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람을 살리고 내가 대신 죽을 수 있다면.
영화나 드라마, 소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소중한 누군가를 잃고 남겨진 사람들이 절망, 회한, 후회, 미련을 갖고 하는 생각이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가 없기 때문에 sf영화가 아닌 이상 생각만으로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내가 죽은 누군가를 대신해 죽고, 내 목숨과 맞바꾸어서 망자를 다시 살려낼 수 있다면?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당장 삶을 맞바꾸겠다고 나서지 않을까.
그러나 지민은 약간 입장이 다르다. 가정폭력을 휘두른 남편이 사고로 죽고 난 뒤, ‘네가 죽었어야지’라며 시어머니가 지민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네가 대신 죽었어야지’라며 끊임없이 연락해오는 시어머니. 지민은 그녀가 자기 몰래 큐브에 ‘대신의 삶’ 서류를 접수했을까 전전긍긍한다. 지민은 절대 가정폭력을 휘두른 남편을 대신해 죽을 생각이 없었으므로. ‘대신의 삶’ 접수 콜센터에서 일을 하지만, 접수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대신 죽지 말라’, ‘살아가라’고 말할 정도로 지민은 삶에 대한 의지가 충만하다. 그게 독이 되어 해고되긴 했지만.
나는 아직 그런 경험이 없다. 그래서 더욱 이렇게 냉정하게 말할 수 있는 지도 모르겠다. 죽은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삶은 이미 끝났다. 그걸 다시 되살리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되살아난 사람들이 그걸 마냥 반기기만 할지도 의문이다. 누군가를 대신해 삶을 맞바꾸겠다고 결정한 것은 그만큼 서로가 소중했던 관계라는 것인데, 되살아난 사람이 소중한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되살아나고 싶다고 생각하겠는가 말이다. 시절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이런 상황을 정확하게 일컫는 표현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비슷하지 않을까. 이미 그 사람과 함께 했던 시간은 흘러간 시간이다. 그걸 되돌릴 수 있는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추억하고 애도하며 기억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거기에 미련이나 집착을 가지는 순간, 내 삶 또한 망가지기 십상이다. 대신 죽어주고 싶고 내 삶을 다 주어서라도 그 사람이 살았으면 좋겠다는 심정은 알겠으나 이미 그 사람과의 연은 끝난 것을.
결말에서 밝혀지는 ‘대신의 삶’ 실체를 깨닫고 지민은 복잡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음과 동시에 실소를 터뜨린다. 보통 대신 살아주겠다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내가 대신 죽고,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 그 사람의 인생을 다시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그 관념을 완전히 깨부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결국 삶은 누구에게나 하나뿐이며, 그래서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고, 자신만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신의 삶’을 위해 서류를 접수한 ‘다수의 사람들’과 ‘지민의 시어머니’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는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남을 대신해 죽은 사람, 남을 대신해 되살아난 사람보다는 상처를 한가득 끌어안고 살아갈지라도 온전히 본인 몫의 삶을 사는 지민이 훨씬 행복할 거라는 걸.
누군가를 대신해 살아간다는 게 과연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보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