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황금도롱뇽 문학공모전에 참여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작품은 200자 이내에 육하원칙을 담아 쓰였습니다. 각 문단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 개별적인 이야기입니다.
<1>
11월의 마지막 날에 열두 번째 용사는 자신의 갑주를 손질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산 너머 흉포한 괴물을 처치하고 왕자를 구해내기 위해 떠나기 전날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사랑하는 언니가 임무를 완수하고 무사히 귀환할 거라는 희망을 유지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이다. 눈물을 꾹 짜냈다. 하얀 입김이 산길에 고정된 소녀 기사의 시야를 흐렸다.
<2>
왕국이 멸망한 날, 오스나는 짐 싣는 마차로 수도를 빠져나왔다. 유린왕은 마지막 하나 남은 왕족까지 추적할 것이었으나, 오스나는 이제 겨우 열한 살일 뿐이었으므로.
가신들은 왕실을 위해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오스나는 다른 무엇보다 살고 싶었고, 유린왕이 두려웠다. 하지만 가신들의 분루(憤淚) 또한 두려웠다. 짐마차에서, 오스나는 침묵했다.
<3>
난 괴물의 눈알 한쪽을 뽑아냈다. 놈은 입에 물고 있던 내 팔을 눈 위에 뱉었다. 우리가 선 눈바닥 위에 붉은 피가 원을 그렸다.
찢어지는 울음소리를 내는 놈의 남은 눈에 두려움이 비쳤다.
이제 놈은 포식자가 아니었고, 나도 사냥감 따위가 아니었다.
놈이 도망쳤다.
오늘부터 겨울은 온전히 우리를 위한 시간이 될 것이다. 놈과 내가 한 쪽을 죽일 때 까지.
<4>
윤은 그날 그 거리에서 자신과 환희 둘 중 누가 먼저 손을 잡았는지 늘 헷갈렸다. 웃음 짓는 입술이 먼저인지, 다가서는 발걸음이 먼저인지.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게 서로 물들어가는 과정이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손들이 포개지는 데는 때론 추운 날씨 외에 그 어떤 이유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도.
<5>
열 두 번째 용사의 눈물은 땅에서 기어다니던 통신달팽이의 등껍질 위에 떨어졌다.
“여보세요?”
용사의 눈물을 받은 달팽이가 누군가의 목소리를 받아 용사에게 전달했다.
“누, 누구시오?”
“거 뭐냐, 저는 프로게이머 홍구라고 하는데요.”
“프로게이머? 그게 뭡니까?”
“1548년 후에 생기는 직업이에요. 말하면 아시려나.아무튼, 괴물 처치하러 가신다고요?
<6>
처음부터 황금도룡뇽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현상 공모까지 걸어 수많은 전사들을 이곳까지 끌어들인 것은, 우리들을 이곳에 가두어 무너뜨린 다음에 전세를 뒤집어 왕권을 잡으려는, 비겁하고 야비한 왕의 계획이었다.
살아 남아야 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살아 남아서, 왕이라고 앉아 있는 그놈의 목을 쳐서 내가 왕이 되어야겠다. 이제부터는 내가 왕이다.
<7>
새빨간 노을이 구름을 삼킨 해질녘, 노랗게 물든 눈동자가 도로 건녀편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호등의 녹색 불빛 아래서, 사람들은 우글거리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그러나 그는 이미 새파란 슬픔 아래에 잠겨 있었기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질질 끌다시피하며 그에게 갔다. 보라색 피멍이 든 두 마음이 차가운 길 위에서 만났다.
<8>
타인을 해친 자에게 영원한 안식은 있어선 안되니까.
과거의 너는 궁지에 몰린 그들에게 동정을 베풀지 않았다.
타인의 선택권을 뺏었다는 건, 언젠가 자신의 선택권도 뺏길 각오가 되었단 선언이다.
그 날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핏자국이 사라진 이 자리에서,
나는 널, 그때 그들처럼, 죽이겠다.
왜냐고? 그게 마지막 질문인가? 그래, 답해주마.
<9>
준비는 끝났다. 한 가지 굳이 더하자면 조금의 미련마저 깎아낼 호승심 정도.
아이들의 기계 새 장난감 따위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새장 안에 손을 넣었다. 이국의 언어로 조선의 전래 동요를 부르던 작은 새가 꽁지깃을 빳빳하게 세웠다.
경성 총독을 맞는 축제 행렬이 몹시 소란하여 나와 새가 동시에 외운 폭발 주문은 아무도 듣지 못했다.
대한독립만세.
<10>
뭐, 어쨌든 그렇게 됐다.
고맙다거나 미안하다거나 그런 말은 됐어. 네 생각만큼 아프지도 않았으니까 괜히 동동거리지 마. 너는 항상 그렇게 나를 걱정시키더라. 오늘도 내가 아니었으면 멍청이처럼 당했겠지.
주인을 구한 어쩌고 기사가 나오는 모양인데 읽지도 마. 간지러우니까 사진 끌어안고 울지 않았으면 좋겠어.
잘 있어.
<11>
무슨 이런 애가 다 있지.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지.
다짜고짜 전학생은 무조건 내 짝이어야 한다고 우기니까. 교실에 자리도 많은데 굳이 옆에 앉히더니 졸졸 따라다니잖아. 아니 대학교까지 따라올 건 또 뭐야?
그때도 지금도 좀 많이 재미있고 행복하긴 해.
바보야, 너 나 좋아하잖아.
고백은 그만하면 되지 않았어?
<12>
사막의 돌이 별 아래 희미하다. 약탈자들은 떠났다. 노인은 낮 동안 태양이 달궈둔 바위에 몸을 기댄다.
문득 적막 속 따스하고 기름한 불빛을 본다. 황금도롱뇽이 기지개를 켠다. 주위는 오래전 떠나온 고향집으로 변하고, 노인은 우물에 두레박을 담근다. 물방울이 비산한다.
모른다. 이것이 지상의 별을 보는 마지막 밤인지, 혹은 그가 고향에 돌아온 것인지.
<13>
오늘 아침 도착한 결혼반지 1세트 팝니다.
나쁜 놈, 못된 놈, 약속 하나 지키지 못한 바보.
금방 도착한다더니, 저승에 가버렸네.
3주년이라 준비한 케이크는 촛농으로 엉망이 되버리고,
시신도 못 찾아서 반지도 못 끼워주는데.
구해줘서 고맙다며 손님들이 놓고 간 꽃속에서
환하게도 웃고 있네. 미운데 미워할 수가 없어.
“자기야, 거기 뜨겁지는 않지?”
<14>
향초가 타고 있었다. 심지가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점점 짙어졌다. [시간이 됐다] 소리가 방향을 초월해서 공간을 가득 채웠다. 지흐는 망설였다. 아니, 슈즙을 받아드는 손이 떨렸기 때문에 지켜보는 이들이 그렇게 짐작했을 뿐이다. 아무도 시간정지 레일에 오르는 기분을 아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의 물을 마시지 못하는 형을 행성의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15>
그는 6월 6일 오전 6시 6분에 태어나 인큐베이터에서 6일 더 지냈다. 6살을 무난히 넘긴 해, 원래 한쪽 손가락이 6개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66세가 될 때까지 5번의 사랑을 하고 5번의 죽을 기회를 넘겼다. 다리가 6개 달린 개를, 사람들은 악마라며 핍박했고 집에 불을 질렀다.
생일이 저물던 날, 그는 개와 함께 죽음을 받아들였다. 사랑했으므로.
<16>
11월의 마지막 날, 며칠 전 샀던 라면 한 봉지의 옆구리가 쥐 파먹은 것처럼 터져 있는 것을 발견한 함 규덕씨(34세,남)는 자택인 광진구의 한 빌라에서 50m 떨어진 편의점에 최대한 인상을 구긴 채 들어가 주인을 찾다가 카운터 아래 바닥에서 자신의 라면을 파 먹은 유 현지(17세, 여)를 발견하고 그녀에게 자신 또한 라면 봉지처럼 파 먹혔다.
<17>
예전에 한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는 진리를 찾아서 헤매지 않았다. 진리란, ‘현실’ 그 자체라 배웠기 때문이다. 매일, 눈앞에 펼쳐진 현상을 마주할 용기를 배웠다. 그 소녀는 자라서 연분을 맺었고 아이를 낳았다. 자신이 어째서 이 아이의 어머니로 선택된 것인지 정확히 몰랐다. 단지 때가 되면 ‘안다,’는 진실을 믿었고, 내일 ‘죽는다’는 가능성을 믿었다.
<18>
당신은 정말 잔인한 사람이에요. 알지도 못하는 사랑을 그렇게 함부로 말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당신이 진정 사랑을 모른다는 것의 반증이죠. 당신 같은 사람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정녕 무엇이 사람의 마음을 머물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지. 그래서 난 당신이 불쌍해. 평생 사랑이라곤 쥐뿔도 모를 것만 같은 당신이.
<19>
앞으로 5분 뒤, 우리는 거사를 치룬다. 내일해가 뜨기 전 저 악독한 주교에게서 성수를 돌려받을 것이다. 우리는 속아왔다. 그는 정화를 약속했으나 가뭄을 가져왔다. 평등을 외쳤으나 우릴 하찮은 것들이라며 무시하였다.
그들의 신이시여, 당신께 기도합니다. 계신다면 하얀색이라 우기는 저 간악한 자에게서, 저희가 신성한 물을 채갈 수 있도록 지켜봐 주십시오.
<20>
햇살이 따뜻해서.
까마귀는 조용히 부리를 닫고 나뭇가지에 내려앉아 하늘을 바라봤다. 이렇게 따뜻한 햇살을 느끼지 못하는, 이렇게 눈부신 하늘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없길 바랐다.
자신이 죽음을 불러오는 불길한 새이기를,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지금은 죽음이 찾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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