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레드소설

얼음계곡에서 생긴 일

호스트

얼음계곡에서 생긴 일

덥지? 이런 날엔 시원한 계곡물에 발 담그고 수박이나 한통 깨서 먹는 게 최고인데, 그치?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날도 덥고 하니 오싹한 이야기 하나 해 볼께.
바로 얼음 계곡에서 일어난 일이야.

여긴 여름에도 물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차가운 물이 흘러.

그런데 그 물이 왜 차가운 줄 알아?

왜냐하면 말이지.

글쎄 그 물 속에 발목에 사슬이 매달린 시체들이 떠 있다는 거야.
무슨 헛소리냐고?

못 믿는 게 당연하지.

이 저수지는 수심이 그리 깊은 편도 아니고 한낮에는 바닥 근처까지 보일 정도로 물도 맑으니까.

그런데 이 저수지에는 비밀이 있어.

바로 시간에 따라 수심이 변한다는 거지.

못 믿겠다고? 지금 아래를 봐.
처음 들어올 때는 발목에 찰랑한 정도의 깊이였는데 지금은 어때?

서 있기만 했는데 무릎이 잠길 정도의 깊이가 됐잖아.
여기가 언제부터 이랬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한 가지는 말해줄 수 있지.

여기서 나갈 기회는 지금 뿐이라는 거.
뭐, 여전히 내 말을 못 믿는 것 같으니 이 저수지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려주지.

앞으로 할 얘기는 네가 감당하기 어려운 이야기일 수 있어.

듣기 힘들 것 같다면 떠날 기회는 지금 뿐이야.

용감한 걸? 말해줄게.

 

지금부터 할 얘기는 대학생들 이야기야. 여기로 엠티를 왔지.

대학생들은 홍일점인 스무살 여학생 한 명을 빼고 남학생만 일곱이었어.

그들이 가져온 짐 때문에 계곡으로 가는 봉고 차에는 6명밖에 탈 수 없었어.

그래서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2명은 친구들을 먼저 보내고 걸어서 계곡까지 가기로 했지.

작년에 와 봤던 애가 20분 정도 걸으면 계곡에 도착하는 지름길이 있다고 했어.

숙소 사장님은 괜히 더운 여름에 걷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지만 들뜬 애들을 누가 막을 수 있었겠어.

가위바위보 결과, 그 홍일점과 남학생 1명이 뽑혔어.

그들은 사람 말려 죽일 듯한 더위 속에서 산길을 걸어갔지.

20분 정도만 걸으면 도착한다는 말을 믿고 말이야.

그런데, 등산 좀 했다가 고생한 사람들은 알 거야.

그런 종류의 발언은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이 개입된 발언이라는 걸 말이야.

두 사람은 땀을 닦으며 아픈 다리를 두드리다가, 마침 길가에 있던 해묵은 나무를 보았어.

나무 아래엔 발목보다 조금 높게 돌이 쌓여 있었지만, 둘은 너무 힘들었던 나머지 그 위에 그대로 걸터앉고 말았지.
만약에 어떤 역사가 얼음 계곡과 그것을 품은 산을 얽고 있는지 숙소 사장님이 귀띔이라도 해 줬더라면…

쉬었던 그들은 다시 출발했지.

길을 가다가, 가끔 쇠사슬이 바위에 끌리는 소리를 듣던 홍일점은 남학생을 불렀어.

하지만 그는 대답 없이 계속 걷기만 했지.
홍일점은 그의 입을 막은 뼈 뿐인 손을 볼 수 없었어.
두 사람은 20분은 커녕 수 시간이 지나서 자신들의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어.

먼저 도착한 일행들은 이미 짐을 정리해두고 저녁 준비가 한창이었지.

두 사람은 짜증 낼 기력도 없는 상태였고, 나머지 여섯은 길이 험했던 걸 아니까 방에서 쉬고 있으라 했지.

그땐 몰랐겠지. 여학생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게 힘들어서 그런 게 아닌, 뭔가에 씌인 거란 걸.

 

여기서 잠시 남학생 분류를 좀 해보자.

여학생은 1명이지만, 다른 남학생들을 7명이니까.

전부 다 [남학생]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

홍일점과 같이 걸었고 지금 귀신 하나 붙은 그 불운한 남학생은 D라고 하자.

disaster(재앙)의 그 D말이야.

그리고 다른 6명 중 3명은 각각 배드 가이, 수줍이, 계략이라고 이름 붙이자.

일단 본격적인 사건의 시작은 지금 소개한 남학생들부터 시작되거든.

현재 이 3명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어.

바로 홍일점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거였어.

부드럽게 말해서 호감이지, 실제로는 무슨 의미인지 대충 짐작이 가지?

 

자, 이제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어.

방에서 쉬고 있던 홍일점과 D도 나와서 동석했지.

그리고 배드 가이는 대놓고 홍일점 바로 옆에 자리를 잡고 수작을 시작했어.

힘들게 걸어오느라 지친 그녀를 배려한다는 컨셉이었지.

사실 그는 가위바위보에서 질려고 했는데, 엉뚱한 놈에게 기회를 빼앗겨서 부아가 난 상태였어.

수줍이는 언제나처럼 그 광경을 보면서 우울함을 곱씹는 중이었지.

그때, D가 다가와서 수줍이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어.

이대로 그냥 가만히 있을 거야?

내가 방법을 알려줄 수 있는데, 그대로 한번 해볼래?

이상하게도 수줍이는 갑자기 흥미가 솟았어.

D의 말이 꽤 그럴듯하게 들리고, 그대로 따르고 싶어지는 거야.

자신에게 있는지도 몰랐던 적극성이 치솟았어.

 

식사가 끝나고, 휴식 시간에 들어갔어.

대학생들이 잡은 방은 2층에 3개 있었어.

1개는 배드 가이와 계략이를 포함한 3명, 다른 1개는 수줍이와 D를 포함한 4명.

나머지 1개는 홍일점 혼자 썼어.

다들 각자 방에서 게임을 하고, 안주와 술을 마시고 그러고 놀고 있었을 때였지.

배드 가이는 홍일점을 초대해서 게임에 동석시키려고 했어.

그런데 그녀의 방에 가보니 문은 열려 있고 짐 가방만 덩그러니 있는 거야.

배드 가이는 그녀가 화장실에 잠시 갔나 싶었어.

그래서 기다리려고 했지.

그런데 그 사이 다른 방에서 수줍이는 화장실 간다는 핑계를 대고 방 밖으로 나갔지.

하지만 실제로는 복도 계단을 내려가서 숙소 밖으로 나갔어.

그리고 숙소 주차장 담장을 넘어가서, 아래로 내려갔지.

그때 배드가이도 어두운 여름 밤에, 울창한 나무들 사이에서 젖은 흙을 밟고 내려갔어.

길을 잃을 뻔하기도 하고, 미끄러져서 넘어질 뻔하기도 하고, 바위에 부딪칠 뻔하기도 했지.

결국에는 D가 홍일점이 있을 거라고 말해준 그 장소에 도착했어.

그래, 지금 우리가 발 담그고 있는 이 얼음 계곡의 시냇가 말이야.

홍일점은 물속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어.

배드 가이는 뭘 보고 있냐고 물었지.

그러니까 홍일점은 물속을 가리키며 말했지.

“저 안에 누가 있어.”

“누구?”

홍일점은 대답하지 않았어.

배드가이가 물속을 더 들여다보려고 몸을 쭉 뺀 순간, 누가 뒤에서 등을 확 밀어버렸어.

“헉… 으흐헉!”

수줍이는 움직임을 멈춘 배드 가이가 계곡 깊은 곳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을 보다가 소리를 냈지.

저와 홍일점이 있는 시냇가의 바닥은 변함이 없었어.

단지 돌투성이 계곡 바닥만, 마치 먹이를 삼키는 산짐승의 목구멍처럼 움직였어.

배드 가이를 점점 멀리 끌고 가고 있었지. 시체가 어둠에 삼켜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왜 그래?”

묻는 홍일점의 목소리엔 감정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어.

그래. 뼈만 남은 시체가 말할 수 있다면 낼 것 같은 목소리였지.
수줍이는 그때 알아챘어야 했어.

뭘 말이냐고?

당연히 홍일점이 더 이상 자기가 알던 사람이 아니란 사실이겠지?

아, 물론 횟집 수조의 물고기가 매운탕 비린낼 맡고 제 운명을 안다 해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겠지만 말이야.

“내가 죽였잖아!”

자인하던 수줍이는 한순간 도리질 치며 마치 폭포수처럼 변명을 터뜨렸어.
“다.. 다 D가 시켰어. 걔가 죽였어! 난 그냥 걔가 하란 대로 배드 가이를 밀기만 했어!”
수줍이는 기억에서 멀어지는 D의 말을 죽을 힘을 다해 붙잡았어.
– 여자 앞에서 물에 빠진 놈을 구해 주면, 널 보는 홍일점의 시선이 달라지지 않겠어?

수줍이는 순간 소름이 끼쳤어.

구해준다는 게 포인트였는데, 자신은 그저 배드 가이를 밀기만 했던 거지.

수줍이는 말을 끝맺기도 전에 제 발목을 조이는 묵직한 쇠사슬의 차가움을 느꼈어.

주위가 어두웠던 덕에 그게 배드 가이의 시체 발목에도 엮여 있었단 사실은 몰랐지만 말이야.
쇠사슬의 끄트머리가 물에 잠겨 있는 것을 보고선, 수줍이는 그곳으로 끌려 들어 가리란 사실을 알아차렸어.

비명도 질렀단다.

계곡을 채운 자갈돌이 몽땅 울리도록 말이야.

 

수줍이가 낸 소리를 듣고 숙소에 있던 인원들이 계곡으로 달려왔지.

하지만 물가에 홍일점만 누워 있었지 정작 소리를 낸 수줍이는 어디로 갔는지 도무지 눈에 띄질 않았어.

배드 가이와 수줍이를 찾아보고 싶어도, 이 어두컴컴한 한밤중에 수색 활동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어.

대학생 5명이서 길 잃고 헤매기 밖에 더하겠어?

결국 숙소 사장님에게 상황을 알리고, 경찰과 구조대를 부르자고 결론 내렸어.

그래서 일단 사장님 방으로 찾아갔지.

그런데 방문을 아무리 두들겨도 반응이 없네?

분위기도 안 좋고, 해결책도 나오지 않으니까, 결국은 다들 잠시 머리를 식히기로 했지.

이번엔 방 배치를 임시로 바꿔서, 원래 첫 번째 방은 비우고, 두 번째 방에 남은 5명이 다 들어갔어.

그 이후 D의 제안에 따라, 누군가 홍일점의 방에 가서 그녀의 상태를 살피기로 했지.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이 계략이가 된 것도 D의 제안이었지.

그런데, 계략이가 홍일점의 방문을 열었을 땐 침대 위에 아무도 없었어.

계략이는 당황해서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와 침대 밑과 옷장 안까지 뒤졌지만, 자신 뿐이었어.

적어도 발이 방바닥에 붙어 있는 사람은 말이지.
“아까 여기 눕혀 놨었는데. 그새 화장실 갔나?”
계략이가 정수리에 닿아온 머리칼 끝을 느낄 때, 슬쩍 닫힌 방문 뒤론 쇠사슬 소리가 들렸어.

옆방에서 일어나는 일도 모른 채, 남학생 넷은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아보고 있었어.

아니면, 그러는 척 하든가.
그러는 척 하고 있는 사람은 빼고 나머지 셋에게 편의상 별명을 붙이자.

우선 짬짬이 경찰에 전화를 걸며 전자기기와 전선들을 계속 손 보는 애를 ‘공돌이’라 하자.

공돌이는 전화와 인터넷이 전부 먹통이 된 이유가 기계 결함일 거라 믿고 있었어.

 

나머지 둘은 서로 의논하더니 방을 나가서, 1층 사장님 방 앞 거실의 커다란 책장을 뒤졌어.

응급 구조와 관련된 책이 있으면 그 책에 적힌 정보를 토대로 실종된 친구들을 수색해 보려는 거였지.
둘 중 지식에 더 해박한 쪽은 ‘반와’, 글 읽기보단 직접 행동하는 게 체질인 쪽은 ‘행동 대장’이라고 하자.

“씨, 산 속 계곡에 있는 펜션이 응급구조 책도 하나 구비 안 해 놨어? 안전 불감증은 한국 사람들 지병이야!”
“여기 향토사 책이 있네. 이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반와가 <얼음계곡전통가꾸기>라 적힌 책을 꺼내 들었어.

한 50~60년 전에 편찬된 듯 낡고 먼지가 가득했지만, 금박 입힌 제목은 어딘지 섬뜩한 빛을 내고 있었지.

“역사책은 왜?”
“이런 건 한 지역에 관한 모든 정보를 담은 종합 향토사 책이야.

산과 계곡의 위치 같은 지리 정보도 실려 있으니까 걔들이 어디로 갔을지 대충 감이라도 잡을 수 있을 거야.”
“에이. 그래도 이런 게?”
반와와 행동대장이 책의 ‘II. 얼음계곡의 지리’ 부분을 한참 열심히 읽고 있는데 사장님의 방 문이 열렸어.

숙소 사장님은 반와와 행동대장이 마치 죽었다 살아난 사람을 본 듯 펄쩍 뛰며,

위층에 있는 친구들을 부르는 걸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
“학생들 무슨 일 있었어?”
“친구 셋이서 밖에 나갔는데 둘이 없어졌어요.”
반와가 말하고, 행동대장이 그걸 받아서 대답을 마저 했어.
“사장님 방문을 두드렸는데 답이 없으시길래 저흰 알아서 애들 찾아보려고 했죠.”

“그랬어? 아니 잠깐만, 이게 무슨! 난 계속 방에 있었는데 아무 소리도 안 들리길래 학생들 일찍 자는 줄만 알았지.”
“저희가 얼마나 크게 사장님을 불렀는데요.”
“솔직히 주무셨죠, 사장님?”
사장님과 두 사람이 어리둥절해 있는데, 계단을 뛰어 내려온 공돌이와 D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목소릴 짜냈어.
“계략이가 창문에서 떨어졌는데 온몸에 유리 조각이!”

사장님과 네 남학생이 밖으로 뛰어나가 보니 홍일점의 방 창문에서 떨어진 계략이는 숨이 끊어져 있었어.

참혹한 모습에 모두들 당황해서 정신이 까마득해졌지.

가까스로 사장님이 창고 위치를 가르쳐 주어 반와와 행동대장이 가서 들것을 가져왔어.
“시신은 119가 올 때까지 창고에 두자. 좀 전부터 내 전화고 라디오고 다 먹통이라서, 기다려야 될 것 같네.”

방에서 울고 있던 홍일점이 얘기해 준 사건 내용을 공돌이는 믿었지만, 행동 대장과 반와는 믿을 수가 없었어.

배드 가이 놈이야 물론 싸우고도 남을 성격이지만 수줍이는 도저히 누구랑 싸울 성격이 아니었거든.
싸움은 그럴 수 있다 쳐도, 계략이가 난데없이 스스로 창문에서 떨어졌다고?

반와와 행동대장은 홍일점이 최소 한 사람을 죽였다고 의심하기 시작했어.

사장님의 얼굴은 마치 시체처럼 어두웠어.
“이 계곡은 수백 년 전부터 어떤 존재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죽여 왔던 곳이야.

30년 전에 돌 무더기로 그걸 눌러 놓은 뒤론 그런 일이 일절 없었는데 이번엔 왜 또 일어났을까?”
이번엔 반와가 한숨을 쉬고, 행동대장이 코웃음 치며 반박했지.
“그 뭐시기 역사 책에 나온 얘기 말씀이시죠? ‘얼음 계곡의 지명 유래’라던 거!”

“사장님, 그 귀신의 한이 깊어 계곡을 지나는 사람들이 연이어 죽었단 얘긴 그냥 설화일 뿐이에요.

계곡과 산이 워낙 험해 사고를 당하기 쉬우니 주의하라고 만들어낸 얘기겠죠.”
“여기 예전에 뭔 일 있었어?”
반와가 거드는 말을 듣고 궁금해진 공돌이가 끼어들었어.

고개를 숙인 홍일점의 눈동자가 붉게 물드는 줄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채로 말이야.

“아니, 그냥 설화야. 고려 성종 때 주인집 아씨를 사모하던 노비가

아씨의 혼인날 자기가 신랑인 척 혼인하려 했다가 이 계곡에서 들통나서 수장 당했대.”
“뭐 전설의 고향이야?”
“쓸데없는 얘기 그만하고 쟤나 어디 가둬 놓자고!”
행동대장이 목소리를 높이며 홍일점에게 삿대질할 때,

숙소 사장님은 초승달 모양으로 입을 찢으며 조용히 웃던 D와 눈이 마주쳤지.

사장님은 소름이 끼쳐서 비명을 지를 뻔했어. 하지만 다시 보니 그냥 평범하게 무표정인 거야.

자신이 잘못 봤나 싶었지만 기분이 너무 찝찝했어.

그러나 그 느낌에 대해 심사숙고할 틈은 없었지.

행동 대장과 공돌이가 언쟁을 벌이기 시작했으니까.

공돌이는 홍일점에 대한 혐의가 말도 안된다고 주장했어.

반박 당한다고 해서 공돌이가 그냥 물러나지는 않았지.

논쟁을 끝낸 건 중간에 끼어든 D였어.
“이렇게 하자. 우리 중 누군가가 홍일점을 감시하는 거야.

지금 쟤를 의심하는 건 너희 둘이니까, 너희들이 홍일점하고 같은 방에 머물면서 감시해.

대충 네가 걱정되서 같이 있어 준다는 식으로 구실을 대고.”

D의 중재안은 그럴듯하게 들려서 다들 찬성했어.

계속 논쟁하기도 귀찮았고. 그리고 사장님과 공돌이, D는 같이 전자기기들을 수리하기로 했어.

수리가 안되면 새벽에 날이 밝는 대로 사장님이 차로 경찰서로 가기로 했어.

지금은 너무 어두워서, 여기 지리에 익숙한 사람이라도 사고나기가 쉬워서 함부로 나갈 수가 없었어.

 

한편, 반와와 행동 대장은 두 번째 방에서 홍일점하고 같이 있었어.

홍일점이 원래 머물던 방은 창문이 깨진 데다가 사건 현장이라서, 여기로 옮길 수 밖에 없었지.

홍일점은 방에 들어온 후로는 아무 말도 없었고, 행동 대장은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어.

반와는 오늘 일어난 사건들을 순서대로 정리해 보고 있었어.

그 순간 반와는 죽거나 없어진 친구들 중 둘, 배드 가이와 계략이가 홍일점과 단둘이 있었단 사실을 기억해 냈어.
반와가 행동 대장의 손을 잡고 방문으로 나가기 무섭게 문이 천둥만큼 큰 소리를 내며 닫혔어.

그 전에, 아주 짧은 순간 동안이었지만, 두 사람은 홍일점이 여전히 침대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어.

“방금 뭐였냐? 아니 그보다 쟤는 누가 감시하라고 날 데리고 나왔어!”
“쟤랑 확실하게 단둘이 있었던 애들은 죽거나 실종됐어.

수줍이는 어땠었는지 확실히 모르겠지만, 우리 둘 중 하나만 쟤랑 같이 있으면 남은 사람이 죽는단 건 분명해!”
계단을 내려가 1층 거실에 서자마자, 아까 읽던 책이 그대로 펼쳐져 있는 모습이 행동 대장과 반와의 눈에 들어왔어.

“저 책을 다시 봐야 할 것 같지 않냐?”
“너 답지 않게 왜 그래, 행동대장?”

“너도 봤잖아, 홍일점의 눈! 난 보자마자 얼음 계곡 귀신이 실제로 있는 게 아닌가 싶었어.

사장님도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았고…

아무래도 그 귀신 전설에 대해 우리가 정확히 알아야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솔직히 아까 전설 부분은 대충 읽고 넘겼잖아?”

“네 말대로 책부터 읽는 게 좋을 것 같아.”
책을 집어 든 반와는 행동대장과 함께, 한 손으론 책을 펼쳐 들고 다른 손은 서로 맞잡았어.

두 사람 뒤에는 책장이 있었고 위엔 오래된 실링 팬이 돌아가고 있었지.
어쩌면 두 사람은 그때 운명을 직감해서 손을 잡은 걸지도 몰라.
“고려 성종대에 한 노비가 주인의 과년한 딸을 사모하였다.”

“그는 주인 딸의 혼인 날짜가 잡히자 신랑인 척 가장하고 신부를 탈취해 도망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주인 몰래 틈틈이 품을 팔아 마련한 재물로,

혼례 때 탈 백마와 그때 입을 비단옷을 사서 지금의 얼음 계곡 옆 골짜기에 숨겨 놓았다.
혼례 날 노비는 골짜기에서 신랑으로 변장하고 집으로 가 초례를 치렀는데,

신부와 주인집 사람들은 모두 그 변장에 속았다.”

“그러나 그 날 밤, 신랑이 초야를 치르지 않고 신부를 데리고 나선 것을 이상하게 여긴 주인 집 사람들이

몰래 따라가 보니 신랑은 곧 자기 집 노비였다.

곧바로 잡아와 다신 주인의 딸을 못 보도록 그의 눈을 인두로 지져 버린 뒤에

발목에 쇠사슬을 묶어 지금의 얼음 계곡에 던졌다.”
“다른 내용도 있다. 주인 집 딸이 노비와 사랑에 빠져 함께 도망가려 했으나,”

두 사람이 그 내용을 읽을 때 천장의 실링 팬이 흔들리기 시작했어.

“혼례 날 신랑을 만나보곤 그에게 반하여 도망갈 마음이 사라졌다.

그리하여 노비의 계획을 폭로하고 나아가 그가 자신을 납치하려 했다고 거짓말하여,

사람들이 위의 방식으로 노비를 죽였다 한다.”
“이후 노비가 빠진 계곡은 물이 얼음같이 차가워지고, 그곳을 지나는 사람들마다 모두 죽었다.”

“계곡 근처 주민들은 노비의 한이 깊은 탓이라 하여 무당을 불러 계곡에서 넋건짐을 하였는데,

물 속에서 쇠사슬이 솟아나 무당의 발을 묶어 끌고 갔다.

어떤 용하단 무당이며 승려를 불러 보아도 모두 물 속으로 끌려가고 행인들의 피해도 계속되니,

결국 그 계곡을 얼음 계곡이라 이름하고 계곡 주변 통행을 금지했다.”
두 사람이 읽기를 마치자마자 실링 팬이 떨어졌어.

육중한 물건들이 연이어 바닥으로 떨어지고 넘어졌지.

기계를 고치던 사람들은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어.

사장님도 D의 입이 다시 찢어지는 소리를 못 듣고 공돌이의 질문 만을 들었지.
“그런데 사장님, 아까 돌 무더기로 뭐 귀신을 눌러 놨다고 하셨죠?”
“음. 30년 전 폭우 때, 엄청 녹슨 쇠사슬 조각 하나가 계곡 아래로 쓸려 내려왔었지.”

숙소 사장님은 쓰던 펜치를 저도 모르게 공돌이에게 쥐어 주었어.
“그 쇠사슬 조각을 아무도 만지지 않고 엄청 영험하다는 무당을 불러 보여주니,

무당이 아무 말 없이 그걸 갖고 가서 계곡 옆 큰 나무 아래에 묻고 돌 무더기를 쌓았어.

달랠 순 없지만 잠시 눌러 놓을 순 있는 귀신이랬나.”
사장님은 자기 뒤에서 공돌이가 펜치를 들어 올리고 있단 걸 눈치채지 못했지.

 

공돌이가 정신이 번쩍 들었을 때, 그의 눈앞에는 등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장님이 있었어.

그리고 자기 손에는 피묻은 펜치가 들려 있었지.

공돌이는 기겁해서 펜치를 떨어뜨렸어.

자신이 왜 그랬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어.

그때 뒤에서 D의 섬뜩한 웃음소리와, 철컥거리는 쇠사슬 소리가 들려왔어.

공돌이가 뒤돌아보자, 그의 얼굴 앞에 초승달 모양으로 찢어져 열린 입이 펼쳐졌지.

D의 치아 역시 상어 이빨처럼 날카로운 삼각형 모양으로 갈려 있었어.
하지만 더욱 무서운 건 D, 아니 그것의 눈이었지.

정확히 말하면 안구가 문드러져 사라지고 푹 꺼진 구멍만 남은 자리 말이야.
공돌이는 D가 더는 사람이 아니란 사실을 직감하고 뒤로 물러섰어.

그러다, 공돌이는 피 묻은 제 손을 내려다보더니 울음을 터뜨리며 D 앞에 무릎을 꿇었어.
“죗값 받을게! 기억은 없지만, 내일 경찰이 오면 내가 너랑 사장님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사실대로 말할게.”
“죗값?”
D가 코웃음칠 때, 공돌이는 어느새 제 발목에 묶인 쇠사슬을 내려다봤어.

 

한편 기절에서 깨어난 반와는 행동 대장의 시체를 보고 터져 나오는 울음을 눌렀어.

그리고 제 앞 천장에 서 있는 홍일점의 여전히 붉은 눈동자를 바라봤어.
“이젠 숨을 생각도 없나 봐.”
말을 뱉어낸 반와는 발목이 부러진 줄도 모르고 일어나려다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어.
“우리에게 복수하고 싶은 거야? 우리가 전생에 네 애인을 죽였다던가 하는 이유로?”

홍일점에게 씌인 귀신이 전설 속 주인 집 딸일 거라 어림짐작 하고서, 반와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어.
“그래도 이런 방법은 아니지.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고통, 네가 느껴봤으니 그게 어떤지 잘 알 거 아냐!”
“내가 어떻게 알아?”
고개를 좌우로 90도씩 연신 꺾으며 홍일점이 비웃었어.

그 속에는 어느새 홍일점 뒤에 서 있는 D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지.

이구동성의 비웃음을 들은 순간, 반와는 귀신이 둘이 아닌 하나 일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어.
전설엔 두 가지 이야기가 있었지.

노비는 어떤 이야기에서든 주인집 딸을 사랑했지만 주인집 딸은 두 번째 이야기에서 노비를 버렸던 거 기억나?
만약 그 전설이 사실을 조금이라도 담고 있다면, 그 사실의 모습이 두 번째 이야기에 가까웠다면,

귀신이 될 이유가 있는 사람은.

“노비였던 너뿐이었겠구나.”
반와는 새삼스럽게도, 전설에서 노비의 한만을 언급했지 주인집 딸의 한을 언급하진 않았던 걸 떠올렸어.

그 이유가 지배층의 체면을 위한 각색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귀신이 처음부터 하나였기 때문일 줄이야.
홍일점은 여전히 반와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D는 반와에게서 눈을 떼고 홍일점을 바라보며 참혹한 미소를 더 크게 지었어.

섬뜩한 웃음소리와 쇠사슬이 요동치는 소리가 여름 밤의 폭우 속에서 울려 퍼졌어.

마치 반와가 무가치하고 바보 같은 질문을 한다는 듯한 비웃음이었어.
반와는 문득 설화의 내용이 떠올랐어.

옛날 희생자들 중에는, 노비의 영혼을 퇴마하려다가 죽었다는 무당과 승려들도 있었다는 걸.

그리고 사장님은 수백 년전 여기 향토민들의 후손이었어.

꼭 노비의 원한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가해자들의 환생만 얽혀있었던 게 아니야.

방관자처럼 가해자들의 행위를 눈감거나 옹호한 이들도 있었을 것이고,

그저 귀신을 퇴마하려는 이들도 있었고,

그냥 재수없게 가해자들(혹은 환생체들)과 같이 있어서 사건에 얽힌 부록 같은 사람들도 있었던 거야.

앙화가 순환하고 반복될수록 그런 경우들도 많이 일어났겠지.

 

반와는 그것, 노비 귀신의 눈이 있었을 법한 부분을 바라보았어.
“널 죽인 사람들은 네가 노비란 이유만으로 너의 삶을 그저 쓰고 버릴 수 있는 물건처럼 다뤘어.

그런데 이젠 네가 다른 이들의 인생을 그렇게 다루고 있지.”
귀신의 표정은 어둠 속에 묻힌 덕에 어렴풋이 보이지조차 않았어.
“네 복수의 부록으로 취급 당한 사람들에겐 너도 가해자일 뿐이야!”

반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마당에서 뭔가 끌리는 소리가 나더니,

사장님이 피 섞인 기침을 하며 기어서 현관으로 들어왔어.
“학생! 나 좀 어떻게… 도와 줘…”
달려가서 사장님을 부축해 방 안으로 옮기던 반와는 큰 천둥소리가 나자 본능적으로 창 밖을 내다봤어.

D와 홍일점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고, 요동치는 물 소리는 계곡을 흔들듯 커져 갔지.

 

그 날의 뒷일?

지금까지도 반와는 흔한 공포 영화의 결말처럼 일이 흘러갔다고 생각하고 있어.
새벽이 밝아올 무렵 먹통이던 전화와 인터넷이 거짓말처럼 복구되었어.

오래지 않아 119 헬기가 현장으로 날아왔지.

반와와 사장님은 헬기에 실려 근처 대학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았어.

경과는 좋았지만 두 사람 모두 다친 부위에 지긋지긋한 신경통을 달고 살게 되었어.

물론 경찰도 나섰지만 그 시절 경찰한테 기대할 게 뭐겠니?
경찰은 처음에 진술을 듣고 정신질 환이나 ‘그 약’을 의심해서 반와와 사장님에게 검사를 진행했어.

검사 결과가 정상으로 나왔을 때서야 현장에 느릿느릿 달려가 수사를 진행했지.
국과수가 와서도 시체는커녕 살인의 흔적조차 찾지 못했지.

경찰은 만만한 야생 버섯에 책임을 덮어씌우고 수사를 종결해 버렸어.

 

사실 현장에 나갔던 경찰들도, 남달리 차고 맑은 계곡물을 보고선 원인이 버섯이 아니란 걸 알아차리긴 했어.
무당 조상을 둔 한 경찰관은 무너진 돌 무더기를 지나다가 싸늘한 기분을 느끼고 조사를 하기도 했지.

그가 사장님의 증언을 들으러 병원에 주스를 들고 찾아온 덕분에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던 반와도 같이 들었어.

“제 생각엔 사람들이 계곡 위로 올라갈 일이 없게 입산을 통제하는 대신,

산 아래를 휴양지로 개발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괜찮지 않나요?

경찰서에 보관된 얼음 계곡 사건 사고 통계 문서를 봤는데 그쪽에선 아직 사고 난 일이 없더라구요.”
경찰관의 말에, 사장님은 이장한테 얘기해 보겠다며 고개를 끄덕였어.

반와는 동조하면서도 한편으론 예상하고 있었지.

입산 통제 안내문을 걸어 놓고 등산로 입구마다 노랗고 까만 금줄을 쳐 놓더라도,

해마다 그 줄을 넘는 사람이 나오리라는 사실을 말야.
산나물을 캐고 다슬기를 따며 귀농한 기분을 느끼고 싶은 도시인들,

스릴을 즐기고 싶은 학생들이 얼음 계곡을 품은 한스런 산을 올라가겠지.
경찰서가 매년 작성하는 사건 사고 통계에서 실종자 수가 0으로 기록되는 일도 절대 없겠지.

계곡 중간, 맑고 차가운 시냇물이 고인 저수지는 가끔 깊어지는 날이면

발목에 쇠사슬이 묶인 시체들의 실루엣이 달빛에 비쳐 드러나겠지.

그들의 지옥에 휘말릴 자기 같은 사람들도 꾸준히 나오리란 걸, 반와는 알고 있었지.

‘그런데 나는 어떻게 저수지의 깊이가 변한단 사실을 알고 있지?’
누군가 알려준 적도 없는 사실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데 반와가 소스라치게 놀라는데, 병실 불이 꺼졌어.

그리고 열린 병실 문 앞을 지나가던 간호사가 멈춰서 반와 쪽으로 얼굴을 돌렸지.
역광 때문에 어두운 와중에도 반와는 간호사의 초승달 모양으로 찢어진 입을 봤단다.

사장님뿐만 아니라 경찰관까지 본능적으로 간호사 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 장면을 본 덕분에,

얼음계곡이 있는 산은 그날 이후 이틀 만에 입산이 전면 금지되었어.

경찰관이 총대를 메고 서장에게 입산 금지를 꼭 해야 한다고 건의를 올렸거든.
서장 역시 산에 자란다는 ‘위험한 야생 버섯’ 때문에 희생자가 더 나오는 걸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경찰관의 건의를 들어주었지.

귀신이 계곡 밖에서도 사람을 빙의시키는 모습을 본 뒤로, 세 사람은 귀신에게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얼음계곡이 있는 지역을 떠나는 방법밖에 없단 사실을 알아챘어.
반와야 치료가 끝나는 대로 학교로 가면 되었고, 경찰관도 다른 지역으로 전보를 가면 되는 일이었지만

평생을 토박이로 살아온 사장님은 떠나는 것이 쉽지 않아, 아쉽지만 결국 남기로 했어.

 

자, 그래서 지금까지 이야기 한 사람이 누구냐면,,, 바로 그 사장님의 딸인 나야.

나는 아버지한테 펜션을 이어받아 지금까지 여기서 살고 있어.

나도 노비 귀신을 봤냐고?

못 봤다면 이야기를 지어내서 펜션에 묶게 하려는 수작이 아니냐고?

글쎄? 그건 네가 알아서 판단해야지. 나는 꼭 들어야 할 이야기를 해 준 것 뿐이야.

그러고도 이 펜션에 남자친구랑 묵겠다고?

흐음… 그래 그럼 오늘 밤 안녕을 기원할게.

굿 나잇!

호스트 코멘트

참여해주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함께 즐겁게 무서운 이야기를 창작할 수 있었어요.
이제 입추도 지나고 슬슬 아침저녁으로 시원해지네요.
더운 여름 같이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참여자


후원자

장창성 태윤그리고 익명의 후원자 1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