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무엇을 착취하며 살아가나 비평

대상작품: 가난한 나라의 전기영혼 자전거 (작가: 박길형제KJTJ, 작품정보)
리뷰어: 드리민, 3시간전, 조회 3

<드픽 검색어 큐레이션: 영혼> 선정작입니다.

https://britg.kr/reviewer-novel-curation/196906

 

“영혼은 착취의 대상이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나열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만, 그것들을 종합하면 사실상 서로 쌍을 이루는 두 개의 단어로 귀결됩니다. 하나는 ‘소외’요, 다른 하나는 ‘착취’입니다. 자본주의는 자본의 극대화를 위해 노동자를 착취하고, 노동자는 그 결과로 소외됩니다. 그렇다면 노동자를 착취하고 노동자가 소외된다는 것은 정확하게 무슨 의미일까요? 마르크스는 ‘노동 소외’를 단순히 ‘노동자들의 연대가 끊어져 외톨이가 되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노동 소외는 ‘노동자가 자신의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노동 소외’는 다시금 네 가지 형태로 세분됩니다. 첫째,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생산물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자동차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일했다고, 완성된 자동차나 그 부속품 하나조차도 가질 수 없죠. 둘째, ‘노동 과정으로부터의 소외’. 노동자는 자본가가 정한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에 종속될 뿐, 자신이 직접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를 조정할 수 없습니다. 셋째, ‘인간 본성으로부터의 소외’. 노동자는 인간 본연의 의식적인 움직임과 창조성을 발휘하는 대신, 남이 정해준 움직임에 종속되어 창의적 발상이 억제됩니다. 넷째, ‘동료 인간으로부터의 소외’. 노동자는 각자의 노동에 종속되어 유대감을 상실하거나, 혹은 더 많은 자본을 얻기 위해 타인과 무한히 경쟁하게 됩니다.

소외,  ‘자 삶에서 멀어진다’라는 것은 이는 달리 말하면 자신의 본성에서 멀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과연 무엇인지는 다양한 정의가 있겠지만, 그들은 ‘인간성’이라는 용어로 함축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성으로부터 멀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인간이 아니게 됩니다. 인간이 아닌 인간, 물건 같은 인간이 됩니다. 따라서 ‘노동 소외’는 곧 자본가의 명령에 따라 인간성을 상실한 채 노동하는, 자신의 의지대로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위하여 노동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인간이 노동을 지배하는 상태가 아니라, 노동이 인간을 지배하는 상태이지요.

 

박길형제KJTJ 작가님(들)의 작품 <가난한 나라의 전기영혼 자전거>는 어느 가난한 나라에 나타난 과학자 말콤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는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캥거루 리타를 조수로 데리고 다니며,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에게 전기를 만드는 자전거를 선보입니다. 이를 ‘전기영혼 자전거’라고 명명한 말콤은 사람들에게 이것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전기를 생산하여 돈을 벌 수 있도록 해주었죠.

그러나 전기영혼 자전거는 공짜가 아니었습니다. 전기영혼 자전거를 가지려면 빚을 내야 했죠. 게다가 전기영혼 자전거가 하나둘 퍼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너도나도 전기영혼 자전거를 사기 시작했습니다. 전기영혼 자전거의 페달을 더욱 열심히 밟으면, 실제로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전기영혼 자전거를 선보인 말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르겐은 사람들을 대표하여 전기영혼 자전거가 이상해졌다고 말합니다. 리타와 말콤은 유르겐과 사람들의 주장을 그들의 탓으로 돌리며 일축했습니다. 그들이 전기영혼 자전거를 받았을 때보다 노화했기 때문에, 자연히 전기 생산량이 줄어든 것이라고요. 유르겐을 대신해서 자리에 나선 소피가 계속 항변하자, 리타는 유르겐의 전기영혼 자전거를 압수합니다. 이에 더해 유르겐의 집에서 전기영혼 자전거를 가져오는 사람들에게 한정판 신형 전기영혼 자전거를 주겠다고 말하죠.

 

짧은 이야기지만, 이 안에서는 마르크스가 제안했던 네 가지 노동 소외를 전부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전기영혼 자전거를 돌리는 사람들은 실제로 전기와 부를 얻었지만, 그것을 오롯이 갖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전기영혼 자전거를 위해 빚을 내었고, 전기영혼 자전거는 언제든지 압수당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사실은 그렇게 만들어진 전기의 일부는 말콤이 빼돌리고 있었다는 게 공개됩니다. 둘째, ‘노동과정으로부터의 소외’. 사람들이 아무리 열심히 전기영혼 자전거를 돌려도 그들은 말콤이 정한 한계를 넘지 못합니다. 오히려 조금씩 말콤이 전기를 빼돌리고 효율을 줄여도 어찌할 수 없는 상태가 되지요. 셋째, ‘인간 본성으로부터의 소외’.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은 전기영혼 자전거의 페달을 밟지 않고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가족 중 누군가는 페달을 밟아야 하죠. 다른 일들을 할 수 있음에도, 그러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넷째, ‘동료 인간으로부터의 소외’. 유르겐과 소피의 항변에 말콤과 리타가 나서서 협박하자 사람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게다가 유르겐의 전기영혼 자전거를 빼앗아오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겠다고 말하자, 그들은 서로 경쟁하고 이웃을 공격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앞서 ‘소외’란 ‘인간이 인간성을 잃고, 자신의 삶에서 멀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성이라는 것은 조금 비틀면 영혼으로 비유하여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소외’와 쌍을 이루는 단어는 ‘착취’입니다. 노동자들의 소외는, 자본가의 착취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동 소외는 곧 노동 착취이며, 노동자들의 인간성 상실은 그들의 영혼이 상실되는 것과 동치됩니다.

큐레이션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결국 자본주의가 착취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영혼입니다. 자본주의에서 소외되는 것은 노동자들의 영혼입니다. 전기영혼 자전거에서 만들어지는 전기는 영혼을 대가로 삼는 것입니다. 말콤과 리타가 빼돌리는 것은 전기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영혼입니다. 김성호 작가님의 <선풍기 키우기>에 대해 적은 리뷰 <멈추지 않는 전기, 공회전하며 누적되는 열>에서 서두에 “영혼은 사람이 전기가 부여하는 것이다.”라고 고쳐 쓴 것은, 비록 맥락이 다르지만 여기서도 거의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영혼을 대가로 하여 만들어진 전기가, 이제는 영혼을 지배하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가 진정으로 착취하는 것이 영혼이라면, 우리는 영혼이 고갈된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바로잡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공산주의가 실패한 이론이라고 취급받음에도, 영혼을 착취당하는 자들인 입장에서 마르크스의 주장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을 표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짧은 우화입니다만, 마르크스가 주장한 노동 소외를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이야기의 가치는 높다고 봅니다. 좋은 이야기를 적어주신 박길형제KJTJ 작가님(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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