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식인 룸메이트

  • 장르: 호러 | 태그: #나의식인룸메이트 #신지수 #공포 #공포단편 #단편선 #한국공포문학 #한국공포문학단편선 #옷장
  • 평점×48 | 분량: 120매 | 성향:
  • 소개: 어느 날 나의 방에 나타난 거대한 괴인. 삼 일 후, 나를 잡아먹겠다고 예고한다. 잔머리를 굴려 다른 먹잇감을 대신 데려오겠다고 제안하고, 약속에 따라 평소 마음에 들지 않던 회사... 더보기

나의 식인 룸메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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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나에게는 뜻밖의 룸메이트가 한 명 생겼다. 우리는 처음 만난 자리에서 암묵적으로 계약을 맺었다. 계약서나 서명 따위가 필요 없었던 것은 룸메이트의 위협적인 실체와 나의 생존본능만으로도 계약이 유지되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녀석과 맞닥뜨린 순간부터 내게 선택권이란 없었는지도 모른다.

계약의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하나, 나는 그에게 거주할 공간과 적당한 온도, 그리고 먹을거리를 제공한다. 둘, 위의 사항을 지키는 한 그는 나를 해치지 않는다. 보다시피 불평등 조약이다. 그럼에도 내가 그를 룸메이트라 부르는 이유는, 우리가 정말 룸메이트처럼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오피스텔의 침입자는 어느 날 불현듯 나타나 내 인생에 끼어들었다. 그날 낮까지만 해도 나는 여느 때처럼 사무실 한구석의 내 자리에 앉아 원고를 손보는 중이었다.

내가 일하는 곳은 서울의 한 잡지사로, 스포츠나 연예 관련 정보를 다루는 월간지를 발간한다. 최근 나는 잡지 뒷부분에 흥미로운 귀신 목격담이나 괴담들을 묶어 소개하는 특집 기획을 맡았다. 스포츠 잡지에 웬 납량특집이냐고 의문을 제기했더니 편집장은 그저 ‘온난화’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처음엔 어느 누구도 그 기획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전문 분야와 관련이 없을뿐더러 기자로서의 경력에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걸 알고 있었지만, 언제 회사에서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한 처지에 놓여 있던 내겐 오히려 절호의 기회였다. 모두가 마다한 그 기획이 나에겐 지푸라기였던 것이다.

선뜻 맡기는 했지만, 신선하면서도 독자의 관심을 끌 만한 내용들을 모으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편집 회의에 초고를 내놓았을 때에도 반응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심지어는 기획을 빼버리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편집장은 기껏 믿고 기획을 맡겼더니 이따위로밖에 못하냐고 불평했다. 하지만 나는 잡지 콘셉트에 맞지도 않는 귀신 얘기 따위가 기획이란 걸 믿지 않았다. 그저 다른 종류의 지면 채우기일 뿐이다. 지금까지 내겐 그런 일들만 주어졌다.

“잘 돼 가요?”

누군가 내 뒤에서 어깨 너머로 종이컵을 건넸다. 돌아보니 연희였다. 내 동료인 김 기자의 어시스트다. 아무 기자나 어시스트를 거느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뜻밖에도 김 기자는 회사 내에서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은 모양이다. 내겐 그저 더럽게 재수 없는 놈일 뿐이지만.

“잘 마실게.”

“수정은 잘 돼 가요?”

“죽을 맛이야. 졸지에 소설을 쓰게 됐으니.”

나는 투덜거리며 자판기 커피에 입을 댔다. 종이컵엔 아직도 그녀의 향수 냄새가 남아 있다.

“에고, 그래도 힘내요.”

“그럴게.”

연희가 커피가 담긴 쟁반을 들고 다른 자리로 걸어갔다. 그녀는 연예인만큼 예쁘진 않았지만 청순하면서도 꾸밈없는 매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회사에서 나를 따뜻하고 친절히 대해 주는 사람은 그녀가 유일했다. 이런 천사 같은 아이를 비열한 김 기자가 데리고 있다는 게 불만스러울 따름이다.

마침 사무실 문을 열고 김 기자가 들어온다. 그는 뱀장어처럼 미끈거려 보이는 검은색 셔츠를 걸쳤다. 꼴도 보기 싫은 놈이다. 회의 때 내가 맡은 이번 기획을 빼자고 말한 것도 그였다.

“편집장한테 가 봐. 널 찾던데.”

나는 그와 오래 상대하기 싫어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편집장실로 향하는 내 등에 대고 기어코 한마디 던졌다.

“보나마나 그 요상한 특집 때문이겠지. 안 그래?”

그는 특집이라는 단어에 유난히 힘을 주며 말했다. 나는 보지 않아도 그가 웃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돌아서서 놈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날려주고 싶다. 하지만 요즘 한창 잘나가는 그를 건드려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편집장실에 노크를 했다.

편집장은 업무로 사람을 죽이고 살렸다. 처음부터 원고를 다시 써오라는 말 한마디면, 그의 눈에 거슬리는 상대를 단번에 좌절시키기 충분했다. 문제는 그가 나를 몹시도 싫어한다는 것이다.

“눈뜨고는 도저히 못 읽어주겠구먼.”

편집장은 내가 내민 원고를 읽다 말고 책상 위에 탁 내려놨다. 그는 목살에 파묻힌 턱을 끌어당겨 안경 너머로 나를 올려봤다. 그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런 제스처를 취했다.

“우리나라에 흡혈귀 출현이라니. 이게 무슨 흡혈귀 선짓국에 밥 말아먹는 소리야. 요즘 독자들한테 이런 게 먹힐 것 같아?”

그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했다.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어쩐지 난감해졌다. 그와 마주보고 있노라니 벌써부터 피로가 밀려왔다. 나는 수시로 다리의 무게 중심을 번갈아가며 옮겼다.

“아예 제목을 바꾸지 그래. 「믿거나 말거나」로 말이야.”

“아아, 그것도 괜찮은데요?”

내가 무의식적으로 대꾸하자 그의 표정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뭐?”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그런 시선이 매번 부담스러웠다. 무슨 하찮은 짐승을 보는 듯한 눈초리다.

“죄송합니다. 다시 써 오겠습니다.”

내가 말하자 그는 원고를 내 쪽으로 날리듯이 던졌다. 여러 장의 종이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거 하나만 명심해 둬. 만약 이번 달 판매량이 조금이라도 부진하면 그건 바로 자네 책임이야.”

믿을 수 없었다. 스포츠 잡지가 고작 몇 페이지의 납량특집에 판매량이 좌지우지된다는 게 말이다.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 자리에서 그대로 책상을 박차고 올라가 그의 면상을 후려갈기는 상상을 해 본다. 그의 안경이 깨지고 눈두덩이 벌겋게 달아오른 꼴은 상상만으로 통쾌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나는 그저 편집장의 눈치를 살피며 흩어진 종이를 주워 모을 뿐이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지.”

그가 말했다.

“다음 원고도 이따위면 다른 내용으로 대체할 거야. 그리고…….”

그는 바닥에 침을 뱉은 다음 구둣발로 문질러 흔적을 없앴다.

“자네 자리도.”

“고작 이것 때문에 말입니까?”

나는 따지려고 한 말이었지만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고작? 네 주제나 알고 떠들어, 낱말 채우기나 만들던 놈한테 생각해서 맡겨줬더니 고마운 줄도 모르고…….”

그 뒤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떻게 편집장실에서 나왔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퇴근을 하고 회사를 나선 나는 가끔 혼자 들르던 포장마차에 갔다. 빈속에 쉬지 않고 소주를 들이 붓다가 그대로 엎드린 채 잠이 들었다.

문득 깨어나 시계를 보니 밤 10시였다. 속이 메스꺼웠다. 나는 포장마차를 나와 택시를 잡았다. 택시기사는 차 안에서 토하면 안 된다며 연신 내게 당부했다.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떠보니 내가 사는 오피스텔 앞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온 것인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나는 열쇠를 돌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를 만났다.

<어서 오게.>

문을 열자마자 들린 소리였다. 지나치게 낮고 음산한 목소리다. 처음엔 잘못 들은 거라 생각했다. 나는 숨을 죽인 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조금 전 열쇠로 열고 들어온 곳은 내 집이 분명했다. 나를 반겨줄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한 것이다.

나는 술기운에 반쯤 감긴 눈으로 컴컴한 집 안을 응시했다. 그때 거실 쪽에 검은 형체가 어른거렸다. 언뜻 봤을 때 그것은 족히 2미터는 넘어 보였다.

벽을 더듬어 불을 켰을 때 충격적인 광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만약 내가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곧바로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두 발로 서 있었고 커다란 눈도 껌뻑거렸으며, 조금 전 들은 목소리의 근원지인 입도 달려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인간이라면 악어 같은 이빨이 촘촘히 나 있지도 않을 것이며, 눈에는 흰자위 외에 눈동자라는 것이 있어야 했다. 그의 눈알은 온통 허옇게 되어 있어서 대체 어디를 보고 있는지 감 잡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시뻘겋게 피를 처바른 입이란! 몸속의 알코올 기운이 순식간에 증발해 버리는 듯했다.

엄청난 크기의 발이 놈의 육중한 몸을 떠받치고 있고, 유난히 긴 팔은 거의 무릎 가까이까지 늘어뜨려져 있었다. 괴물의 얼굴은 멍든 것처럼 푸르스름했고 몸 전체가 두껍고 단단한 가죽 같은 것으로 덮여 있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놈이 말을 할 줄 안다는 사실이었다. 말이 통한다는 건 협상의 여지가 있다는 뜻이 아닌가. 쉽사리 말이 떨어지진 않았지만 애써 용기를 냈다.

“저기, 워, 원하는 게 뭡니까.”

<먹이.>

괴물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였다. 놈의 징그러운 외관상으로는 영화에 나오는 에이리언처럼 쐐애액 하고 질러대는 소리가 더 어울릴 법했지만 신기하게도 사람 목소리가 나왔다. 마치 쇳조각으로 유리를 긁는 것처럼 메마르고 거친 음성이었다.

“먹이요? 저, 저기 냉장고를 열면 먹을 게 좀 있을 겁니다. 우선 그거라도…….”

문득 그가 검은콩 우유나 식빵 같은 걸 좋아할지 궁금해졌다. 놈은 기다란 손톱으로 나를 가리켰다. 아마도 녀석이 선호하는 음식은 내 몸뚱이인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그의 시선이 내 몸을 훑는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집에서 기르던 구관조 메리 생각이 났다. 녀석은 누가 나타나면 쉴 새 없이 떠들어 대곤 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나는 놈의 입에 묻은 피가 메리의 것이 아니길 바랐다. 특별히 아껴서가 아니라 괴물에게 바칠 제물로 남아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새집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놈이 말했다.

<새는 먹지 않는다. 그러나 죽일 수는 있지.>

그는 새장 틈에 기다란 손톱을 집어넣고 쿡쿡 찔러 댔다. 메리는 그 안에서 도망 다니기에 바빴다. 밀려드는 두려움과 슬픔에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나의 처지도 저 속의 메리와 다를 바 없었다. 별 볼일 없는 인생이지만 벌써 죽기는 싫다. 아니, 죽더라도 저 괴물 뱃속에서 소화되고 싶지는 않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정신을 집중했다. 정신을 잃고 깨어났을 때, 녀석이 내 몸을 뜯어먹는 장면을 보는 것만큼 착잡한 일도 없을 테니까.

<삼 일에 한 번 인간을 먹는다. 오늘은 식사를 마쳤지만 다음은 네 차례다.>
나는 일단은 목숨을 건졌단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중에 살아나가게 되면 괴물에게 먹혀 준 누군가를 위해 묘비라도 세워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냥 죽여 버릴 수는 있다. 그것만큼 쉬운 일은 없으니까.>

괴물의 손톱이 한순간 새의 머리를 관통했다. 메리는 조금 발버둥치다가 이윽고 박제가 돼 버린 듯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번에는 놈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육중한 덩치에 비해 움직임은 조용하고 민첩했다. 나는 더 물러날 곳도 없어 벽에 등이 달라붙었다.

“저기, 제발 부탁입니다. 아직 죽기에는 일러요. 어머니가 시골에 혼자 계시는데……. 당신도 낳아준 어머니가 있을 거 아닙니까!”

전에 없던 유머감각이 왜 이럴 때 자꾸 튀어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괴물의 효심을 자극해서 대체 어쩌겠다는 건가. 게다가 놈에게 부모란 게 있기나 할까. 만약 있다면 식습관을 영 엉망으로 들여 놓은 게 틀림없다.

갑자기 놈이 달려들어 무지막지한 힘으로 나를 벽에 밀어 붙였다. 한 손으로 내 목을 잡고 들어 올린 다음, 흉측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나는 극도로 긴장한 나머지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놈은 코앞에서 날카롭고 촘촘한 이빨을 드러내보였다. 놈이 숨을 쉴 때마다 지독한 썩은 내가 코로 훅 끼쳐왔다. 그는 흰자위밖에 없는 눈으로 나를 집어삼킬 듯이 노려봤다(눈동자가 없으니 모를 일이지만 어쩐지 그렇게 느껴졌다.).

<삼 일 후에 널 먹는다.>

괴물의 말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괴물과 마주친 순간부터 죽음은 예정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상황 자체가 워낙 비현실적인 탓에, 마음은 오히려 조금씩 침착해졌다. 나는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한 뒤 괴물의 허연 눈을 똑바로 마주봤다.

“한 가지 제안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나는 놈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걸 보고 말을 이었다.

“단지 먹을 게 필요하신 거라면 제가 다른 먹이를,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구해드리는 겁니다. 그것도 삼 일마다요. 그럼 굳이 절 죽이실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나는 내가 내뱉고 있는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결국 나는 죽음 앞에서 이성을 잃어버린 걸까. 아니, 어쩌면 이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이성적인 판단일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놈은 나를 한 팔로 들어 올린 다음, 과일을 고르듯이 내 몸을 이리저리 돌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는 이 식인 괴물이 나를 머리부터 먹어치워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발끝부터 잘근잘근 몸이 먹혀들어가는 것처럼 지루한 죽음이 또 있을까? 우려와는 달리 괴물은 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먹이를 준비한다고.>

괴물이 말했다.

“원하는 건 뭐든지요! 남녀노소, 인종, 성격까지, 뭐든 말만 하세요.”

나는 호객꾼처럼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우선 여길 따뜻하게 해.>

지금은 7월 달이었다. 나는 그가 뭔가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 이 계절에 ‘따뜻하게’란 표현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여긴…… 지금 더워요. 덥다는 건 지나치게 따뜻하고 땀이 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춥다는 건….”

<알아. 여길 더 덥게 하란 말이다.>

놈이 으르렁댔다. 어지간한 날씨에도 추위를 많이 타는 모양이다. 나는 지난 봄 이후로 사용하지 않던 보일러를 작동시키고, 벽장에 처박아둔 전기 난로를 꺼내 틀었다. 얼마가지 않아 집 안은 더운 공기로 가득 찼고, 몸에서 땀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렇게 괴물과의 동거가 시작됐다.

벽에 걸어놓은 온도계는 38도를 가리켰다. 온도가 그 이하로 떨어지면 나는 죽는다. 삼 일마다 먹잇감을 바치지 못해도 나는 죽는다.

지금껏 여러 종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봤지만, 괴물에게 잡아먹히는 죽음이란 과연 어떨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지금에 와서 고민해 봤자 결론은 오직 하나였다.

무지무지하게 아프겠다!

괴물은 벽장 속이 마음에 들었는지 대부분 그 안에 들어가 있었다. 그의 역겨운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는 나로선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별다른 경계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녀석은 종일 벽장 안에 있었고 나는 마음대로 집 안을 돌아다녔다. 마음만 먹으면 문 밖으로 뛰쳐나가 여길 벗어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계약을 어기고 도망치면 어떻게 될까. 정말 지구 끝까지 나를 쫓아올까. 결국 나는 아무 것도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괜한 시도로 죽음을 앞당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괴물이 예고한 시간이 닥치자, 나는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나는 조용히 전화기를 들어 112번을 눌렀다.

“제 집에 침입자가 있습니다. 당장 경찰특공대를 총동원해 주세요. 총도 꼭 가져와야 합니다. 될 수 있으면 위력이 좋은 걸로요. 놈은 괴물이에요. 곧 있으면 절 잡아먹고 말겁니다.”

마지막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잠시 후 내 집에 온 것은 어딘가 어설퍼 보이는 순경 한 명뿐이었다. 더 더욱 나를 미치게 만든 건 그가 예의바르게도 초인종을 눌렀다는 것이다. 특공대원들이 레펠로 창문을 부수고 날아드는 장면을 내심 기대했던 나는 몹시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신고 받고 왔습니다. 괜찮습니까?”

괜찮을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그들은 내가 미쳤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순경 한 명에게 기대를 걸 수는 없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고 현관문에 이마를 기댔다. 그리고 문 너머를 향해 말했다.

“미안합니다. 전화를 잘못 걸었습니다.”

그는 일단 신고가 들어온 것이니 잠깐 안을 확인해 보겠다고 했다. 문을 열자 그는 막무가내로 들어와 집 안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그는 방을 전부 확인하더니 무전기에 대고 ‘이상 없음’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몹시 인상을 찡그린 채 나를 향해 말했다.

“나이도 있으신 분이 이런 장난을 치면 되겠습니까. 허위신고도 처벌받는 거 몰라요?”

“미안합니다. 그래서 아까 잘못 걸었다고……”

“이미 부른 다음에 그렇게 말하면 지나간 시간이 다시 생겨난답니까? 사람 죽여 놓고 미안하다면 다냔 말입니다.”

“아니, 제가 무슨 사람을 죽였다는……”

“경우가 그렇다는 거요.”

순경은 평소 맺힌 게 많았는지 목에 핏대까지 세우고 내게 들이댔다. 나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면서 마음 속으로 수십 번은 갈등했다. 신고를 받고 온 경찰을 먹잇감이 되게 할 순 없었다. 나는 그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만약 총을 가지고 계신다면 저 벽장에 대고 쏘세요. 그러지 않을 거라면 지금이라도 그냥 가세요. 위험하단 말입니다.”

“이거 장난이 너무 심하시군요.”

그는 험악한 표정을 짓더니 성큼성큼 거실을 가로질러 벽장 앞으로 갔다. 그리고 나를 한 번 쳐다본 뒤 거칠게 벽장 문을 열어젖혔다.

괴물은 경찰을 먹어치운 뒤 머리털 뭉치를 바닥에 뱉어냈다. 다큐멘터리에서 어떤 포식 동물이 새를 잡아먹고 모구(毛毬)를 토해내는 걸 본 기억이 있다. 이것도 그와 비슷한 걸까. 나는 모구를 변기에 던져 넣고 레버를 눌러 물을 내렸다.

그는 죽기 전에 괴물을 보기나 했을까? 모를 일이다. 그는 잃어버린 시간 때문에 불평하다가 결국 영원히 시계를 볼 수 없게 됐다. 내가 죽인 거나 마찬가지라는 걸 애써 부인할 생각은 없다. 자신과 다른 사람의 목숨을 맞바꾸어야 하는 상황이 눈앞에 닥친다면, 결국 누구든 선택을 해야 하는 거니까. 설령 그게 살인이 될지라도 말이다.

어쨌거나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녀석과의 계약을 충실히 이행한 꼴이 됐다. 앞으로 적어도 삼 일 간은 목숨을 연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경찰의 유언과도 같은 말이 떠오른다.

사람 죽여 놓고 미안하다면 답니까?

“미안해요. 그렇다고 다는 아니지만…….”

나는 굳게 닫힌 벽장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다음 날 일찍 경찰 두 명이 찾아왔다. 문을 열자마자 그들은 배지를 보이며 잠시 집을 살펴보겠다고 했다.

“어제 여기로 경찰 한 명이 오지 않았습니까?”

그들 중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 한 명이 물었다. 나는 내가 살인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네, 왔어요. 제가 술에 취해서 신고를 잘못하는 바람에요. 그런데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해 보고 곧바로 나가셨는데요.”

나는 거짓말을 했다. 그들을 위해서이기도 했고 또 나를 위해서였다.

“네, 저희도 그 친구가 확인하고 돌아간다는 연락까지는 받았는데, 그 뒤로 소식이 두절됐어요. 그래서 확인 차 온 겁니다. 잠시 안에 들어가도 될까요?”

잠시 후 젊은 경찰이 내 옆에 바짝 붙어 나를 감시했고 다른 한 명이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살폈다. 나는 그걸 지켜보면서 ‘괴물이 식사하기엔 조금 이른데’라고 생각했다. 경찰은 방과 거실, 화장실을 전부 살핀 다음 바닥까지 세밀히 관찰했다. 옆에 있던 경찰이 내게 물었다.

“벽장엔 뭐가 있죠?”

“벽장이요? 글쎄요, 열어 본 지가 오래돼서…….”

내 목소리가 떨리는 걸 그들도 눈치 챈 듯했다. 한 명이 벽장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었다.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게 어깨가 들썩거렸다. 그들이 미심쩍은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아무것도 없군요.”

그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그, 그래요. 이젠 없네요.”

“뭐가 말이죠? 원래는 뭔가가 있었나요?”

“아아, 쥐요. 쥐새끼가 안에 살았거든요.”

차마 괴물이 거기 있었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놈이 사라져버린 지금, 괜한 소리를 했다가 나만 더 의심을 살 터였다. 그들은 또 올지도 모른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얼굴에는 끝까지 의심의 그늘을 거두지 않은 채였다. 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다시 벽장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거기 괴물이 있었다.

“어어?”

나는 놀란 눈을 껌뻑거렸다. 놈은 허연 눈알을 부릅뜬 채 그 자리에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선 채로 중얼거렸다.

“분명 없어졌는데…….”

<내가 원하면 아무도 나를 볼 수 없다. 그리고 어디든 갈 수 있지. 넌 나를 벗어날 수 없어.>

괴물의 말은 절망 그 자체였다. 놈은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몸을 감출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이런 괴물이 내 집에 산다고 하면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텐데 경찰이 올 때마다 간단히 사라진다면?

나는 몸을 떨었다. 놈은 다른 사람에게는 실체조차 드러내지 않은 채 내 목숨을 위협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놈은 내가 어디로 도망가든 눈 깜짝할 사이에 찾아내 죽일 수 있는 능력도 지니고 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 괴물을 잡을 방법도, 달아날 방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언젠가는 놈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란 실낱같은 기대조차 완전히 버렸다.

애초부터 괴물은 날 가둘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순순히 나를 집 밖으로 보내줬다. 대신 놈은 자신의 능력을 한 번 더 상기시켰고 내겐 그걸로 충분했다. 절대적인 공포와 좌절을 겪고 나니, 오히려 내게 처한 운명에 빠르게 순응하게 된 것이다.

드디어 나는 며칠 동안 가지 못했던 회사에 나갔다. 마음 편히 회사 따위를 다닐 상황은 아니었지만 내게도 다른 생각이 있었다.

“어이, 그동안 대체 어디에 숨어 있던 거야?”

회사에 들어서자마자 김 기자가 시비를 걸어왔다.

“신경 꺼 줘.”

내 말에 김 기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믿기지 않다는 얼굴로 눈을 껌뻑거렸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내 입가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물론 그래야지. 어차피 우리는 더 이상 동료가 아닐 거니까. 무단으로 삼 일씩이나 결근을 해 놓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나 보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편집장 따위가 날 자를 자격은 없다. 그도 내 말을 듣는다면, 내가 건져 올 특종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일 터였다.

“썩 꺼져.”라고 편집장이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괴물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꺼져 버리라고! 대체 뭘 하다 이제야 나타난 거야. 그렇게 여기가 우습게 보여?”

“그게 사실 집에……”

“네놈 문제는 조만간 실무진들과 논의를 거친 후 결정하지.”

편집장은 책상 위의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다시는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어이, 책상 치우는 거 도와줄까?”

편집장실을 나오자마자 앞에 서 있던 김 기자가 말했다. 비열하게도, 일부러 밖에서 기다린 게 분명했다. 얼굴엔 즐거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내일 룸메이트의 식사 메뉴로 편집장과 김 기자 중 한 명을 골라야 할지 갈등하던 차였다. 마침 그가 나서서 빈정대 준 덕분에 더 망설일 필요가 없어졌다. 이 친구라면 나라도 씹어 먹고 싶을 정도니까.

“뭐, 괜찮아. 그보다 내일 저녁에 우리 집에 올 수 있어?”

“네 집엘?”

뜻밖의 제안이었는지 그는 꽤 당황한 표정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우리 집에 특종이 될 만할 걸 하나 모셔두고 있는데 자네 의견을 묻고 싶어서 그래.”

“특종이라니, 집에 뭐가 있는데?”

“말로는 설명하기 힘들어. 자네가 직접 보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사실이었다. 내 집엔 특종감이 있고 나는 그에게 보여주려는 것뿐이다. 혹시나 괴물이 그를 잡아먹더라도 내겐 책임이 없다. 생명을 보호해 주겠다는 약속 따윈 절대 하지 않을 테니까.

“어째서 특종감을 굳이 나한테 보여주겠다는 거야. 대체 무슨 꿍꿍이지?”

“기사를 쓰기 전에 자네 의견을 듣고 싶어서 그래. 난 아직 글 쓰는 감이 부족하잖아.”

그는 유심히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내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눈알을 위로 굴렸다.

“생각은 해 볼게.”

그가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가 반드시 올 거라고 확신했다. 그는 특종이라면 밥상의 파리처럼 달려들곤 했으니까.

그날 나는 인터넷으로 온갖 괴물에 대한 정보를 검색했다. 예전 같았으면 코웃음도 안 칠만한 이야기들도 많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어느 것 하나 예사롭지 않았다. 한 시간이 넘게 자료들을 뒤적거린 끝에 몇 가지 흥미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첫 번째는 1829년, 미국 조지아 주의 늪지대에 나타났다는 괴물 이야기다. 어느 날 그곳의 마을 사람 중 한 명이 숲에서 엄청난 크기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소문을 들은 7명의 사냥꾼들이 발자국의 주인을 잡기 위해 늪지대 탐험을 나섰다. 그들은 곰과 인간의 발을 합쳐 놓은 것 같은 대형 발자국을 추적했다.

사건은 그들이 야영 중일 때 일어났다.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는 초대형 짐승이 자신들을 향하여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사냥꾼들은 총을 들어 놈에게 발사했지만 놈은 꿈쩍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돌진해 왔다. 총을 맞으면서도 짐승은 일행을 잡아 찢어 죽이기 시작했다. 결국 거의 모두가 죽임을 당했고, 간신히 살아남은 사냥꾼들은 정신없이 그곳을 빠져나왔다. 이 자료에서 묘사된 유인원의 모습은 집에 있는 괴물과 매우 흡사했다.

두 번째는 1989년 구소련의 모스크바 남동쪽 보르네즈 지방에서 목격된 외계생명체에 대한 이야기다. 이 괴물은 온몸이 두꺼운 가죽으로 덮여 있었으며 키는 거의 3미터에 가까웠다. 그것은 사람들이 다가가자 순식간에 공중으로 사라져버렸다.

사라진다? 나는 그 부분을 자세히 읽었다. 사라진 외계인은 몇 초가 지난 뒤 원래 자리에서 100미터 가량 떨어진 위치에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한 번 더 모습을 감춘 뒤에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두 가지 정보 모두 내 집 괴물의 특징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문제는 여전히 괴물에 대항할 만한 뚜렷한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설령 놈이 자료에서 말하는 괴물과 일치한다 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결국 나는 더욱 암담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그날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저녁, 김 기자가 오피스텔에 찾아왔다. 그는 한 손에 카메라를 그러쥐고 있었다. 그는 현관에서 구두를 벗은 뒤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었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는 재빠른 눈짓으로 집 안 곳곳을 훑었다. 나는 그 프로다운 자세에 속으로 감탄하며 악수를 청했다.

“잘 왔어.”

그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나의 손끝을 살짝 잡았다가 놨다.

“이제 보여줘, 네가 말한 특종이 뭔지.”

“역시 급하네. 우선 차라도 한 잔 마시면서 얘기하자고.”

“이봐.”

그가 짜증스레 말했다.

“난 너하고 차 마실 시간이 없어. 빨리 보여주기나 해.”

“그냥 차를 마셔. 차분하게 지난 삶을 돌아볼 시간을 가지라고.”

김 기자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어이, 난 너하고 장난할 시간 없어. 게다가 여긴 너무 더워서 숨이 막혀버리겠어. 짜증은 이것만으로도 족해. 제발 나를 더 열 받게 하지 마.”

나는 입으로만 웃었다. 벽에 걸린 온도계를 보니 40도가 넘어 있다. 더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아주 못 참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제부터 자네가 아름다운 말만 했으면 좋겠어.”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봤다.

“난 지금 간신히 욕을 참고 있어. 그걸 좀 알아줬으면 좋겠군.”

그는 땀을 많이 흘렸다. 그가 입은 뱀장어 셔츠의 가슴팍과 겨드랑이 부분에 땀자국이 번져 갔다.

“어쩔 수 없구먼. 그럼 직접 열어 봐. 저기 벽장 속에 있어.”

나는 그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괴물이 웅크리고 있는 그곳. 김 기자는 당장이라도 셔터를 누를 듯한 기세로 조금씩 다가갔다.

“안에 있는 게 뭔지 말해. 혹시 위험한 건가?”

여우 같은 놈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녀석은 특종에 물불을 가리지 않았지만 한편으론 의심도 많았다.

“특종에는 위험이 따르지. 하지만 얻고 싶다면 그걸 감수해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날 가지고 노는 거라면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김 기자가 나를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나라면 그걸 열지 않을 거야. 그 안엔 무시무시한 괴물이 있거든.”

“무슨 그딴 개소릴…….”

김 기자는 냉소를 흘리며 벽장문을 열어 젖혔다. 그때 그의 표정을 보는 순간 나는 악마적인 희열을 느꼈다. 괴물이 행동에 나서기도 전에 그가 먼저 놀라 죽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었다.

김 기자는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무거운 정적이 얼마간 흐른 뒤, 그가 셔터를 눌렀다. 찰칵 소리와 함께 플래시가 터졌다. 동시에 괴물이 그의 몸을 잡아챘고 무시무시한 힘으로 목을 비틀어 버렸다.

“인정하지. 자넨 역시 훌륭한 기자야. 아니, 기자였어.”

나는 아직도 숨이 붙은 채 눈을 껌뻑거리는 김 기자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직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얼마가지 않아 그의 고개가 축 늘어졌다. 괴물은 놈을 벽장 속으로 끌고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문득 거실 거울에 비친 나를 봤다. 광기서린 눈빛의 남자가 나를 보고 웃고 있다. 내 자신이 점점 악마가 되어 가고 있는 것만 같다. 갑작스런 죄책감이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올랐다.

나는 얼마 전 죽어 버린 경찰에게서 빼돌린 권총을 서랍에서 꺼냈다. 벽장 속의 놈은 정신없이 식사에 열중하고 있겠지. 나는 놈의 머리가 있을 만한 위치를 가늠해 본 다음 조용히 총구를 겨눴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철컥.

총알은 발사되지 않았다. 장전해 두는 걸 아예 잊고 있었다. 멍청하게 서 있는 사이 벽장 문이 거칠게 열렸다. 나는 얼른 총을 든 손을 뒤로 감췄다. 발치에 새까만 털 뭉치가 툭 떨어졌다. 녀석이 던진 것이다. 나는 이번에도 그걸 변기에 넣고 물을 내렸다. 또다시 무기력해져 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 후로 나의 직장 생활은 확연히 달라졌다. 나는 회사에서 해고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실종된 김 기자의 일거리를 맡는 바람에 몹시 바빠졌다.

가장 놀라운 변화는 김 기자의 어시스트였던 연희가 나와 같이 일을 하게 된 것이었다. 기분 좋은 일이긴 했지만 이내 괴물이 떠올라 마음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놈이 그렇게 나를 붙들고 늘어지는데 내가 결혼이나 할 수 있을까. 매일같이 생명의 위협을 받으며 살아가는 나에게는 그런 기대조차 사치였다.

편집장이 나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내게 핀잔을 주는 일도 줄어들었으며, 가끔 마주치면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이기도 했다.

어쩐지 나는 곤란했다. 룸메이트의 다음 식사 메뉴로 떠오른 그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면 그를 제물로 바칠 구실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당장은 편집장을 대신할 만한 다른 인물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민하는 사이 괴물의 식사일이 성큼 다가왔다. 나는 새로 쓴 괴담 원고를 편집장에게 가져갔다. 이번만큼은 나도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그건 내가 가장 잘 아는 이야기였으니까.

“이번 것도 너무 비현실적이야. 아무리 독자들이 허구라고 생각할지라도 최소한의 리얼리티는 있어야 정말 무섭게 느껴지거든.”

편집장은 원고를 모두 읽고, 책상 위에 탁 내려놓았다.

“그런가요?”

“그렇지. 악어 이빨을 가진 식인 괴물이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니. 꽤 재미있는 설정이긴 하지만 이런 건 할리우드 영화에나 어울릴 법해. 오히려 조금 오래된 감이 있지만 우리나라 독자들에겐 하얀 소복이 더 무섭게 와 닿을 걸.”

“편집장님.”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도 그걸 느꼈는지 눈을 들어 나를 바라봤다.

“더 이상은 못하겠습니다.”

“못하겠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편집장은 안경을 벗어서 책상 위에 내려놨다. 오늘따라 그의 둥글게 퍼진 얼굴이 귀여워 보인다.

“정말 처녀 귀신 이야기 따위에 리얼리티가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우리 잡지가 대체 왜 이런 지면에 공을 들여야 하죠? 우리가 무슨 삼류 잡지입니까?”

“그렇다고 일류는 아니잖아. 그리고 이런 온난화 시대엔 그런 아이템도 필요하다니까. 스포츠지에 온통 스포츠에 대한 기사만 실으면 오히려 독자들도 싫증을 낸다고.”

“그럼 제가 진짜 온난화가 뭔지, 그리고 진짜 괴담이 뭔지 보여드리죠. 편집장님도 직접 경험하시면 꽤 흥미로우실 겁니다.”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오늘 제 집으로 와 주십시오.”

“갑자기 그게 무슨 얘기야. 자네 집으로 오라니.”

“부탁입니다.”

“이유를 알아야 갈 거 아냐.”

“편집장님께도 도움이 될 만한 일입니다. 그렇게만 알고 꼭 와주십시오.”

그는 망설여지는지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썩 내키지 않은 투로 말했다.

“그럼 이따 시간을 봐서 가든지 하지.”

나는 거듭 다짐을 받은 뒤 그의 사무실을 나왔다. 마음이 불안해졌다. 온다고 말은 했지만 말하는 태도가 석연찮았다. 방법이나 타이밍이 모두 좋지 않았던 것 같다.

초조한 마음으로 내가 맡았던 취재 내용을 정리하는데, 연희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경찰한테 전화가 왔어요. 선배님을 찾으시던데요.”

“나를 무슨 일로?”

“음, 저야 모르죠. 뺑소니라도 친 거 아녜요?”

“그럴 리 있겠어. 아무튼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편집장하고 얘기 중이라고 했어요. 나중에 전화해 달라고…….”

“그랬더니 뭐래?”

“지금 여기로 오겠다고 하던데요.”

“온다고?”

“네, 온대요. 그러라고 했는데, 혹시 제가 실수한 거예요?”

그녀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반문한다. 나는 억지로 웃어 보이며 괜찮다고 말했다. 그들이 다시 나를 의심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얼마 전 신문에서 경찰 실종 사건이 실린 기사를 읽었다. 분명 경찰이 간단하게 넘어갈 만한 사안은 아니다.

퇴근 시간 즈음에 휴대폰으로 문자가 왔다. 엄마였다.

‘나 지금 네 오피스텔 찾아가는 중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예전에 엄마가 반찬을 싸들고 서울로 오겠다고 말했던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엄마는 내 오피스텔 열쇠를 가지고 있다.

곧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엄마는 휴대폰을 받지 않았다. 워낙 귀가 어두워 평소에도 문자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맙소사! 난 급하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 오피스텔에 절대로 들어가면 안 돼! 절대!’

문자를 보낸 후 나는 미친 듯이 회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엄마는 대체 어디쯤 오고 있던 걸까. 제발 오피스텔 앞은 아니길 간절히 바랐다.

오늘따라 지나가는 택시가 뜸했다. 나는 택시 잡는 걸 포기하고 집까지 뛰어가기로 했다. 부지런히 뛰면 15분 안에 도착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엔…… 어찌해야 할지 나도 모르겠다. 더운 공기를 뚫고 전력 질주하는 동안 땀이 흘러내려 온몸을 적셨다.

한참을 달려서 오피스텔 문 앞까지 왔을 때에는 이미 20분이 지난 뒤였다.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기척을 들었는지 벽장 속에서 괴물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언뜻 보기에 집 안에 달라진 건 없어보였다. 절로 안도의 한숨이 새나왔다.

“조금만 기다려요, 먹이가 곧 올 테니.”

나는 벽장을 향해 말했다. 어떡하지. 곧 엄마가 올 텐데. 문 밖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싶지만 놈이 눈치 챌 것 같아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놈은 식사시간이 다가오면 유독 모든 움직임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난 먼저 놈을 기습하기로 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가슴을 졸이며 불안하게 살 수는 없다. 내가 직접 놈을 해치워야 한다. 외계인이든 괴력의 유인원이든 생명체라면 분명 고통을 느낄 것이고 죽기도 할 것이다.

영화긴 하지만 에이리언도 죽었고 무적처럼 보이던 프레데터 역시 결국엔 죽었으니까. 놈은 불사신이 아닐 수도 있다. 단지 사라지고 공간을 이동하는 재주가 있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용기가 솟구쳤다.

권총으로 놈을 해치우는 거다. 나는 천천히 부엌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벽장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녀석은 지금도 벽장 속에서 신경을 곤두세운 채 내 행동을 예의주시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걸었다. 그리고 물 마시는 척을 하기 위해 식기 통에서 컵을 꺼냈다. 한 손으로 슬그머니 싱크대 서랍을 열었다. 손을 넣고 더듬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에 전해졌다. 총은 얼마 전에 미리 장전해 두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나는 그 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멜로디라고 생각했다. 나는 잽싸게 권총을 꺼내 뒤춤에 꽂아 넣었다. 괴물이 조용히 입맛을 다시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현관문을 향해 걸어갔다. 최대한 침착해지려 애썼지만 다리가 몹시 후들거렸다. 문을 열자마자 엄마를 데리고 도망가자. 녀석이 쫓아오면 그때 총을 쏘는 거다. 아니, 어쩌면 편집장이 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를 제물로 바치면 간단히 지금의 고비를 해결할 수 있다.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한 뒤 문을 열었다.

“저에요.”

연희였다. 나는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잠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네가 여긴 어떻게…….”

“편집장님이 보내서 왔어요. 원고 수정본도 갖다드릴 겸. 그리고 뭘 보여준다고 하셨다면서요. 편집장님이 저보고 대신 봐 달라고 하셨어요. 아, 그런데 여긴 무지 덥네요. 에어컨이 없나 봐요?”

‘편집장 이런 망할 놈.’ 그녀는 손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리고 신고 있던 구두를 벗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자, 이제 제가 뭘 하면 되죠?”

그녀는 경쾌하게 말하고서 천진난만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먼저 할 말이 있어.”

“네?”

“너를 좋아하고 있어.”

“네에?”

“예전부터 좋아했어.”

“선배님,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은데요. 전 단지 심부름 때문에……”

“부탁이야.”

“대체 뭘 부탁한다는 거죠?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에요. 잘해 주시긴 하지만 솔직히 제 스타일도 아니고요. 정말 미안해요.”

그녀의 표정이 조금 전과는 달리 차갑게 굳어졌다. 그리고 난처한 기색을 감추려는 듯 더 열심히 손부채질을 해댔다.

“괜찮아. 네 말은 잘 알겠어. 난 그냥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거야.”

내가 말했다. 그녀는 안도했는지 다소 표정이 풀렸다.

“그럼 저 벽장에서 서류 좀 꺼내 줄래?”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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