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습구나, 삶이여
오래 함께했으되 길 앞에 곧 이별할 그 이름이여
허락된 적 없는 영광에 눈길을 보내지 말라
용서된 적 없는 원죄에 비탄을 보내지 말라
저물녘 안개 낀 강가에서 기다리는 소맷자락은 누구의 것인가?
해자의 뱃사공을 기다림은 어리석음의 소산일지니
이별한 삶이 두건을 벗고 그대를 맞이하리라
헛된 꿈에 취한 자 이곳에 멈춰서리라.
계속 읽어.
여자아이가 말했다. 아니, 말한 것 같았다.
난 다시 비석을 해독해나갔다.
그대는 영생하는 나무의 덜 여문 열매인가
끓어오르는 화산의 아직 식지 않은 쇳물인가
들판의 풀씨처럼 번영하는 흙의 자손인가
누구이건 간에, 이곳까지 오며 삶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은 그대의 실력과 용기를 높이 산다
이 비석 너머는 저주받은 땅
오직 신에게 버림받은 추악한 것들만이 썩은 흙 위를 거닌다
나 이전에 그 땅에서 돌아온 이는 없었으며
나는 저 땅에 발을 딛는 생명이 내가 마지막이길 소망한다
그럼에도 그대가 저 땅을 지나 마왕을 물리치고자 한다면, 이 글을 읽으라.
지금 그대 눈앞의 깊은 동굴은 바위의 자식들
난쟁이들이 세운 도시의 입구다
이 버림받은 도시는 수백 개의 길이 얽힌 미로요
길마다 수백 개의 악몽이 도사리는 미궁이다
이곳에서는 눈 없는 자와 눈 있는 자가 다르지 않으니
눈 없는 자들은 출구의 빛을 찾지 못할 것이고
눈 없는 자들은 사방에서 출구를 찾을 것이다
그리하여 길을 잃고 방황하리라.
망자의 도시에서 살아남을 만큼 운이 좋다면
비로소 그대는 세상의 끝이 시작하는 곳에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볼 것이다, 적옥의 광야를
그대 눈앞에 펼쳐진 붉은 광야의 광막함은
세상의 끝을 밟기 전의 그대를 무참하게 박살 낼 것이다
더욱 거대한 두려움이 그대의 정신을 잠식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는 돌아서지 않겠지, 나 또한 그러했으니.
그대를 갉아먹을 대지를 가로지르면
그 경계는 흐르고 있음이라
바닥이 없는 계곡으로부터 솟아 올라온 쇳물은
발이 닿지 않는 하늘에 거꾸로 선 것과 같으니
그대는 신중할지어다
생명이 없는 것은 보존하되 가라앉을 것이고
생명이 있는 것은 떠오르되 멸할 것이니
그대가 그 위를 건너가려면
앞서 간 자들을 경계하라
그들은 고독하여 그대를 맞이하리라.
여정하는 자여, 그대가 선 곳은 녹음이요
눈에 비친 것은 파고드는 줄기라
사악한 쇳물을 들이킨 망령된 수목이 이빨을 드러내면
이미 그대의 길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니
깨어있으라, 감긴 눈꺼풀은 그대의 감각을 흐리게 하리니
기어드는 위협으로부터 그대를 지키지 못하게 하리라
마침내 녹색의 벽 너머로 빛이 보이거든
그곳이 그대의 다음 목적지일 것이다.
파고드는 죽음의 줄기들을 떨치고 숲의 뒷면에 닿으면
신의 궁전을 찌를 기세로 솟은 광채의 산이 기다리고 있으리
탐욕에 숨결을 불어넣는
옛 별의 조각의 속삭임이 울리는 수정의 협곡이
그대의 발을 끝없이 묶으려 할 것이다
멈춰서지 않는 이만이 오만한 빛 너머 도사린
더 끔찍한 것들을 볼 수 있을지니.
낡은 비석에 새겨진 글자는 오랜 세월 풍화되어 눈으로는 잘 식별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손으로 비석을 더듬어 가면서 어떻게든 해석을 했다는 사실이 놀라워서 나도 모르게 여자아이를 멍청한 표정으로 한동안 쳐다 보았다.
실례라는 것을 깨닫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눈이 마주쳐 버렸다. 마치 천년은 살아낸 것처럼 공허한 잿빛 눈동자가.
갈증에 목 맨 육신은 마침내 갈구하나
얼음 사막은 잔인하나니
흐르는 법을 잊은, 영겁의 세월 전에는 물방울이었던 눈송이가
그대들에게는 모래바람이리라
갈라진 얼음조각들은 가장 뜨거운 대장간의 불에도 녹지 않으니
그대들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몸 안에 흐르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선택하라
감당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마셔보라
그렇지 못하다면, 견딜지어다.
스스로를 이겨낸 이들은 이제 여독을 풀 지어다
광기의 구릉에서 그대들을 위협할 실체는 없노니
그대들은 그저
스스로의 발끝도 보지 못할 정도로 짙은 안개를 헤쳐 걷고 걷고 걷을 뿐
안개가 뱉어내는 기이한 고성은 그대들을 해치지 못하리라
그러나 수십일간 반복되는 음성은
가장 강인한 자조차 스스로를 잃게 만드나니
안개 속 유일한 실체가 그대의 적이니라.
일곱 길목에서 자신을 잃지 않는다면
그대는 마왕의 성에 도달하리라
지옥의 문을 넘어서는 모든 이를 기리는 노랫말에 그대의 이름이 함께 하리
설령 그대가 그곳에서 쓰러져
첨탑을 비석 삼아 반석 아래 몸을 뉘일지라도.
그대는 사람의 입을 타고 길이길이 살아가고픈 영혼인가
정녕 일곱 개의 작은 지옥을 지나
모든 스스로의 무덤으로 걸어 들어갈 자신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대의 신념에 갈채를 보내리
그대가 죽음의 하수인들을 이기고 마왕을 물리치고자 한다면, 이 글을 읽으라.
태양보다 저승의 밑바닥이 더 가까운 도시는 가장 작은 자들의 것
도시에 첫 굴이 날 때부터 그랬고
도시의 모든 구석에 흙과 바위가 들어찰 때까지 그러하리라
허나 이 지저의 주인들에겐 변화가 일어났다
한때 다른 모든 자들과 마찬가지로 오르락내리락하며 숨쉬던 그들의 가슴은
이제 썩어문드러져 그들이 땅을 파 집 삼았던 것처럼 벌레와 뱀들이 집 삼았으니
난쟁이들은 모두 변했으나 불행히도 변해야 할 것이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 듣는다
그대를 찾아낼 것이다, 그들 속의 존재가
가장 작지만 가장 큰 자들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는다 자부하던 그들은
더 작은 것들에게 함락당한 것이다
기억하라, 난쟁이를 만나면, 독니도 만난다.
광야는 해메는 이들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므로
항상 발밑을 경계하라
그대의 몸 밖으로 나온 영혼의 조각이 머리부터 모래 속으로 들어가면
감히 말하니 영혼을 버리는 게 나으리
갑충의 갈고리는 피가 흐르는 따듯한 육신을 영혼보다 좋아해
반드시 영혼의 그릇마저 빼앗으려 하리라.
수목의 녹빛에 생명의 기운을 읽는 자여
그들의 생이 어디로부터 왔음을 아는가
오랜 시간 척박하게 살아온 그들은 태양 이외의 새로운 양분을 찾았나니
그것을 탐하여 뿌리를 움직이고 그것을 탐하여 줄기를 뻗는다
그대들의 눈이 그것들을 향하지 않을 때
그들은 소리없는 죽음이 되어 메마른 손아귀를 뻗칠 것이니
그대들이 살던 땅의 초목이 아님에 유의하라.
사악한 초목은 그대의 걸음을 쫓진 못하나
그대의 기력은 숲을 통과하기 전에 쇠할 것이다
그대가 스러지면, 녹색 악령들이 제 몫을 탐하려 한다
그대의 살 속을 파고들어 고혈을 빨고
그 안에 씨앗을 내려 새로운 줄기가 돋아날 것이니
수목에 닿은 상처는 도려내야 할 것이다
도려내지 못할 상처라면, 그대의 동료가 부디 자비롭기를 기대해야 할 것이다.
용암마저 흐르지 못하고 얼어붙는 서리와 눈보라의 땅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추위이나
그것에 쓰러지는 이들은 신의 자비가 함께 한 것이라
잊힌 음성이 서려 빚어진 여왕을 만나면
그대는 얼음의 잔혹함에 대해서도 알게 되리
세상의 모든 불이 꺼지는 날까지 차가운 조각으로 살고 싶지 않다면
감히 이르나니 여왕을 조심하라.
그대는 이 모든 고통과 시련이 정녕 그대의 몫이라 여기는가
세상이 시련을 넘어서는 게 그대의 평온한 죽음보다 가치있는가
그렇다면 그대의 강인함이 내 마지막 노래를 대신하게 되리
그대가 삶에 시련과 비극을 들여놓을 용기가 있다면, 이 글을 읽으라.
바닥 없는 계곡에는 질투하는 고독자들이 헤엄치니
그들은 새로운 벗을 원하여 그대를 붙잡으리라
계곡의 바닥 만큼이나 깊은 그들의 고독감이
그대가 겪어보지 못한 기묘한 물살을 일으키니
그 가운데에 선 신상을 숭배하게 될 것이다
그 눈에 비친 삿된 그림자를 베어가라
그러면 사악한 시선이 그대를 뒤쫓지 못하리라.
광명을 받아 찬란한 산등성이
그대는 그 빛의 근원에 의문을 품은 적 있는가
그 거대한 협곡에서 울리는 기이한 떨림에 탐욕이 기운 적 있는가
무엇 하나 손 대어서는 안 될 그곳에서, 가져야 하는 것은 단 하나뿐
빛을 향해 손을 뻗으라
닿지 않을 하늘에 불을 구한 옛 영우처럼
닿지 않을 정상에 빛을 구하라
손가락에 닿는 그대의 운명을 쥐어라.
안개 속 의미 없는 웅성임을 따르지 말되
그대의 귓가에 속삭이는 변함없는 단 하나의 목소리를 놓치지 말라
그 목소리를 따라가면
그대의 길의 마지막 시련을 함께 해칠 가장 굳건한 아군을 얻으리니
소리를 의심할지언정 귀를 막지 말라
언제나 귀를 열고 깨어 있으라.
그대는 주변의 도움을 놓치지 않고 거머쥘 그릇이 되는 이인가
그렇다면 여정에 놓인 모든 행운이 그대의 발걸음에 깃들리
그대가 굴곡을 헤쳐나갈 지혜와 행운을 지녔다면, 이 글을 읽으라.
상처에 핀 구더기를 쓰다듬을 줄 아는가?
밟힌 새싹의 자리에 거목이 자라는 이치를 아는가?
검은 옷깃 나부끼는 사공의 검을 적이 아니라 친구인줄로 알라
10명을 부리는 대장은 땅을 볼 줄 앎으로 족하되
1000명을 부리는 대장은 하늘을 볼 줄 알아야 함이라
흐르는 피가 물감이 되더냐?
잿빛 하늘에 태양을 그릴 줄 아는 화가만이 비로소 성문에 이르리라.
성문에서 그대가 피를 흘릴 일은 없으리
문지기들은 그 누구도 막아서지 않으며
그저 성에 이른 자들의 손에 마무리된 시련에 긴 곡조로 해도할 뿐이리라.
성 안으로 들어선 그대를 빛이 인도하리
욕망의 안개를 뚫고 정상에서 거머쥔 빛이 나아가는 바를 따라 걸으라
그 속의 어떤 지옥도 빛에는 다가서지 못하리.
송곳같은 빛의 끝에서 그대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깊고 짙은 슬픔과 만나리라
그 슬픔의 주인이 마왕이다
생애의 문을 연 순간부터 절대자의 지위를 약속받은 자이며,
어둠을 따르는 간사한 자들의 추종을 받는 자
기사의 강고한 갑옷처럼
인간의 나약한 의지를 시험할 공포를 온 몸에 두르고 있으며
빛된 하늘에 거역할 정도로 거대한 힘을 휘두르는 자
용사여, 그대가 맞설 자는 스스로 목도하기 전까지 그대가 상상한 모든 것들을 뛰어넘을 것이라
그러나 그 위압스러운 자태마저 껍데기일 뿐
그 껍데기를 벗기지 않으면 마왕은 무너지지 않으리.
바위와 악의 거체에 돌진하지 말라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만용일지니
대신 그림자가 되어라, 그림자를 입어라
눈이 감겨드는 순간을 꽉 안아 붙들고
보이는 길을 걷지 말고 결코 길을 잃어선 아니 된다
빛을 벗어던지고 어둠에 잠기면 삿되기에
오히려 역시 삿된 마법의 갑주를 뚫을 수 있으리라
어둠에 잠겼다면 어둠을 물들여야 한다
마왕은 빛 속에 있으나 어둠은 빛이 있기에 더 어두운 법
어둠 속에 빛이 비춰야 한다
불씨는 필요없다 그대는 이미 빛의 실을 얻었다
빛으로 마왕을 실재에 꿰어라
빛에 한땀 한땀 꿰일 때마다 마왕은 상처입을 수 있는 몸을 가지게 되리라
조심하라, 그대는 이미 가지고 있는 몸이니
빛에 감싸여 상처입는 몸이 된 마왕은 더는 두렵지 않을지니
손쉬이 마왕이 두른 공포를 벗겨내리라.
그대가 비정함을 흉내낼 수 있다면
어느새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내 낭독음에 얹혀 들리고 있었다. 난 말을 멈추려 했지만 입은 멋대로 다음 문구를 읽어내려갔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무너진 마왕의 숨을 끊는 건 쉬우리
그자는 더이상 시작이 없는 공포의 군주도 아니오
절망을 자아내는 세상의 가장 깊은 응어리도 아닐지라
공포의 꺼풀 속에 든 마왕은
가장 여리고 나약한 몸으로 그대를 시험하리
흔들리지 말지어다
마왕을 물리치고자 이곳에 왔을 이여
가장 악하고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이 만이
마침내 마왕을 물리치리라.
난 다시 여자아이와 눈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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