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야. 찌질하게 맥주 그만 먹고 내 말 들어 봐. 형이 진짜 백 퍼센트 통하는 고백법 하나 아니까. 어어? 모쏠 주제에 못 믿는다는 눈빛 봐라.
귀 열고 잘 들어. 너 걔랑 같은 과잖아. 과방에 걔 서랍장 있지. 과방에 비치된 그 여자애 서랍장 안에 초콜릿과 로맨틱한 고백 문구를 적은 편지를 넣어 놔. 이거 진짜 통한다니까? 정석이 최고라고.
거기 너, 뭔 헛소리야? 요즘 여자애들이 초콜릿 안 먹는 거 몰라? 특히 걔처럼 날씬한 애들은 줘도 쓰레기통에 버릴걸.
내 말을 들어. 과방에 비치된 그 여자애 서랍장에 닭가슴살이랑 고구마 넣어 놔. 프로틴 음료도 좋지. 로맨틱한 문구는 뭐 네가 알아서 하고. 알겠지?
그만들 해라. 모쏠이 진짠 줄 알겠다. 연애를 글로 배운 애랑 근육 바보보다는 그래도 연애를 해 본 형 말을 듣는 게 낫지 않겠냐? 일단 사람의 눈에 들려면 눈이 번쩍 뜨일 만한 걸 줘야지.
우리는 돈이랑 안 친하니까 다른 걸로 놀라게 해야 해. 내가 무용과 현정이랑 만날 때 썼던 방법인데 과방에 비치된 그 여자애 서랍장에 토끼나 다람쥐를 넣어두는 거야. ok?
너야말로 뭔 소리야? 토끼를 왜 사물함 안에 넣어.
그럴 바에야 학부 건물 앞뜰에 토끼나 다람쥐를 풀어놓겠다.
누가 나보고 근육 바보래? 너네 말 들으니 나한테 그런 말 할 처지는 아닌 거 같은데? 뭐? 토끼? 다람쥐? 풀어 놔? 그래야 똥밖에 더 싸겠냐?
차라리 학부 건물 앞뜰에 널 풀어 놔. 거기서 뭐든 눈에 띄는 일을 하라구. 춤을 추던가, 낱말 카드를 들고 있던가.
어우. 듣다 보니까 술이 확 깨네. 생각해봐. 포장을 아무리 해도 기본이 구리면 금방 깨져. 그러니 그런 포장보단 진실한 마음이 더 중요하지 않겠어? ‘내가 선물이다’는 만화에서나 통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차라리 학부 건물 앞뜰에 통장 사본을 풀어놓는 편이 경제학적으로 더 신뢰가 가지. 사랑한 만큼 준비가 완벽하다! 어우. 달달하다. 달달해.
난 또, 이 새벽에 왜 부르나 했네. 무슨 말들인지는 다들 알겠는데, 현실적으로 가능성 있는 방법을 알려줘야지. 얘 통장 잔고 보면 있던 마음도 없어질 걸?
정직한 것도 좋은데, 일단 호감을 쌓아야지. 그러니까, 학교 앞뜰에 오만 원 다발을 풀어놔. 뭐? 잔고도 적은데 돈이 어딨냐고? 현금 서비스 받던가!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오만 원 좋다 야. 오만 원 좋네. 근데 그냥 뿌리면 임팩트가 없지 않겠어?
학교 앞뜰에 오만 원 다발로 고백글을 써. 엉? 돈 빌려달라고? 니 고백인데 네 힘으로 해야지!
햐, 이놈들 봐라? 정신들 차려! 진짜 연애는 돈 주고 살 수 없는 거야. 일찍이 원빈도 실패했잖냐. 얼마면 되니? 얼마여도 안돼!
차라리 학교 앞뜰에서 소리 질러! ‘영문학과 2학년 정다빈! 널 좋아해! 날 거절하려거든 즈려밟고 가!’하고 말이야.
에이. 학교 앞뜰 가지고는 안 돼! 요즘 시대에 학교에서 소리 지르는 미친놈들은 쌔고 쌨는데. 뭐. 식당에서 소리 지르자고? 안 돼. 시끄러워서 다 묻혀.
뭔가 더 강력한 임팩트가 필요해. 신박함! 참신함! 그냥 아예 강의실, 교수님 계시든 말든 신경 쓰지 말고, 문 벌컥 열고 소리 질러! 뭐? 징계? 네 사랑인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 그래. 그래도 돈은 소금 같은 거라고. 뭘 하고 싶은 게 있어야 돈을 쓸 수 있지만, 돈을 써야 뭘 제대로 할 수 있는 법. 그 고백을 완성하려면 말이야.
그냥 아예 강의실, 교수님 계시든 말든 신경 쓰지 말고 문 벌컥 열고 소리 지른 다음 아까 현금서비스 받은 오만 원 다발을 뿌려! 그럼 교수님도 용서해 주실 걸? 다들 납득하겠지!
아, 진짜 무식한 거 티 내냐? 요즘은 말이야, 돈보단 머리지. 머리. 뇌섹남 몰라?
그냥 아예 강의실, 교수님 계시든 말든 신경 쓰지 말고 문 벌컥 열고 소리 지른 다음 성적 나온 거 뽑아서 뿌려! 그거면 교수님도 화내실 일 없고 딱이네. 뭐? 학점이 다른 사람들 보여줄 만한 상태가 아니라고? 좀 잘 나온 거 몇 개라도 없어? 그러면… 어휴.
야야, 기운 내. 넌 애한테 뭘 그렇게 면박을 주고 그러냐? 성적 높다고 다 뇌섹남이야?
그냥 뇌가 섹시하다는 것만 보여주면 되는 거잖아. 강의실, 교수님 계시든 말든 신경 쓰지 말고, 문 벌컥 열고 들어가서 칠판에다가 문제적 남자에 나올 법한 문제 풀이를 적어! 너,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진짜 할 수 있지?
딸꾹. 듣자 듣자 하니까 슬슬 술이 확 깨네.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어어.
수요 공급이 있다는 점에서 연애는 취업이랑 비슷한데, 취업할 때 뭘 준비해? 돈? 머리? 포트폴리오! 딱, 이제, 어, 강의실, 교수님 계시든 말든 신경 쓰지 말고, 문 벌컥 열고 나… 어가서 칠판에다가 연애를 한다면 걔랑 너가 어떻게 행복해지는지 포트폴리오를 적어! 딸꾹.
포트폴리오라니 뭔, 어? 뭔 소리야. 왜 애를 물건처럼 팔려고 해 다들. 응? 고백이라니까? 이거, 너, 너 고백하는 거잖아 지금.
그러니까 강의실, 교주님 계시든 말든 신경 쓰지 말고, 문 벌컥 열고 나가서 칠판에다가 연애를 한다면 걔랑 너가 어떻게 행복해지는지 각서를 적어. 응? 내가 새끼손가락 걸고 너 행복하게 해준다! 못 하면 잘라라!
얘네들 벌써 취했네. 횡설수설하고.
얘네 빨리 택시 태워서 집 보내고, 너는 저런 주정뱅이들 말 무시하고, 정신 또렷한 내 말에만 따라. 강의실, 교주님 계시든 말든 신경 쓰지 말고, 문 벌컥 열고 나가서 …뭐야 갑자기 왜 나가? 아무튼, 공인중개사를 불러. 각서 그거 아무 쓸모 없다? 법적인 계약 관계가 성립하려면, 공인중개사 있어야 해. 하나 불러.
에이… 에이 그렇게 사람 부를 거면! 그럼 공인중개사 가지고 안되지!
강령실, 교주님 계시든 말든 신경 쓰지 말고, 문 벌컥 열고 나가서 변호사를 불러. 어? 어?
뭐야? 다들 취해써? 그 상황에서 왜 변호사를 불러? 딸꾹. 어! 예전에 상황과 맥락에 맞게 말하라 했자나.
그때는 말이야! 강령실, 교주님 강시든 말든 신경 쓰지 말고 문 벌컥 열고 나가서 목사님을 불러. 강령 의술을 하고 있으면 예쑤 이름으로! 아멘! 해야지. 딸꾹. 변호사는 빙의나 당한다고.
다 좋아. 좋은데. 왜 고백을 강령실에서 해? 원래 강령실이 아니라 강의실이었다고? 아 강령실이나 강의실이나.
그러지 말고 저기 그 뭐냐 성당에서 교주님 강시든 말든 신기 쓰지 말고 문 벌컥 열고 나가서 목사님을 불러. 얼마나 로망 있어? 머리를 쓰란 말이야. 뭐? 성당에서 목사님을 왜 부르냐고? 어어… 너 개신교 아니었냐?
개신교면 성당에 있지 말고 교회를 가야지, 교회를. 천주교가 성당, 개신교가 교회, 유대교가…뭐더라?
어쨌든, 교회에서 교주가 강지던 말던 창문을 벌컥 열고 나가서 외쳐. 사랑합니다, 목사님! 근데 교회 교주랑 목사는 같은 사람 아니야? 목사가 강지면 고백 못 알아들을 것 같으니까 부적부터 떼. 강지가 그, 부적 붙이고 콩콩 뛰는 그거 맞지?
뭐? 교회 교주가 강아지야?! 야, 나도 데려가. 나 오늘 종교 생겼다. 완전 재미있어 보이는데. 어? 너희가 다니는 곳은 아니라고? 야, 뭘 꾸물거리고 있어? 당장 가서 사귀자고 해! 어? 목사님이 아니라 다진이가 좋다고? 그럼 교회에서 교주가 강아지던 말던 창문을 벌컥 열고 나가서 강아지 부적을 가져다주면서 고백해! 이야. 잊지 못할 고백 선물이다! …근데 강아지한테 부적이 있었냐?
이것 봐. 다들 취해서 규칙도 잊어버리고 있잖아. 응? 무슨 규칙? 규칙은… 딸꾹… 규칙은 중요한 게 아냐. 중요한 건 잊지 못할 고백인 거지.
요점은, 잊지 못해야 한다고. 교회에서 교주가 강아지든 말든 창문을 벌컥 열고 나가서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셀카를 찍어서 줘. 그 사진을 갖고 있는 한 다현이는 절대 못 잊어. 응? 다현이가 누구냐고? 내가 어케 아냐?
다현이가 뭐냐, 다현이가? 아까 말했잖아, 다진이라고! 그리고 사귀기 전까진 남인데 무슨 남의 셀카가 기억에 남아.
잘 들어, 교회에서 교주가 강아지든 말든 창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서 콜라로이드 카메라로 다진이 셀카를 찍어. 걔가 셀카를 어떻게 찍게 하냐고? 니가 생각해야지. 근데 콜라로이드란 건 무슨 브랜드야? 코카콜라가 카메라도 만들어?
다… 다… 다! 딸꾹. 경제학!
교회에서 교주가 강아지든 말이든 창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서 콜라로… 이… 카메라로 다진이 셀카를 찍고 쭉쭉 들이켜. 왜 다들 콜라를 매몰 비용으로 처리하려는 거야? 고백을 하려면 조금이라도 아껴야 한다고. 딸국. 내가 마시는 이 맥주처럼 말이야. 말? 말이든?
죄송합니다, 친구들이 조금 취해서. 야, 너네 무슨 고딩도 아니고, 콜라가 뭐냐?
교회에서 강아지가 말이니까, 창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서 셀카를 딸꾹- 하고 맥주를 원샷 해. 사람이 술이 들어가면 기분이 좀 풀어지면서 마음을 열게 돼 있어. 대진이라고 다르겠냐? 자, 짠 하자.
야, 난 안 취했어.
내가 진짜 기똥찬 생각이 하나 났거든? 주목을 확 끌 수 있는 그런 거. 교회에서 망아지가 말이니까, 코뚜레에 타고 창문으로 뛰어 들어가서 맥주를 딸꾹 찍고 셀카를 뿌려. 혼술보단 요란하게 부어야 많이 들어가고 많이 들어가면 많이 가까워지고… 그런 거지. 음? 코뚜레가 왜? 아아, 코뚜레가 아니라 고삐에 앉는 거던가?
…왜 다들 이렇게 말이 없어? 코뚜레랑 편자 헷갈린 게 그렇게 심한 거였어? …생각해보니 좀 심하긴 했네. 코뚜레는 말이 아니라 소 거였지? 그래도 어쨌든 괜찮지 않아?
생각해봐, 교회 창문으로 멋지게 뛰어 들어와서, 편자 위에 앉아 청주를 뿌리는 남자! 뭔가 인상적이지 않냐? 응? 이거 진짜 인상 강렬하게 팍 박힌다니깐?
하으아암… 뭐야? 다들 어디 갔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냐? 슬슬 가자.
그전에, 어디까지 얘기했지? 아, 그래. 교외로 가고 그런 얘기였지. 교외 좋아. 복잡한 도시에서도 벗어나고. 그러니까… 교외로 멋지게 뛰어 들어가서, 탁주 위에 앉아 청혼을 뿌리는 남자! 라는 거지. 얘기 끝났어! 다들 먼저 갔나? 토하러 갔나? 아무튼 우리도 일어나자구.
―――
……식탁 위에 널브러진 사람들을 아직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이 챙기며, 나와 친구들은 비틀비틀 술집을 걸어 나왔다. 마지막 친구 녀석이 네 발로 땅을 짚으며 계단을 기어 내려오자마자 종업원이 가게 셔터를 내렸다. 좋은 녀석들. 난 내 연애 문제에 다 함께 머리 모으고 고민해준 친구들을 한 명 한 명 택시에 태워 배웅했다. 곧 사람이 없는 썰렁한 밤 거리엔 알콜 냄새가 나는 종이컵 무더기와 바퀴벌레 껍데기 색 같은 갈색 맥주병만이 굴러다녔다.
술기운에 눈이 돌았지만, 이상하게 정신을 맑았다. 몇 날 몇 일 사랑 때문에 앓던 가슴이 가벼웠다. 맺힌 감정을 표현할 방법을 비로소 찾은 덕이었다. 이게 우정의 힘일까?
그래. 방법을 안 김에 바로 실천으로 옮겨야지!
나는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를 쭉쭉 손가락으로 훑었다. 다… 다빈… 다진… 다현… 다진… 누구한테 전화를 걸려 했더라. 아, 대진. 검색창에 이름을 치니 학과 4학년 그룹 파일 안에 대진이형이란 이름이 든 게 보였다. 내가 왜 이걸 선배님들 그룹에 넣어놨지? 나는 내 사랑 대진이에게 오늘 아침 일어나면 교외 유명 시민공원 중심에 있는 정자로 와줄 수 있냐고 문자를 넣었다.
그리고 준비물. 그래, 준비물도 친구들이 다 정해줬다. 난 편의점에 들어가 가게 안에 있는 막걸리란 막걸리는 모조리 다 샀다. 점원은 술 냄새를 거하게 풍기는 날 무슨 알코올 중독자 보는 듯한 눈으로 보았지만 상관없다.
나는 문득 대진이에게 청혼하기 위해서는 사랑을 맹세할 언약의 반지가 필요하다는 걸 떠올렸다.
“여기 어 그거 그으 반지 그거 있어요오?”
혀가 둔해져서 어눌한 내 발음을 용케 알아들은 점원이 조금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내 뒤를 가리켰다. 입 심심할 때 먹는 껌과 초콜릿 같은 주전부리를 진열한 진열장 한가운데 커다랗고 반짝거리는 왕사탕 반지가 있었다. 색이 새빨간 것이 새콤달콤한 루비처럼 보였다. “이거까지 주세요!” 난 호기롭게 왕사탕 반지 두 개도 결제해 비닐봉투 안에 넣었다.
양손에 묵직한 검은 봉다리를 바리바리 든 내 모습을 본 택시 세 대가 연달아 점등 표시를 빈 차에서 휴무로 바꾸는 걸 본 뒤에야 나는 겨우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어디까지 모실까요?”
“시민공원이요.”
“허허, 학생 이 밤에 친구들이랑 밤바람 쐬기로 했어?”
“아니요. 고백하러 가요.”
내 단호한 대답을 들은 기사님이 웬 미친놈 다 본다는 듯이 백미러로 내 행색을 살폈다. 괜찮다. 원래 사랑은 이해받기 힘든 법이다.
총알같이 시민공원에 도착해 나와 고백 도구들을 떨군 택시가 줄행랑을 치는 걸 뒤로 하고, 나는 공원 정자로 갔다. 나는 정자 중간에 앉아 막걸리 병들을 열을 맞춰 내 주변으로 비잉 둘러 세웠다. 금방 베이지색 하트가 완성되었다. 멋져. 로맨틱해. 역시 내 친구들은 천재야. 그리 생각하며 나는 왕사탕 반지 두 개를 양손에 하나씩 들었다.
어느새 멀리 앞산의 산줄기를 타고 찬란한 아침 햇살이 올라오고 있었다. 새벽 운동 나온 어르신 몇 분이 경보를 하며 내가 있는 정자를 흘끔흘끔 보았다. 옆 나무에서 종달새가 종알종알 예쁜 소리로 울었다. 멀찍이 버스 첫 차가 시민공원 정류장에 도착하는 게 보였다. 다… 대… 어… 암튼 걔가 벌써 문자를 보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곧 올 거야. 준비는 완벽한 걸.
고마워 친구들아. 이렇게 고백하면 100% 성공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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