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으면서 울게 되는 일을 종종 있는 일이다. 텍스트들의 나열일 뿐인데 그것을 읽어가면서 독자가 얻는 건 다양한 감정들이다. 거기에 세워진 허구의 세상 속에서 울고 웃고 혹은 두려움이나 공포를 느끼고 느낌으로만 알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을 느끼게 되는 경험을 한다는 건 다시 생각해보면 참 신비로운 일이다. 분명 거긴 글자들뿐인데 그 안에 사람들이 있고 거기 다른 세상이 담겨 있다니…
이 소설을 읽으면서 결국 울고 말았다. 초이의 슬픔은 처음엔 슬며시 땅을 축이는 이슬방울들 같다가 어느새 끝에 이르러 흘러넘치게 된다.
회색도시의 이미지, 지구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하고 반드시 멸망을 향해 가게 돼 있다고 주입시키는 작품들은 참 많았다. 미래를 담은 거의 모든 소설들은 이런 구도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것이 인간들의 탐욕이 일으킨 전쟁 때문이든 또 다른 외계생명체 때문이든 기후 등 최악으로 치닫는 환경 변화 때문이든 인공지능 로봇들이 인간을 멸종시킬 계획을 세우든 전염병의 창궐 혹은 또 다른 무엇이든 (나머지는 새로이 작가들에 의해 개척될 또 다른 신선한 상상들을 기대하고) 그렇듯 다양한 이유로 지구는 멸망할 수 있다. 지구 멸망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적어도 이야기 속에서는.
(약간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가급적 많이 설명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어쩔 수 없네요)
여기 또 하나 지구멸망 스토리가 있다. 지구가 왜 멸망하게 된 건지는 명확하고 구체적이진 않지만 지난 세월 계속된 이상 기후와 계속된 자연 재해와 딱 세대뿐인 탈출선을 차지하기 위한 인간들의 전쟁이 있었다는 짧은 설명이 전부다. 하지만 부족하진 않은 느낌이다. 그런 과거보다 중요한 건 현재가 어떤가니까 말이다.
어쨌든 인류 생존의 끝 무렵에 눈을 뜨게 된 초이. 질병 치료를 위해 냉동인간이 되었다가 깨어난 그가 보고 듣는 50년 후의 미래는 암담하다. ‘이런 세상에 왜 날 깨운 것인가’ 원망할 정도로 처참한 상태. 단지 유일하게 자신이 잠들 때까지 지켜줬던 친구 그레타를 닮은 마리가 있어서 다행이었을지.
초이는 결국 자신의 가족들도 모두 죽고 없다는 걸 알았다. 마리가 초이가 있던 캡슐을 발견한 덕분에 깨어나게 되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리고 곧 생존을 위해 거기 모여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남은 탈출선을 타러 가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리고 이야기는 약간 모험소설 같은 양상을 띤다. 그 과정도 잘 묘사 돼 있고 재미있다.
결국 마지막 산사태 직전에 무사히 모두를 실은 탈출선은 떠난다. 이 이야기가 해피엔딩이 아닌 건 지구에, 여기 이 희망 없는 공간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때문이다. 눈물이 흐르는 것은 탈출선에 타지 않은 마지막 남은 이들의 희생정신 때문이다.
시종일관 재와 먼지가 날리며 생명이 자라지 않고 수분도 부족해진 세상, 너무도 위험해진 바깥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미소 지을 수 있었던 건 탈출선을 찾아가는 사람들 속에 남아 있는 여유와 인간애 때문이다. 남은 식량을 혼자 먹겠다고 싸우지 않는 사람들, 위험에서 아이들부터 보호하는 그들, 타인을 위해 기꺼이 치료법을 포기하는 초이, 그런 초이를 위해 애써주는 마리, 유쾌한 펍과 샤샤. 그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퍽 따스하기 때문이다, 정말 희망이 전혀 없는 지구에 남아 있든 탈출선을 타고 우주로 날아가든 인류에겐 그다지 희망적일 것 같지도 않은 그런 극한 상황에서도 남아 있는 인간애라니. 만약에 다시 환경이 좋아지고 어떻게든 생존한 인류들이 새로이 삶을 시작한다면 아마도 그건 이 인간애 때문이 아닐런지.
그래서 난 이 이야기가 좋다. 인간들끼리 싸움시키지 않고 잘 끝내줘서. 초이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될 것만 같은 기대가 생겨서. 왠지 절망적이지 않은 결말 같아서 말이다.
혼자지만 결코 혼자가 아닌 초이를 위해서 이야기가 계속 될 것만 같다. 그랬으면 좋겠다. 마지막 남은 인류의 슬픔은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떠나든 남든 살아남든 죽든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는 것. 초이의 슬픔이 죽음에 묻히지 않고 몇십년 후에는 그리운 어떤 것이 되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