙였다.

몇 년 전에 잠깐 피웠을 뿐인 담배였지만 기침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언제쯤 돈을 받을 수 있을까를 가늠해 보았다. 칠십만 원까진 됐고, 한 사오십만이라도 빨리 줬으면 좋겠는데. 사장의 아내와 아들들에 대한 생각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돈 생각에 난 더 깊은 한숨을 담배 연기로 내뱉었다.

가야금 소리가 듣고 싶다. 이따금 짊어지고 걸어갈 때면 무거워 던져버리고 싶기도 했지만, 그녀의 무릎 위에 얹어진 가야금은 모습도 소리도 아름다웠다. 대금 부는 친구의 성화에 관심도 없던 어느 대학교 국악과 공연에 갔던 날을, 그날의 가야금 소리를, 실컷 졸기나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갔건만 잠들기는커녕 허리를 곧추세우게 만든 그 소리와 그 자태를, 다시 보고 싶고, 듣고 싶어진다. 공연장의 공기가 파르르 떨리던 은근한 울림이, 그 음색이, 가야금 위를 노닐던 그녀의 흰 손이, 자꾸만 생각났다.

“잠깐 매니큐어 좀 바를게요.”

공연이 끝나고 친구를 기다리며 앉아 있던 카페에서, 짐 좀 나르고 올 테니 같이 기다리고 있으라며 내 앞 자리에 그녀를 남겨두고 휙 떠나버린 친구를 소재 삼아 몇 마디 나눈 말도 멎었을 때, 그녀는 매니큐어를 꺼내 손톱에 발랐다.

“공연 때는 절대로 못 바르거든요.”

그녀는 가야금 위를 노닐던 매끈한 손톱 위에 투명한 매니큐어를 발랐다.

“색깔 있는 건 평소에도 못 발라요.”

그녀가 입으로 후후 불고 있는 손톱이 반짝였다.

“지금 바르고 있는 투명한 게 더 예쁠 것 같은데요.”

말을 하자마자 어색하게 입을 다문 나를 그녀는 멀뚱멀뚱 쳐다봤고, 때마침 도착한 친구는 기껏 둘이 있게 해 줬더니 분위기가 이게 뭐냐며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놨다.

그녀의 가야금 소리가 듣고 싶다. 난 예정치 않았던 행로를 결정했다. 그녀의 집은 이곳에서 버스로 15분. 15분 후에 나는 그녀의 집 앞에 서, 마치 가게 앞에서 했던 것처럼 문을 두드리고, 사장에게 돈을 요구하듯 그녀에게 가야금 연주를 요구할 것이다.

남자로 변했더라도 그녀의 연주 실력은, 또 가야금 줄을 뜯던 손놀림은, 그 가야금에서 흘러나오는 음색은, 변하지 않았을 터였다. 나의 결핍을, 지난 3일간에 한 쪽 구석이 뭉텅이 채 떨어져 나갔던 마음의 공허를, 나는 위로받아야만 한다. 그래서 난 버스 정류장에 서 버스를 기다렸다.

익숙한 번호의 버스를 타고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 가로등 불빛이 창가 가득 떨어졌다. 더운 히터에 몸이 따끈해져 창문을 살짝 열었다. 5센티미터쯤 열린 창문으로 찬 공기가 들어왔다. 난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굵은 골격과 턱 밑에 두껍게 자라고 있을 수염,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그녀의 남동생과 닮았겠지. 날카로워졌을 눈매, 투박해졌을 턱과 코, 그리고 이제는 다부질, 원래는 가느다랗던 흰 팔. 상상할수록 괴리감이 날 괴롭혔다.

“우리는 잃어가는 거야.”

남자가 되기 며칠 전 그녀는 절망적인 눈빛으로 말했다. 남자가 될 것이란 공포에, 자신의 성 정체성을 송두리 채 빼앗길 것이란 공포에, 새로운 성으로 살아나가야 한다는 변화의 공포에 질려, 그녀는 내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인간은 잃어가고 있어.”

“뭘?” 하고 묻는 내 질문에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모든 걸.”

침묵이 감돌았다. 난 그 침묵이 간지러워 얼마를 참지 못하고 답했다.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할지라도, 당장 죽는 게 아닌 이상 지금을 사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잃는 건 아니야.”

“아니야 모든 걸 잃는 거야. 성을 빼앗긴 사람들도, 동반자를 잃는 사람들도.”

내 손을 꼭 움켜쥐는 그녀의 손이 차가웠다.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이 불쌍해. 그 아이들은 엄마도 잃고 사회도 잃은 채 살게 될 거야. 평생을 그것들 없이 살아야 해.”

“원래 사람은 혼자야.”

“알아. 난 혼자가 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야. 결핍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야.”

그녀는 내 손을 놓고 돌아누웠었다. 난 돌아선 그녀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차피 성은 결핍이야. 절대로 채워질 수 없는걸.”

그녀는 대답하지도, 날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때 그녀는 소리 없이 울었다. 섹스 생각이 났던 나는 그녀의 울음에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면서도 말했다.

“하자.”

“싫어.”

“왜?”

“하고 싶지 않아.”

“왜?”

“하고 싶지 않으니까.”

한참을 달래고 나서야 그녀는 날 돌아봤고, 우리는 섹스를 할 수 있었다.

이제는 그녀가 아닌 ‘그’가 되어 있을 그녀의 집 앞에 서서, 나는 버스정류장 근처 편의점에서 산 담배를 연거푸 피워댔다. 그녀를 만나는 일이 그녀에게 혹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받을 상처가 두렵기도 했다. 전화기 너머 그녀의 굵은 음색을, 나지막이 울리던 그 목소리를, 이제는 눈앞에 선 어떤 남자의 입을 통해 들어야 한다. 그녀를 많이 닮았을, 하지만 그녀가 아닌 어떤 한 남자.

그런 그녀의 앞에서 당황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 당황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될지, 안 그래도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그녀의 속내를 얼마나 어지럽힐지, 나는 겁이 났다. 그럼에도 가야금 연주를 듣고 싶다는 갈망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난 이내 마음을 굳히곤 그녀의 집 문을 두드렸다.

157cm. 아담한 그녀의 키. 내 앞에 서 있는 157cm의 남자는 나를 보고 얼어붙은 듯했다. 나 역시 움직일 수 없었다. 작은 키를 빼곤 그녀의 동생을 많이 닮아 있었다. 숱 많아진 눈썹, 거칠어진 피부, 그리고 굵어진 코. 예전에는 가슴이 봉긋 솟아 있던, 그러나 이제는 다부진 몸에 달라붙어 있는 연두색 펭귄 티셔츠.

먼저 움직인 건 내가 아니었다. 그녀는, 아니 그는 서둘러 문을 닫으려 했다. 반사적으로 닫히는 문을 붙잡았다. 그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 볼 자신이 없어 시선을 돌렸다.

“왜 이래?”

전화기 너머로 들리던 그 굵은 음색이 마침내 그의 입을 통해서 나왔고, 그 목소리가 그녀와는 너무나도 달라 난 그와 그녀가 같은 사람이라는 걸 납득할 수가 없었다. 내가 당황하고 있는 동안 그는 문을 세게 잡아당겼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에 대고 말했다.

“열어줘.”

문 너머로 낮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왜 왔어?”

이를 앙다물고 하는 말이었다. 마치 으르렁거리는 소리 같아 대답하는 내 목소리는 작아졌다.

“가야금. 가야금을 듣고 싶어.”

그는 한참을 울었고, 난 그의 문가에 기대앉아 그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의 방은, 그러나 이제는 그녀가 아닌 그가 살고 있는 방은 난장판이었다. 흐느낌이 잦아들 때쯤 문을 열어준 그는 내가 방에 들어서자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시 울었다. 등을 돌린 그의 곁에 다가가 어깨를 잡아줄 용기가 나지 않아 침대 옆에 우두커니 서 울음이 멈추길 기다렸다.

“미안해. 그냥 가야금 소리가 듣고 싶어서 찾아왔어.”

“연주 안 해.”

“왜?”

“하고 싶지 않아.”

“왜?”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의 말투가 그녀의 말투여서 놀랐다. 난 어느새 그를 그녀와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를 보고 싶다는, 정말 남자로 변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깊숙이 감춘 채, 그저 가야금 소리가 듣고 싶다는 바람을 핑계 삼아 만난 그녀가 더 이상 ‘그녀’가 아닌 것을 알게 되자, 난 그녀에 관한 생각을 잊고 오로지 가야금에 대해서만 집착해 버린 것이었다.

내가 찾아온 것은 가야금 때문이니 그녀가 없더라도 가야금 소리를 듣고야 말겠다는 집착, 그건 내심 있을 거라 믿었던 그녀의 부재에 대한 치사한 자기기만이었다. 그녀와 닮은 키 작은 남자와 그녀를 내심 분리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그녀의 말투로, 그 퉁명스런 말투로 대답하는 모습에서 나는 새삼 그녀를 느꼈다. 그가 그녀라는 사실이 어렴풋이나마 다가왔다.

“미안해. 제발 들려줘.”

그는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걷고 눈물에 범벅이 된 눈으로 날 쏘아봤다. 난 그 눈빛을 담담히 받아내려 노력했다.

그는 이윽고 가야금을 꺼내들었다. 그의 단단한 무릎 위에 그녀의 가야금이 놓였다.

첫 번째 음. 첫 번째 현이 진동할 때 모든 것이 시작된다. 팽팽히 당겨진 현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할 때 흐트러지는 대기를, 현이 떠나간 자리를 어루만지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대기의 파문이 공간에 일렁이는 여운을, 나는 사랑한다. 영영 울릴 것만 같은 그 첫 음이 고요하게 잦아들 때, 느림에 조마조마해지는 나의 가슴, 그 조바심을 토닥이는 긴 숨.

그의 어깨가 둥글게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던 어깨가 튕겨 오르며 두 번째 음이, 또 세 번째 음이 이어졌다. 그의 손은 오르락내리락 거리며 파도처럼 넘실댔다. 열두 줄 위의 열 손가락이 정교하게 춤췄다. 손가락은 현을 달래듯 어루만지다가 때론 나무라듯 튕겼고, 음은 점차 넓고 얇은 비단처럼 퍼져갔다. 애달팠다.

방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가야금을 타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뒷걸음질쳤다. 그의 어깨가, 그의 팔이, 그의 손가락이, 읊조리듯 애잔하게 퍼지는 음색이, 그녀의 것과 똑같아 나는 그로부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물러서는 발걸음과 반대로 나의 시야는 좁아져만 갔다.

그의 몸, 그의 손, 그의 손가락, 그의 손톱. 그의 손톱이 별처럼 반짝였다. 그 반짝임은 그녀의 것이었다. 얇고 투명한 매니큐어의 막. 아직 벗겨내지 않았구나. 그녀가 남자가 되어도 여전히 그 손톱을 덮고 있는, 그의 손톱이 그녀의 손톱이었음을 기억하는 투명한 매니큐어. 아직도 반짝이고 있는 그 손톱을 얼마나 사랑했던가. 그리고 또,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등이 벽에 닿았을 때, 난 뒷걸음질을 그만두고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 발자국 내딜 때마다 그 한 발자국만큼 그가 가까워졌다. 방 안은 음의 진동으로 가득했다. 그 끊길 듯 이어지는 구슬픈 음색 가운데서 나는 어지러움을 참으며 한 발짝씩 내디뎠다. 가야금의 한 곡조가 된 듯, 13번째 현이 된 듯, 몸이 부드럽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팔이 그리는 곡선은 내가 사랑한 그녀였다.

그를 안았다. 대충 잘라낸 듯한 그의 거친 머리카락 끄트머리가 목 언저리를 간질였다. 따스했다. 그녀의 온도였다. 그는 그녀였다. 그녀가 내 품 안에서 둥근 선을 그리며 우리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을 잡았다. 멈춘 그녀의 손가락 아래에서 현 한 가닥이 파르르 울었다. 그 울림이 우리를 감쌌다. 내 품 안에서 그녀가 울리기 시작했다. 현이 아닌 그녀의 몸이 진동하며, 그녀의 흐느낌이 가야금 음색처럼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난 그녀의 울림을 막지 않고 그녀의 울림이 방 안에 파문으로 번지는 것을 가만히 들었다.

영영 멈추지 않을 것 같은 파문의 생성도 언젠가는 멈춘다는 것을 알기에, 파문이 번져나가는 구심점을, 그녀의 몸을, 껴안은 팔에 힘을 주지도 팔을 놓아버리지도 않은 채, 그 파문이 방과 내 가슴 속에 번지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파문이 잦아들었을 때 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건 어떤 특별한 종류의 환희였다. 떨어져 나갔던 나의 일부분이 재생되는, 혹은 귀환하는 축복이었다. 멎었던 음악이 다시금 연주 되는 앙코르였다. 그녀의 입술이 따스하다고 느끼며, 농밀한 입 속을 혀로 구석구석 어루만지며, 비로소 내가 진정 원했던 바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사랑한 건 그녀 자체였다.

그녀라는 사람을 사랑했기에, 혹 그녀가 여자가 아닐지라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중요한 건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고, 그녀 역시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그 자체였다. 그런 그녀와의 섹스는 결핍이 아닌 충족이었던 것이다.

입맞춤이 격해지며 난 예전만큼 부드럽지 않고 딱딱한, 그러나 그녀의 것이 확실한 등을 어루만지다가 습관적으로 그녀의 가슴을 찾았다. 보드랍고 물컹한 가슴은 손에 닿지 않았다. 그녀의 가슴이 없는 자리에서, 그녀의 가슴이 있었던 자리에서, 허공을 움켜쥔 나의 손이 불안으로 굳었다. 그 일말의 불안이 거세질까 두려워 얼른 다시 그녀의 등을 매만졌다.

“하고 싶어.”

그녀의 말에 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이었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라 일어선 그녀가 날 안았다. 그녀가 날 안았을 때, 오른쪽 허벅지 쪽에 무언가 닿는 낯선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오른 발을 뒤로 뺐다가 그녀가 실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슬쩍 다시 제자리로 옮겼다.

“괜찮겠어?”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안에 나를 조금 남겨두고 오는 그 행위를 지난 며칠 간 얼마나 하고 원했던가. 그녀가 내 것이란 사실을 얼마나 확인하고 싶었던가. 비할 데 없는 쾌감을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응. 하고 싶어.”

내 대답에 그녀는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곤 침대에 누웠다. 나 역시 그녀의 옆에 누웠다. 그녀의 매니큐어 바른 손가락이 천천히 움직이며 나와 그녀의 옷을 벗겼다. 알몸이 되었을 때, 그녀는 나의 성기를 매만지며 속삭였다. “사랑해.” 난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녀가 엎드렸다. 그리고 그녀는 기다렸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눈을 감고 있는 채였다. 이건 새로운 시작이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작은 우리의 사랑이 지속될 수 있음을, 그녀를 잃지 않을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선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 나는 되뇌었다.

어떤 이들은 이 행위에 대한 역사를 논하고, 어떤 이들은 이 행위에서 보통 남녀의 성교로는 얻을 수 없는 쾌락을 느낀다고 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 다른 어떤 이들에게 각광받고 있다면, 그 일은 분명 나름의 매력을 가진 일일 것이다. 아직 내가 모른다고 해서 배척해선 안 된다. 그 매력을 깨닫는 일일지도 모른다. 엎드린 그녀의 뒤에 무릎으로 선 채, 어렵사리 눈을 떴다.

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항문을 들이민 채 삽입을 기다리는 한 남자의 육체였다. 어깨에서 둔부까지 이어지는 각진 선과 튀어나온 척추, 둔부 아래 다리 사이로 보이는 고환. 그 고환이 달랑거렸을 때, 고환 너머로 빳빳해진 남자의 성기가 보였다.

엉겁결에 나는 그를 밀쳤다. 갑작스레 밀쳐진 그는 경악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허겁지겁 팬티를 입고 바지를 입었다. 바지에 다리 한 쪽을 집어넣고 반대쪽 다리를 집어넣다가 중심을 잃고 넘어졌다. 넘어지며 가야금에 부딪쳐 가야금이 댕-하고 울렸다. 그는 그런 나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난 다시 몸을 일으켜 바지를 추어올리고 웃옷을 입었다. 그리고 코트를 옆구리에 낀 채 그의 방을 나섰다. 신발도 구겨 신은 채였다. 문이 닫힐 때, 흐느끼는 소리가 비명처럼 들려 난 정신없이 달렸다.

그녀의 집 앞 골목길을 멈추지 않고 달리며, 난 지하철에서 본 노인의 옅은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 눈동자는 어차피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다. 세상 여자들이 남자로 변해간다고 해서 노인의 수명이 짧아지거나 길어지진 않는다. 내 채워질 수 없는 섹스에 대한 갈망 역시 예전과 다를 바 없다. 어쩌면 세상은 변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뚱뚱한 고양이는 누가 죽였을까. 난 폐가 찢어지도록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2. 아이들

“우리가 엄마를 지켜야 해.”

인석의 말에 9살 난 큰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6살 난 작은 아들은 눈을 끔뻑였다. 그는 두 아들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비장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희도 엄마가 남자로 변하는 건 싫지?”

큰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아들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근데 아빠. 엄마가 남자가 되면 엄마도 아빠가 되는 거야?”

인석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작은 아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작은 아들은 무언가 잘못을 저지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자 아빠의 시선을 피해 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아들이 무언가를 물어볼 때면 다정하게 대답해 주곤 하던 아빠였지만 요즘엔 웃기는커녕 신경질적으로 왜 그런 걸 물어보냐고 면박을 주기 일쑤였다. 작은 아들은 아빠가 또다시 신경질을 낼까 두려워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인석은 작은 아들의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을 바라보다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했다.

“아니. 아빠는 아빠고, 엄마는 엄마야. 엄마가 남자가 되도 엄마는 엄마야.”

“그렇지만 엄마는 여자잖아. 남자는 아빠잖아.”

인석은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억눌렀다.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지자 작은 아들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인석은 의젓하게 앉아 있는 큰 아들을 힐끔 보고는 말했다.

“어쨌든 우리는 엄마가 남자로 변하지 않게 엄마를 지켜야 해. 아빠 혼자는 할 수 없어. 너희들이 아빠를 도와줘야 해.”

“알았어.”

큰 아들이 대답했다. 작은 아들은 형과 아빠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주눅 든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석은 두 아들의 동의를 확인하고는 말을 이었다.

“좋아. 이제 우리가 어떻게 엄마를 지켜야 하는지 설명해 줄게. 잘 들어.”

그의 설명을 요약하면 ‘불침번을 서자’였다.

여자들이 잠들어 있는 동안에 남자로 변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 사실이 밝혀진 초기에는 남자로 변하고 싶지 않은 여자들이 잠을 자지 않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잠을 참는 일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 방법은 변하는 것을 잘해야 이틀 정도 미룰 수 있을 뿐이었고, 졸음을 참지 못해 결국 잠이 든 여자들은 여지없이 남자로 변해갔다. 누군가 옆에서 함께 잠을 자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여자가 남자로 변하는 것을 막고 싶었던 사람들은 이런 저런 실험을 시작했다. 우선 여자가 자는 방에 CCTV를 설치해 여자가 어떤 방식으로 변하는지를 살펴보았지만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몸이 급작스럽게 변한다거나 번쩍하는 빛이 나는 등의 변화는 CCTV에 잡히지 않았다. 사람들이 알아낸 건 그저 여자가 자는 동안 불규칙하게 신체가 남성으로 변해간다는 것뿐이었다. 변하는 속도는 사람마다 달랐고 또 자는 시간에 따라 달랐다. 과학적으로 변화를 설명하려 한 시도는 모조리 실패했다.

사람들은 잠든 여자를 직접 지켜보기로 했다. 누군가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 잠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여자들은 괴로움을 호소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피로를 이기지 못하는 이들과 신경이 두꺼운 이들이 있었기에 실험은 계속될 수 있었다. 실험은 고무적인 결과를 얻었다.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 동안에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실험은 일부 사명감 투철한 연구소에서 진행되었지만, 그 결과가 세상에 곧바로 공표되지는 않았다. 연구원들은 예외가 생길까 봐 두려워했다. 그 예외에 대한 힐난과 적개심이 자신들에게 향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충분한 양의 샘플을 확보할 때까지 발표를 미루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이 확보할 수 있는 샘플은 날이 갈수록 적어졌으므로 발표 역시 무한정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인석이 그 실험의 내용을 들은 건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가게에서였다. 한 명 있던 아르바이트생이 일을 그만두고부터는 그가 직접 서빙을 하고 있었다. 여자들이 줄어든 이후 손님은 하루를 통틀어 한두 팀 있을까 말까였기에 작은 파스타 가게에는 그 손님들밖에 없었다.

두꺼운 안경을 써 눈이 조그맣게 보이는 삼십대 정도의 남자는 목소리를 낮춘 채 이야기하고 있었다. 점잖은 옷을 입고 점잖게 파스타를 내려놓던 인석은 본의 아니게 이야기의 일부를 엿들을 수 있었다. 안경을 쓴 남자는 인석이 오자 말을 그쳤지만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나지막이 중얼거렸기 때문이다.

“오늘 밤부터 당장 밤을 새야겠군. 고마워, 정말.”

인석이 품위 있게 돌아섰을 때, 그의 뒤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안 변했으면 좋겠어.”

인석은 순간적으로 멈춰 설 뻔했지만 가까스로 계속 걸을 수 있었다. 카운터에 돌아온 그는 이후 호시탐탐 손님들의 이야기를 엿들을 기회를 노렸고, 그 결과 실험에 대한 이야기를 대충 끼워 맞추는 데 성공했다. 놀라운 이야기였다. 여자가 남자로 변하는 걸 막을 수 있다.

그는 그날 집에 돌아오자마자 아내를 안방으로 끌고 들어와 손을 부여잡고 손님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평소에도 느긋한 성격이 아니었던 아내는 최근 한 달간 거의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할 정도로 예민해져 있는 상태였다. 인석은 아내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아직까지 남자로 변하지 않은 건 행운이야. 이제 당신이 변하는 걸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았어. 내가 당신을 지킬게.”

결혼 생활 10년간 남들로부터 애처가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은근히 뿌듯해하던 인석이었다. 연애하기 전 짝사랑 한 기간 1년, 연애 4년, 결혼 생활 10년, 도합 15년간 인석은 한순간도 아내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는 변치 않는 애정으로 아내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의 분수에 맞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여자였다. 건강하고 잘생긴 아이를 둘이나 낳아준 여자였다.

인석은 그날부터 당장 밤을 새우기 시작했다. 밤이 새도록 아내를 지켜보다가 아침에 아내가 깨어나면 그제야 잠자리에 들었다. 간혹 자는 중간에 깨어난 아내는 미안한 표정으로 그를 꼭 안아주곤 했다. 그 포옹이면 충분했다. 그는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약 일곱 시간 동안 아내를 지켜보았다. 아내가 깬 후 아침 햇살을 받으며 잠자리에 들 때면 자신이 아내를 지켜냈다는 만족감이 들었다. 그러나 곧 한계가 왔다.

아내는 남편을 위해 일찍 잠들려 애썼지만, 신경을 쓰면 쓸수록 잠드는 시간은 오히려 늦어졌다. 얼른 자야 한다는 부담감이 잠을 쫓기 때문이었다. 인석은 아침에 잠들어 서너 시간만 잔 후에 가게에 나섰고 밤이면 파김치가 되어 돌아와 눈에 억지로 힘을 줘가며 밤을 새웠다.

아내는 서로 교대로 깨어 있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그는 아내가 밤에 잠을 푹 자지 못하면 낮잠을 잘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아내를 홀로 지킨 지 5일 만에 두 아들을 끌어들이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난 큰아들은 엄마를 지켜보고 있었다. 인석은 큰아들을 깨운 뒤 세수를 시키고 절대로 졸면 안 된다는 말을 네 번이나 한 다음에야 잠을 자러 큰아들의 방에 들어갔다. 큰아들은 무척 졸렸지만 눈을 비벼가며 엄마를 지켰다. 엄마가 남자로 변한다는 것의 의미를 큰아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동생의 질문에 아빠는 엄마가 남자로 변해도 엄마는 엄마라고 했다. 엄마가 남자로 변해도 엄마일 수 있다면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엄마가 남자로 변하는 것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 피어오르는 것은 사실이었다. 큰아들은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시계가 5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을 확인하곤 동생을 깨웠다.

동생은 형보다도 힘겨워했다. 칭얼대며 이불을 끌어 당겼다. 형은 동생을 점잖게 타일렀다.

“일어나야지.”

세 살 어린 동생은 희한하리만큼 형의 말을 잘 듣는 아이였지만 새벽에 일어나는 고욕 앞에선 반항했다.

“싫어!”

형은 동생을 가만히 지켜보다가는 다시 엄마의 방으로 향했다. 동생을 위해 한 시간 정도 덜 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여섯 시에 엄마가 맞춰 놓은 알람시계가 울렸지만, 큰아들은 이것 역시 꺼버렸다. 엄마도 푹 자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결국 7시 반에야 깬 엄마는 큰아들을 안고 울었다.

그날 저녁 일찌감치 가게를 닫고 돌아온 인석은 작은아들을 어마어마하게 혼냈다. 작은아들은 크게 울었지만 인석은 개의치 않았다. 아빠가 말하는 가족 간의 사랑과 책임감에 대해 작은아들은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가 화를 내고서야 아빠는 작은아들을 혼내길 그만뒀고, 작은아들은 형의 방으로 갔다.

형은 아빠가 동생을 혼내는 동안 방 안에서 동화를 읽고 있었다. 동화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지만, 동생이 아빠에게 혼나고 있는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가지 없었다. 동생은 침대에 누워 동화를 읽고 있던 형 옆에 누웠다. 눈물이 속눈썹 끝에 대롱대고 있었다.

“형. 뭐 읽어?”

“마법사 이야기야.”

“재밌어?”

“응.”

“나도 읽어줘.”

형은 동생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직 책을 읽지 못하는 동생은 축축한 눈을 비볐다. 밖에선 엄마의 날카로운 고함소리가 여전히 들려왔다. 왜 애한테 그래! 아빠는 엄마에게 꼼짝도 못하고 당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형은 동화의 첫 장을 펴고는 조용히 읽기 시작했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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