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예뻐

  • 장르: 추리/스릴러 | 태그: #충분히예뻐 #장유남 #추리단편 #추리스릴러단편선
  • 평점×4 | 분량: 136매
  • 소개: 돈 때문에 한 여성을 납치하는 일에 가담한 효재. 그러나 곧 기이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경고장을 받고 사건의 배후에 무언가 있음을 깨닫게 되는데……. 더보기

충분히 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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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재희가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일에 종사한다는 것은 소문을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때나마 가장 친한 친구였던 나에게 그런 일을 시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원망하는 소리를 재희가 듣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녀석이라고 길길이 날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온다면 사실 할 말은 없다. 사건이 발생하기 며칠 전, 만취한 채 재희에게 전화를 걸어서 하소연을 늘어놓은 것은 나였으니 말이다.

“뭘 고민해? 일당이 200만 원이라니까!”

재희는 그의 제안을 듣고 망설이는 나를 어이없이 바라보며 말했다.

“딱 삼 일만 고생 해. 그럼 600만원이 거저 생기는 거야.”

이 녀석, 강남에 빌딩 한 채를 갖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싶었다.

부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두렵기도 했다. 재희와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이웃해 살며 가족끼리 친하게 지냈다. 중학교에 올라갈 무렵 재희의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셔서 재희와 재희의 엄마는 친척이 있는 지방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그 후로 거의 연락이 닿지 않았다.

가끔씩 들리는 소문은 모두 흉흉한 것들이었다.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고 깡패가 되었다는 이야기, 사람을 죽여서 감옥에 갔다는 이야기, 나이 많은 여자를 만나 졸부가 되었다는 이야기 등.

재희는 취업 준비생인 나와 달리, 겨우 27살의 나이에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파란만장한 삶을 살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풍문으로만 접하던 재희를 만나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호프집에서 13년 만에 만난 재희는 깔끔한 네이비색 양복을 입고, 함께 온 남자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쪽에서 먼저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면 전문직에 종사하는 신입 사원쯤으로 여겼을 것이다.

재희에게 도움을 청하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거라고 기대하긴 했지만, 600만원은 당장 필요한 액수 그 이상이었다. 마지막 학기 등록금의 상당 부분을 해결할 수도 있었다. 재희의 제안을 듣자마자 무슨 일이든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만약 술에 취해 있지 않았다면, 친구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었을까? 솔직히 장담할 수 없다.

그렇게 해서 나는 한 여자를 납치하는 일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녀가 사는 곳은 강남에 위치한 고급 아파트였다. 재희는 여자가 자주 다니는 동선 내에서 CCTV가 없는 후미진 골목을 일러 주었다. 그녀는 제법 규칙적으로 생활하는 듯했고 덕분에 일을 계획하는 것이 쉬워 보였다.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검은색 세단을 몰고 아파트 단지로 갔다. 근처 관목나무가 우거진 길가에 차를 세웠다. 목표물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그림자처럼 숨어 있어야 했다. 나는 자동차 보조석에 앉아서 마른침을 삼켰다.

“처음인데 혼자서 할 수 있겠어?”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미심쩍은 말투로 물었다. 시선은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재희가 올빼미라고 부르는 동갑내기 남자애. 호프집에서 재희를 우연히 만난 날, 그의 옆에 있던 사람이었다. 지금은 범죄 초보자인 데다 한낱 경영학과 학생에 불과한 나를 위해 재희가 붙여 준 파트너.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올빼미가 비웃음인 듯한 미소를 날렸다.

“마취에서 깨어나면 소리칠지도 모르니까, 입은 테이프로 단단히 막아 둬.”

“응…….”

대답하는 목소리가 갈라졌다.

여자를 납치해서 모텔까지 데려가는 것은 올빼미가 도와주지만 그 후의 일은 혼자서 처리해야 했다. 원래 이 일은 올빼미 혼자 할 계획이었는데 나에게 대신 주어졌다. 자세한 내막이 궁금했지만 캐묻지 않았다.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올빼미의 태도로 보아서는 재희와 둘 사이에 뭔가 있는 것 같았다.

“의뢰인의 조건이 뭔지 들었지?”

“물론. 귀가 닳도록 들었지.”

놀라울 정도로 인간적인 요구 사항.

여자를 삼 일 동안 감금하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말 것, 후에 트라우마를 남길 일체의 행위도 하지 말 것, 따로 금액을 청구해도 좋으니 숙식 제공은 부족함이 없게 할 것 등. 재희는 이 같은 내용을 나에게 읊어 주며 중지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흥! 납치가 무슨 동남아로 떠나는 추억 여행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별 유난스런 고객을 다 보겠다는 말투였다. 나는 재희에게 물었다.

“왜 하필 나야?”

“돈이 필요하다며?”

“그건 그렇지만…….”

친구를 범죄자의 길로 내모는 것이 내심 미안했던지 재희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말했다.

“지금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이 일을 믿고 맡길 사람은 너밖에 없어.”

“왜? 올빼미라는 녀석도 있잖아?”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서 물었다. 재희가 올빼미를 나에게 소개할 때 업계 최고 전문가라고 했던 말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재희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일식 요리사에게 팔딱이는 생선과 회칼을 함께 주면 어떻게 할 것 같니?”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야…… 회를 뜨겠지.”

재희는 “바로 그거야!”라며 손뼉을 쳤다.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에게 재희가 덧붙였다.

“명문대 학생이라면서 의외로 머리 회전이 느리네. 네 말대로 요리사는 생선으로 요리를 하지, 바다로 돌려보내 주지 않는다.”

선문답처럼 아리송한 말이었다.

“직접 만나 봤어?”

내가 옆에 앉은 올빼미에게 물었다.

“누굴?”

“이 일을 시킨 사람 말이야.”

“응.”

“어떻게 생겼어?”

“아주 귀엽게.”

진심인지, 아니면 나를 놀리려고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의뢰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물어보려고 하는데 올빼미의 인상이 굳어졌다. 앞을 보니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앞으로 2박 3일 동안 나와 모텔에서 지내게 될 여자였다.

남자는 밤하늘을 소리 없이 비상하는 올빼미처럼 날렵하게 자동차 밖으로 나갔다. 나는 엉겁결에 그 뒤를 따랐다. 올빼미는 여자의 뒤에 바짝 붙더니 순식간에 마취약이 묻은 손수건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여자는 감전된 오징어처럼 발버둥을 치다가 얼마 뒤 의식을 잃고 축 늘어졌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올빼미는 뒤를 돌아 다급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주어진 임무를 깜빡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여자의 얼굴에 천을 띄우고 자동차 뒷문을 열었다. 올빼미는 여자를 가뿐히 어깨에 들쳐 메고 뒷좌석에 앉혔다. 그는 나더러 여자 옆에 앉으라고 지시했고 나는 군말 없이 그 말을 따랐다. 차는 곧 우리의 다음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의식을 잃은 여자의 몸이 비틀거리더니 내 오른쪽 어깨 위로 떨어졌다. 더러운 천을 사이에 두고 여자의 온기가 전해졌다. 끔찍할 정도로 현실적인 감각이었다.
올빼미가 돌아가고 난 후, 여자가 깨어났다.

동갑내기 전문가는 포승줄을 이용해 여자를 의자에 단단히 묶어 두었다. 혼자 남게 되자 무엇부터 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우선 올빼미가 시킨 대로 여자의 입에 테이프를 붙이기로 했다. 얼굴을 가렸던 천을 벗기자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알지도 못한 채 평온하게 잠든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아…….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모텔의 어둑하고 원색적인 조명 아래에서도 가려지지 않은 미모였다. 이마와 턱의 완만한 곡선, 앙증맞으면서도 남자들의 승부욕을 자극할 만큼 오똑한 콧날. 눈은 감고 있어도 눈망울의 크기를 가늠할 정도로 컸다.

한참 넋을 놓고 있던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올빼미가 두고 간 청테이프를 어금니를 이용해 뜯었다. 조심스럽게 걸음을 떼어 그녀에게 다가갔다. 여자의 숨결이 볼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상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곧이어 여자의 검은 눈동자가 세상을 향해 크게 열렸다.

나는 너무 놀라서 허둥대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 바람에 뒤에 있던 탁자에 엉덩이를 세게 부딪쳤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유리잔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났다.

공포에 질린 여자의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그녀. 손바닥으로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이런 멍청이! 마스크를 쓰는 아주 기초적인 것조차 잊어버리다니! 얼른 고개를 돌려 소파 위에 벗어 둔 파카 주머니에서 검은 마스크를 꺼내 썼다. 뒤를 돌아보니 여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몇 시야?”

차가울 정도로 침착한 목소리.

순간 당황한 것은 나였다. 그 기색을 애써 감추며 벽시계를 턱으로 가리켰다.

시계를 본 여자는 잔뜩 인상을 구기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그대로 받고 있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고문이었다.

혹시 눈치 챈 건 아닐까? 내가 아마추어라는 사실을? 긴장과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들을 줍는데 그녀가 볼멘소리를 했다.

“렌즈가 빠졌나 봐!”

미간을 찌푸리며 여자가 말했다.

“끄응!”

그녀의 짜증 섞인 말투 때문인지 뾰족한 유리 날에 집게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유리 조각들을 휴지통에 버리고 돌아서자 경멸과 비웃음이 섞인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머릿속이 심하게 쿵쾅거렸다.

“좋은 말 할 때 보내 줘.”

여자가 말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래 봤자 소용없어.”

급속도로 냉각되는 목소리. 묵묵부답인 나.

“야! 원효재.”

“왜?”

대답과 동시에 벌에 쏘인 듯 화들짝 놀랐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내가 차에서 자고 있는 줄 알았지?”

의기양양한 여자의 말에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난 네가 상대할 사람이 아니야.”

“조용히 안 해?”

강한 어투로 말했지만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나 보내 줘.”

“시끄러워.”

“이래 봤자 소용없다니까.”

“뭐가?”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나게 돼 있어.”

잠시 입을 다물고 숨을 가다듬었다. 인질범의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말 것. 재희의 조언 중 하나였다.

“이 밧줄 좀 풀어 줘.”

몸을 비틀며 채근하는 여자.

“말 잘 들으면 내일 풀어 줄게. 오늘은 그만 자.”

나는 도망치듯 불을 끄고 탁자 옆 소파로 가서 몸을 뉘었다. 여자는 기가 막히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급습하는 자괴감에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었다.

‘네가 남자 체면을 완전히 구기는 구나.’ 어디선가 재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지금 제정신이야?”

여자는 지지 않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나더러 의자에서 자라고?”

인질은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빽빽 고함을 질렀다.

“그 입 다물어! 확 찢어 버리기 전에!”

내 속 어딘가에서 이렇게 잔인한 말이 튀어나왔을까. 심장이 배 밖으로 튀어나올 지경이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내 말이 제법 위협적이었는지 여자가 입을 다물었다. 슬그머니 미안한 마음이 고개를 쳐들었다.

벽을 향해 돌아누웠다. 아무리 돈이 아쉬웠어도 재희의 제안은 거절했어야 옳다. 지금이라도 무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자가 어떻게 되든 말든 멀리 도망쳐 버리고만 싶었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하면 이래저래 내 인생은 종치는 거야.

잠시 후 낮고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잠에 빠져든 것이다. 정말 이상한 여자야. 사위가 조용해지자 냉장고에서 ‘윙’ 하는 소리와 함께 시계 초침 소리가 귀를 울렸다. 잔뜩 긴장했던 나도 몽롱한 상태에서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온몸의 피가 머리에 쏠린 것처럼 고단한 하루였다.

얼마나 흘렀을까. 잠결에 눈을 떴다. 주변은 아직 어둑했다. 몸이 저절로 들썩였다. 아직 꿈속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몸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앞뒤로 출렁거렸다. 고개를 들자 어깨가 뻐근했다. 숨을 깊이 들이마셔 보았다. 불쾌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내가 사는 고시원의 곰팡이 냄새와는 달랐다. 공기 중에 싸구려 방향제 냄새가 섞여 있었다. 불현듯 간밤에 있었던 일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검은 형체가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의자에 결박된 여자가 어느새 소파로 다가와 나를 깨우기 위해 한쪽 발로 내 등을 밀고 있었던 것이다. 커튼 틈새로 한 줄기 햇살이 비쳤지만 암막이 쳐져 있어서 실내는 어두웠다.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의 불을 켰다. 창문을 열고 바깥바람을 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커튼을 열 수는 없었다. 여자가 밖으로 보이는 건물의 간판을 기억해 두었다가 훗날 경찰에 신고하면 큰일이었다.

“무슨 잠을 그렇게 늘어지게 자? 나 오줌 마려.”

시계를 보니 벌써 오전 10시. 마른세수를 하자 손바닥에 피부의 푸석함이 그대로 전해졌다. 반면 여자의 얼굴은 솜털이 보일 정도로 생기가 흘러넘쳤다.

“화장실 가고 싶다니까!”

나는 하는 수 없이 여자를 묶은 끈을 풀어 주고 화장실 앞을 지켰다. 화장실은 출입문 바로 맞은편에 위치했다. 덕분에 출입문과 화장실을 동시에 지킬 수 있었다.

이윽고 변기 물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화장실 문을 열자마자 나를 공격하면 어쩌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유단자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잖은가. 미처 방어할 자세도 취하지 못했는데 여자가 화장실 문을 열고 나왔다. 내가 문 앞에 버티고 서 있었던 탓에 두 사람이 대치하듯 마주 섰다.

밤에 봤을 때는 작아 보였는데 중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흰 꽈배기 스웨터 아래로 봉긋하게 솟은 가슴과 그 아래 오목하게 들어간 허리선을 보니 과격한 운동을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래위로 훑어보는 남자의 시선이 불쾌했는지 여자가 몸을 휙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왠지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다.

반항이 있을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거셀 줄은 몰랐다. 포승줄을 들고 침대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다가가자 그녀가 내 목덜미를 두 팔로 덥석 안더니 귀를 깨물었다.

“아악!”

목청이 터질 듯한 고함이 나왔다. 간신히 여자를 떼어 내자, 귀에서 흘러내린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여자 머리 위로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이때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체 누구지? 혹시 내 고함을 듣고 온 것일까? 밖을 향해 도움을 청하려는 여자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청소하러 온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재희는 모텔 측에 삼 일 동안 705호 주변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미리 부탁해 뒀다고 했다. 모텔 사장이랑 잘 아는 사이기 때문에 방해 받을 걱정은 없다는 얘기를 들은 터라 불안감이 엄습했다.

몇 분간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다행히도 노크 소리는 이어지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돌리는데 여자의 악귀 같은 이가 다시 한 번 내 살을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손바닥을 문 것이다. 이번에는 고함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이를 악다물었다. 하지만 극심한 고통으로 바닥을 뒹굴어야 했다. 그 바람에 출입문을 향해 뛰어가는 여자의 발목을 붙잡으려다 놓치고 말았다. 문 밖으로 잽싸게 모습을 감춘 여자.

안 돼! 이렇게 여자를 보낼 수 없었다. 한때 수능 1%에 속했던 수재가 평생 감옥에서 썩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뛰어 나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믿기 힘든 광경을 보았다.
“오시연이 누군지 알아?”

혼이 빠진 여자를 의자에 묶어두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때마침 바지 주머니 속에 넣어 둔 스마트폰이 울렸다. 은지였다. 반가우면서도 마음 한켠이 무거워졌다. 나는 애써 아무렇게 않게 전화를 받았다. 은지에게 방금 뇌리에 박힌 사람에 대해 물었다.

“오시연? 아이돌 오시연 말하는 거야?”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카랑카랑한 목소리.

“아이돌?”

“기억 안 나? 그룹 ‘퍼플걸스’ 리더였고, 나중에는 영화에도 출연했잖아.”

모두에게 익숙한 이름이기 때문에 내가 궁금해하는 사람과 일치할 가능성은 낮았다.

“2년 전에 자살했던가?”

“잘 아네. 매일 마시던 저지방 우유에 복어 독을 탔다나 뭐라나.”

나는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동영상 때문이었지, 아마?”

“맞아. 연습생일 때 같이 연습하던 남자애랑 찍은 동영상이 인터넷에 쫙 퍼졌잖아. 나라도 쪽팔려서 못 살지. 더군다나 당시에 고등학생이었다는데.”

“동영상이 조작된 거라는 얘기도 있었잖아.”

“화면이 너무 흐렸으니까. 하지만 그게 가짜라고 해도 이제 와서 뭐 어쩌겠어.”

청순가련한 이미지를 생명으로 했던 아이돌에게는 되돌릴 수 없는 치명타였을 것이다. 동영상이 최초로 퍼져 나간 곳은 모든 불법 파일들이 그러하듯 중국일 것이다. 범인을 색출하는 것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인 셈이다.

“그런데 갑자기 오시연은 왜?”

의심스럽다는 듯이 묻는 은지.

“그냥. 아무것도 아니야.”

얼버무리는 나.

“너 원래 그런 스타일 좋아했어? 오시연은 종이 인형처럼 빼빼 말랐었잖아. 하긴 이제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헤어진 연인 사이에는 더 이상 상관할 일이 남아 있지 않는 게 정상이다. 은지와 나처럼 성격 차이가 너무 심했던 커플은 특히 그렇다.

기억과 슬픔의 잔재만 각자 감당하면서 살아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나와 은지 사이에는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다. 그건 내가 이 일을 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돈은 언제 줄 수 있어?”

“삼 일 후.”

“1월 1일이네.”

“뭐 한 가지 물어봐도 돼?”

“아니.”

은지는 서둘러 말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내가 뭘 물어볼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은지의 대답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편의점에 가서 컵라면과 도시락을 허겁지겁 먹었다. 모텔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여자를 위해 제과점에 들러 샐러드와 샌드위치를 샀다. 사고 보니 은지가 즐겨 먹는 것들이었다. 20대 초반의 여자들의 입맛은 비슷하겠지, 인질이 좋아해 주길 바라며 모텔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가기 전 벗었던 마스크를 다시 썼다. 문을 열자 여자가 얌전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가기 전까지 시퍼렇게 질려 있던 얼굴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배고파.”

“알아.”

음식이 든 봉지를 침대 위에 놓으며 대꾸했다.

“풀어 줘. 나 도망 안 가.”

“그건 잘 모르겠는데.”

나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탁자 위에 놓인 경고장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놓쳐 버린 여자를 도망치지 못하게 붙든 청첩장 크기만 한 종이 한 장. 그 아이보리색 경고장은 나이프에 꽂힌 채 모텔 방 문 위에 박혀 있었다.

48시간 뒤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됩니다.
2013.12.29

딱딱하게 적힌 컴퓨터 글씨 밑에 누군가 친필로 ‘오시연’이라고 써놓았다. 경고장의 글과 ‘오시연’이라는 이름을 쓴 사람이 동일한지는 알 수 없었다.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군.”

여자가 말했다.

“정체가 뭐야?”

“너야말로!”

“이거 누가 보낸 건지 알지?”

“모를 리가 있겠어? 내가 보낸 건데?”

“네가 너한테 이런 걸 보내고 그렇게 사색이 됐던 거야?”

“이 년 전에 다른 사람한테 보냈던 게 지금 나한테 되돌아왔으니까.”

정말 어이가 없었다.

“누구한테 쓴 거야? 그리고 하필 오늘 너한테 돌아온 이유가 뭔데?”

그녀는 고통스러운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래로 떨군 잿빛 눈이 침울해 보였다. 사람의 눈이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가.

나는 여자에게 다가가서 줄을 풀어 주었다.

“일단 먹고 얘기하자.”

여자는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가 샐러드를 먹기 시작했다. 베이컨과 계란이 들어간 샌드위치에는 손도 대지도 않았다. 나는 재빨리 핸드폰의 인터넷 창을 열었다. 오시연의 이름을 검색하자 사망일이 떴다. 2013년 12월 31일. 이 편지가 도착한 것은 2013년 12월 29일. 이 년 전 어제였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여자가 베개 속에 숨어 있던 리모컨을 찾아서 TV를 켰다. 의미 없이 흘러가는 현란한 화면들. 방송사들은 연말 시상식을 홍보하느라 전파를 허비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던 여자가 분주한 손놀림을 멈추었다. 거기에선 화장품 광고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웬만한 여자들보다 훨씬 광채 나는 피부를 가진 남배우 지수혁이 스킨을 들고 미소 짓는 게 보였다. 세상에는 반반한 외모만으로 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스킨을 들고 있는 남자의 어깨 너머로 예쁘장한 여자가 다가왔다. 브라운관에 모습을 드러낸 지 얼마 안 된 신인 탤런트이자 잘 나가는 지수혁의 여동생이었다.

오빠를 잘 둔 덕택에 데뷔를 하자마자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광고는 두 남매가 동시에 출연한 것으로, 신제품 발매 일주일 만에 5만 병 판매를 돌파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저 사람이지?”

입을 오물거리며 여자가 물었다.

“뭐가?”

“너한테 나 감시하라고 시킨 사람 말이야.”

“무슨 소리야? 그건 내 친구 재희…….”

아뿔사! 청 테이프와 마스크에 이어 세 번째로 저지른 실수다.

“부끄러워하지 마. 네 인간관계도 엉망진창이구나.”

엉망진창이란 말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여자는 나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동생을 감금하라고 시킨 오빠도 정상은 아니지.”

“지금 저기 나오는 지수혁 말하는 거야? 여동생이 버젓이 옆에 있는데.”

“동생이 한 명이라고 누가 그래?”

여자가 플라스틱 포크로 샐러드를 헤집으며 말했다.

혹시나 싶어서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예쁘긴 하지만…….

“하나도 안 닮았는데. 지수진 좀 봐. 자기 오빠랑 판박이잖아.”

“성형 수술했거든, 나.”

상대방을 무장해제 시켜 버리는 솔직함.

“오빠랑 똑같은 표정을 짓네. 이 년 전 내가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지수혁 얼굴도 볼 만 했는데.”

여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입술이 살짝 뒤틀리는 듯했다.

“혹시 그 편지 말이야. 지수혁, 그러니까 네 오빠한테 쓴 거야?”

여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본인의 이야기인데 남의 일처럼 딴청을 피운다. 하는 짓이 은지랑 똑같군.

“한 가지만 물을게. 지수혁이랑 오시연이 무슨 사이였어?”

“오빠 첫사랑이었어. 둘이 공개 연애 했잖아. 아주 죽고 못 살았는데.”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경고장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편지를 받은 사람은 지수혁일 확률이 높다. 20대 남자에게 첫사랑이란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니까.

내가 물었다.

“너 살인자야?”

“무슨 근거로 묻는 거야?”

“네가 이 경고장을 누군가에게 보냈고 그 후에 편지에 이름이 적힌 사람이 죽었어. 그러니까 네가 오시연을 죽인 게 되는 거지.”

“내가 이 편지를 보낸 건 맞지만 이름을 적은 건 내가 아니야.”

“그럼 누구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이 편지를 문 앞에 걸어 놓고 간 사람이겠지.”

“도대체 그 사람은 누구고, 왜 이런 짓을 하는 건데?”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곧 알게 되겠지.”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빈 샐러드 통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짐작 가는 사람 없어? 원한 산 일이 없나 잘 생각해 봐. 누가 너한테 이런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우려는 건지 말이야.”

침대에 배를 깔고 눕던 여자가 동작을 멈추었다.

“누명?”

여자는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입을 히죽거렸다. 그 모습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제발 내가 상대하고 있는 사람이 살인자가 아니라고 누군가 말해 줬으면 싶었다.

오후 6시쯤 먹을거리를 사러 모텔 밖으로 나왔다. 여자를 의자에 묶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혼자 있을 때 무방비 상태에서 변을 당하면 어쩌냐는 여자의 말에 잠시 흔들렸지만 그렇다고 망아지처럼 풀어 둘 수는 없었다. 빨리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발길을 서둘렀다.

참치 김밥이 먹고 싶다는 여자의 말에 분식집으로 달려갔다. 약국에 들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자의 도수에 맞는 일회용 콘텍트렌즈를 샀다. 돌아서서 나오려다 말고 약사에게 다가갔다. 머리가 희끗한 중년 남성이었다.

“더 필요한 거 있어요?”

“저기요.”

나는 용기를 냈다.

“혹시 임신 6개월인데도 낙태 수술이 가능한가요?”

눈을 심하게 깜빡이는 약사. 당황했다기보다는 이 사람의 버릇인 것 같았다.

“가능하지요. 위험할 수도 있지만.”

역시나.

“그럼 어떻게 하죠?”

“뭘요?”

“위험하면 어떻게 하냐고요?”

“글쎄요. 웬만하면 그냥 낳아요.”

성의 없지만 악의도 없는 대답.

“그러게요.”라는 말을 남기고 약국을 나왔다. 띠링.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은지인 줄 알았는데 모르는 번호였다.

잘 돼가? / 누구세요? / 올빼미. / 아…… 그럭저럭. / 힘들면 같이 있어 줄까?

갑자기 일이 없어져서 몸이 근질근질한 것일까. 좀 전에 발생한 경고장 사건 때문에 와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지만 왠지 재희가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괜찮아. / 알았다. 수고.

12월 30일은 그렇게 지나갔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몹시 고된 하루였다.

31일 아침. 먼저 일어난 여자가 커튼을 활짝 여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눈을 자극하는 강렬한 햇빛으로 미루어 오전 9시가 훌쩍 넘은 것 같았다. 알람은 8시에 맞춰 놨는데 배터리가 나간 것일까.

“일어나. 잘생긴 총각.”

얼굴을 더듬어 보니 마스크가 벗겨져 있었다. 젠장. 이젠 자포자기의 상태가 되었다.

오른손을 뻗어 탁자 위를 더듬었다. 핸드폰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핸드폰 대신 까끌까끌한 종이의 질감이 전해졌다. 낯설지 않았다.

48시간 뒤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게 됩니다.
2014.12.29

하단에는 ‘오시연’이라는 이름 대신 ‘송지환’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놀라긴.”

두 눈이 휘둥그레진 나를 보며 여자가 말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네 운동화 위에 떨어져 있더라. 누가 문틈으로 밀어 넣고 갔나 봐.”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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