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에 대해 알지 못하오. 공모(감상)

대상작품: 소설가 정승후를 아십니까? (작가: 창궁, 작품정보)
리뷰어: 루주아, 3시간 전, 조회 7

키노의 여행을 좋아했어요. 작가의 논란 이후로는 보지 않지만, 작가의 논란 때문에 유독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습니다. 탱크와 꽃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던 작가의 이야기. 그 나라에서는 해당 작품이 전쟁의 비극을 그리는 것으로 해석하고 각종 전시회 등을 통해 사람들은 그 그림 앞에서 전쟁의 덧없음을 떠올리지만 키노가 그 나라를 떠나기 전에 만난 작가는 머릿속에 탱크 생각만 든 전쟁광이었어요. 작가의 발언 전만 해도 키노의 여행에는 탈권위나 반전 등의 메시지가 은은하게 깔려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독 그 에피소드가 더 기억에 남는 거 같습니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작가와 실제 작가는 얼마나 다른 인물일까요.

조금 더 최근의 작품들을 떠올려 보면, 봇치 더 락이 있겠네요. 봇치, 고토 히토리의 가사는 매우 심오한 것으로 리스너들에게 호평을 듣지만 실제로는 일상생활에서의 불만을 풀어낸 것이라며 사람들이 이걸 알면 실망하겠지 하는 장면이 있지요.
비단 소설만이 아닙니다. 사실 이건 배우들에게 더 흔했던 일이라 생각해요. 악역 배우가 사석에서 욕을 먹었다는 이야기 등 독자, 정확히 말해 수용자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진짜와 현실에 존재하는 진짜를 면밀하게 구분하지 않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어요. 이런 작가와 작품을 분리하는 이야기는 꽤 유서 깊은 장르라고 생각해요. 이런 작품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대체로 작가는 신이 아니라 결함이 있는 인간이다. 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가끔은 선이란 없고 모두 위선이라 주장하는 사케즘일때도 있지만 동시에 드라마에 나오는 연기자들이 실제로는 그 작품이 아니듯, 작가 또한 작품과 면밀하게 분리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나아가 작가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단초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여전히 작가론에 대해 배웁니다. 우리가 보편 교육을 받았고 수없이 많은 국어 문제를 풀면서 작가의 의도를 파헤치며 독해하는 것을 학습했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작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작가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실제로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낸 문제를 맞추지 못했다던가, 작가의 자식이 학교 숙제로 나온 작품 해석을 작가 본인에게 물어봤다가 낮은 성적을 맞았단 이야기는 유명하지 않나요?
우리가 생각하는 작가의 의도란 실존하는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가 아니라 독자가 이해를 위해 만든 가상의 작가이겠지요. 롤랑 바르트가 말한 작가의 죽음 선언에 대한 제 해석이기도 하고, 좀 더 오타쿠 식으로 말하면 공식이 뭘아라. 정도의 말이기도 하지요.
우리는 작품을 읽으면서 작가에 대해 온갖 생각을 합니다. 이 작가의 생각, 배경, 계급 등을 추론하면서 글을 읽죠. 그것은 글에 대한 이해를 늘리는 데 도움이 되지만 실존하는 작가에 대해선 알려주지 않습니다.

기존에 존재하는 작가도 평범한(혹은 결함이 있는) 인간에 불과해 텍스트들은 이러한 배경의 훈련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이 작품은 한 발짝 더 나아가죠. 작가는 인간조차 아니야. 우리는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독자로서의 입장은 간단해요. 저는 이제 그거에 관심이 없어요. 작가는 이미 죽었으니까요.

합스부르크 왕가의 장례식 절차를 좋아하는데, 여기서 세속에 작위들로 시체를 설명하면 사제가 우리는 그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받아치고, 마지막으로 모든 수식어를 덜어낸체 그저 죄많은 인간이라고 말하면 그제서야 시체의 운구를 허락해 주는 과정이 있어요. 이것은 독자가 실제하는 작가를 수용하는 과정과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수식어를 벗겨내고 나서야 작가의 죽음을 수용할 수 있겠죠.

작중에서도 레이첼이 어떻게 되었는지 말하지 않는 게 ‘작가의 죽음’ 담론으로 해석할 여지라고 생각합니다. 레이첼은 이미 작품을 썻죠. 그렇기에 언급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어요. 이제 우리 독자들에겐 작품의 수용만이 남은 것이죠.

그러나 여전히 정말로 작품과 작가를 면밀하게 분리해 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은 남습니다. 서두에 키노의 여행을 언급했고, 작가의 논란 때문에 지금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니까요. 작가는 죽고 독자의 수용만이 가치를 가진다면 작가의 논란과 작품을 분리할 수 있다면 여전히 키노의 여행을 좋아할 수 있을 텐데 지금은 읽을때마다 뒤에 작가가 30% 오퍼시티로 비치며 감상을 방해하니까요.

‘정찬승’이 후속작의 공개를 거부하고, ‘성주’가 모든 비밀을 공개하는 것이 아마 그것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해 봅니다. 그러나 그 의문에 대한 결론은 독자가 아니라 창작장의 사람으로서 할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의문에 대한 결론을 찾아 이야기할 사람은 아마 독자인 제가 아니라 작가인 저의 몫이겠지요. 미래의 나에게 그 숙제를 넘기는 것으로 감상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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