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덩이는 알 수 없는 바다로 이어진다. 한때 어린아이들이 참방참방 밟고 놀았다는 웅덩이는 해랑의 시대에 안전하지 않다. 알 수 없는 바다 어딘가에서 텐타클이 뻗어져 나와 사람들의 발목을 낚아챈다. 비가 오면 으레 생기곤 했던 웅덩이는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덫이 되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있다면 그 아래에는 필연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웅덩이 아래에 알 수 없는 바다가 있고, 서울 아닌 지방에는 여전히 웅덩이가 우후죽순 생겨나며, 대지의 자비로움 뒤에는 불공평함이 있다. 웅덩이 속 바다는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게 한다.
상상력은 해랑에게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영하와 만나고 영하가 사라져서, 해랑은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한때 그에게 특수잠수사란, 특별한 사명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할 수 있으니까 하는 일이었다.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인 승욱도 특수잠수사였고 이들을 보고 자란 해랑 역시 특수잠수사가 되었다. 일하지 않으면 죄책감이 들어서, 일이라도 해야 존재 이유가 생기는 것 같단 말을 덧붙이며. 영하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해랑은 이제 상상할 수 있다. 그는 혼자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도, 누군가와 함께 하는 삶에 대해서도 안다. 알 수 없는 바다에 뛰어들어 사람들을 구하거나, 돌아오지 않고 영영 바다 깊은 곳을 향하는 행위의 의미도 안다. 삶의 여러 방향을 상상할 수 있게 된 가운데 그는 자신이 원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러므로 해랑의 직업은 이제 다른 의미를 지닌다. 해랑은 아버지처럼 알 수 없는 바다로 뛰어들 수 있었다. 사라진 영하를 찾아 웅덩이란 웅덩이는 전부 찾아다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원치 않게 웅덩이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기로 했다. 죄책감을 피하려고 해왔던 일들은 해랑에게 자부심을 주는 과업이 되었다.
해랑의 시간은 이제 다르게 흐른다. 참 오래도록, 그는 하루하루 주어진 일들을 해치우며 살아왔다. 어제와 오늘은 크게 다르지 않고, 내일도 아마 비슷할 터였다.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웅덩이를 처리하다 보면 시간은 어떤 특별함도 남기지 못하고 휘발되었다. 그랬던 해랑의 시간이 미래를 향해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언젠가 영하를 만나게 될 날을 향해. 주어진 시간을 마치고 사랑하는 이를 만나러 가기 위해. 해랑의 시간은 더 이상 견뎌내야만 하는 무언가가 아니다. 책임감과 자부심으로 하나하나 채워가는 여정이다.
머리가 새하얗게 샌 뒤에야 해랑은 알 수 없는 바다로 향한다. 과거 어느 날 텐타클에게 끌려갔을 때, 해랑은 ‘더 깊이, 아래로 끌려갔다.’ 그때 심도계의 숫자가 올라가는 것은 곧 무력한 죽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는 다르다. 웅덩이 속, 알 수 없는 바다에서 맞는 마지막은 초라한 죽음일 수 없다. 무의미와 싸우며 버티던 해랑의 삶은 의미 있는 행위로 가득 채워졌다. 그가 쌓아온 의미들이 알 수 없는 바다 가장 깊은 곳으로 이어진다. 해랑의 삶이, 해랑이 쌓아온 의미가 완결되는 곳이다.
마지막 잠수 직전, 해랑이 듣던 라디오방송을 떠올려보자. 알 수 없는 바다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위치 관계를 바꾸어 보자는 가벼운 제안은, 위와 아래를 가늠하는 방향 감각을 슬쩍 뒤흔든다. 바다 깊은 곳을 향할수록 오히려 가장 높은 곳을 향하게 된다. 인간의 한계라고 알려진 심도5를 지나, 인간이 만든 장비로 계측할 수 없는 곳까지 해랑은 나아간다. 일순 초월적인 광경이라고 느껴지는 상승 속에서도 그는 의연하기만 하다.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아온 것처럼 지금도 그저 나아갈 뿐이다.
이 장면에서 “웅덩이 속 인어”는 사랑에 다른 특성을 부여한다. 몸과 마음을 바친 정열적인 사랑이 있는가 하면,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견고한 사랑이 있다. 함께하기 위해 모든 걸 내려놓고 달려가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을 충실히 살아내는 사랑이 있다. 형태는 달랐으나 사랑이라는 감정만은 같았다. 완전히 다른 궤적을 그린 두 개의 삶은 동일한 문장으로 귀결된다. 여기에 인어가 있어.
이것은 극적인 화해이며, 삶의 존엄성을 외치는 문장이다. 해랑은 아버지처럼 살기를 거부해 왔다. 영하와 만나지 않았다면, 승욱의 말이 아니었다면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마저 거부했을 공산이 크다. 살다가 문득, 아버지의 그림자를 느끼는 것이 전부였을 테다. 참으로 형편없는 죽음이라고 주마등처럼 떠올리는 날이 있었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써도 불쑥 튀어나오는 감정은 언제까지고 해랑을 붙잡았을 것이다. 여전히 어딘가에는 웅덩이가 생기곤 했으니까.
영하와 만난 뒤 해랑은 외면해온 감정을 마주해야 했다. 일상의 다른 부분은 돌보지 않은 채 알 수 없는 바다로 향하는 마음을 상상해야 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 해랑은 아버지를 용서했다. 아버지가 남긴 말을 마침내 온몸으로 이해했다. 동시에 그는 아버지와는 다른 선택을 했다. 끝내 같은 문장으로 이어졌으나, 이 문장을 만들어낸 동력은 달랐다.
아버지와 해랑의 삶이 하나의 문장에서 교차할 때, 해랑을 둘러싼 모든 것들의 성질이 변화한다. 의미를 알 수 없던 유언이 해랑의 마지막 말이 되고, 족쇄는 책임감이 되며, 죄책감은 자부심이 된다. 첫 장면, 어정쩡하게 스트레칭을 따라하던 해랑과 마지막 장면, 자신의 삶을 완수하고 마지막 잠수를 하는 해랑. 그 사이에 놓인 세월과 경험이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한때 발목에 족쇄가 채워진 것 같다고 느꼈던 해랑은 마침내 자유롭다. 그가 내린 결정은 아버지의 그늘 때문도, 인어에게 홀렸기 때문도 아니다. 처음에는 상실감과 그리움,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감만으로 평생을 살아갈 수는 없다. 위험에 뛰어들어 사람들을 구하고, 그러면서도 영하를 기억하는 일에는 반감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그 자리를 해랑은 자긍심으로 채웠고, 자신이 선택한 삶에 대한 책임감으로 지탱했다. 해랑은 영하를 사랑했지만 그를 만나기 앞서 해야만 할 일이 있었다. 흩어지는 시간을 한데 모아 자신의 삶을 만들어내야 했다.
아버지의 마지막은 승욱을 통해 단편적으로 전해졌으며 영하는 해랑이 이해하는 언어로 말하지 않았다. 누구도 해랑에게 설명해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해야 했다. 해랑의 처지를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누구도 그의 선택을 만류하거나 지지하지 못했다. 더 이상 무엇도 외면할 수 없었던 해랑은 고독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었다. 직접 쌓아올린 인생을 지키기로 했다. 그의 삶을 그만의 방식으로 마무리할 때까지. 이야기는 온전히 해랑의 내면에 집중한다.
알 수 없는 바다를 헤엄치는 해랑의 모습은 내면을 탐색하는 행위와도 닮아 있다. 어느 하나가 눈에 보인다면 그 아래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 웅덩이 속에 바다가 있었듯 인간의 내부에는 정신이라는 커다란 공간이 있다. “웅덩이 속 인어”는 해랑이라는 인물의 삶을 이야기에 담으면서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고스란히 포착했다. 사물의 이면을 섬세하게 포착하며 자유와 존엄성을 아름답게 그려냈다.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단숨에 읽어내려간 독자는 생각할 것이다. 여기에 삶이 있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