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復活)

작가

لَا أُقْسِمُ بِيَوْمِ الْقِيَامَةِ 공모(감상) 브릿G추천

리뷰어: 난네코, 7월 31일, 조회 86

لَا أُقْسِمُ بِيَوْمِ الْقِيَامَةِ

부활의 날을 두고 맹세하사

 

 

 

 

 

목차

1. 시작하는 말

2. 용서하는 말

3. 해석하는 말

 

 

 

 

 

 

 

1. 시작하는 말

 

안녕하세요. 브릿G 정기리뷰단 31기에 선정된 추천리뷰어 난네코입니다. 정기리뷰단으로서 제 임기는  2024년 8월 1일부터 2024년 10월 31일까지입니다. 제 임기의 시작보다 하루 더 앞서서, 소개하고 싶을 정도로 뿡아 작가님은 위대한 대문호 입니다. 2024년 7월 31일 기준으로 뿡아 작가님께선 17편의 중단편 소설들과 엽편 소설들을 업로드 하셨습니다. 2022년 8월에는 <가장 더웠던 여름> (엽편, 28매), 2023년 5월엔 <너도 당해봐라> (중단편, 42매)과 브릿G 계약작인 <5월의 엉망진창 로맨스> (중단편, 110매)와 <슈뢰딩요그루타볼츠스키노스밀리아프글루코사쥴리비아스까르보나밀리엄귀르텡부르야크월츠제네거의 햄스터> (엽편, 12매)를 업로드하셨습니다.

그리고, 2023년 6월엔 <위고돈씨의 사탕가게> (엽편, 19매)를 업로드했으며, 2024년 1월엔 <속죄> (엽편, 10매), 2024년 2월엔 <네스 – 퀵!> (중단편, 31매), 2024년 3월엔 <줄> (중단편, 70매)과 <부활(復活)> (중단편, 76매)과 <발톱 70년째 기르는 중> (엽편, 13매)과 <이상한 문자가 와서 지웠다> (엽편, 8매)와 <예언의 서> (엽편, 23매)와 <전교 1등의 무서운 비밀> (중단편 43매)를 업로드하셨고, 2024년 5월에 <하마> (엽편, 6매)를, 2024년 6월에 <연기> (엽편, 5매)를, 2024년 7월에 <시작> (엽편, 13매)과 <라면 먹는 남자> (엽편, 6매)를 업로드하셨습니다. 거기다, 뿡아 작가님께선 리뷰어로서 14개의 리뷰글을 작성하셨고, 그 중 10개의 리뷰가 브릿G 추천리뷰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저는 뿡아 작가님에 대해서 다작, 다독을 하시는 위대한 대문호라고 감히 치켜세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브릿G 31기 정기리뷰단으로서 임기의 시작은 뿡아 작가님의 소설을 리뷰하는 것으로 첫단추를 꿰매고 싶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물론, 제가 이 리뷰글을 쓰게 된 경위는 뿡아 작가님의 소설 <부활>을 우연히 읽고, 또 다시 반복해서 읽으면서 이 작품이 몹시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용서받지 못할 줄 알았는데 용서받았다. 그는 사람을 죽였다. 내 아버지의 아버지를. 어찌 그가 용서받을 수 있단 말인가. – 카바드 알 아히르로 시작하여 “그는 그 모두를 용서했단다.로 끝나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제 심금을 울렸습니다.

저는 굉장히 감성적인 인간이라서 좋은 문장을 발견하면 거기에 꽂혀버리는 버릇이 있습니다. 하여, 제 마음을 움직인 뿡아 작가님의 아름다운 소설을 리뷰글로 하여금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리뷰글은 뿡아 작가님께 감사의 마음으로 봉헌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브릿G에서 활동하고 계신 문학가 분들께 고지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진심이 이 리뷰글을 읽는 모든 분들께 닿길 바라며, 글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2. 용서하는 말

 

뿡아 작가님의 <부활>에선 ‘용서’가 작품의 핵심적인 주제어입니다. ‘용서’의 사전적 정의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줌’입니다. 배상, 행위, 구원이라는 단어도 용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뿡아 작가님의 <부활>에 등장하는 인명은 이슬람권에서 사용하는 이름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이슬람에선 신앙뿐만 아니라, 행위도 중요하게 여기는데, 행위는 구원의 조건입니다. 또한, 이슬람 이전시대 부족 관습법으로 ‘사람을 살해하거나 상해한 것에 대한 배상(금)’인 디야가 있는데, 디야는 이슬람 이후 샤리아 규범으로 정착했고, 일부 내용은 부족주의가 강한 이슬람국가의 형법에 현존함으로써 역사성과 실효성이 있습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년~1975년)에게 있어서 ‘행위(action)’란 기존의 세계에 새로운 누군가가 태어나는 것처럼 ‘새로운 시작’ 활동으로, ‘행위’는 인간적인 의미에서의 불멸을 가능하게 하는 활동이며, ‘행위’는 여타의 다른 활동과 달리 복수적이며 다원적인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 하는 관계적 혹은 상관적 활동입니다. 아렌트는 궁극적으로 용서하고 또 용서하며 계속해서 용서하는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므로 “행위하는 사람은 누구나 용서할 준비를 해야 하며 (용서하는 사람은 누구나 실제로 행위를 하고있다) (…)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행위를 멈출 수 없기에, 우리는 또한 용서하기를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한다.”라고 합니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용서하다’라는 말인 aphienai는 ‘잊다’, ‘놓아주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무조건적인 용서나 사랑을 명시적으로 배제하는데,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완전히 받아들이고 그가 무엇을 하든 항상 기꺼이 용서하는 까닭에 사랑만이 용서의 힘을 가진다면 용서는 우리가 고려할 수 없는 것이 된다”고 언급합니다. 또한, 용서란 정치적 우애, 즉 필리아 폴리티케(philia politike)나 존중(respect)을 구현하는 ‘세계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용서란 되돌릴 수 없는 과거와 불확실한 미래에 현재라는 틈을 만들어내는 것이므로, ‘행위’로서 용서는 수단이 아닙니다.

 

 

 

3. 해석하는 말

 

(p. 98). ‘카바드는 혼란스러웠다. 누가 보더라도 이 상황에서 먼저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은 ‘그’였는데, ‘그’는 따귀를 때린 카바드를 그 자리에서 서둘러 용서해 버림으로써 도덕적 우위를 점해버린 것이다. 용서를 선수치기 당한 카바드는 모멸감을 느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먼저 용서를 해버리는 건데 ··· 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났지만,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이 지금껏 살아온 목표를 되새겼다. 카바드가 보기에 ‘그’가 해야 할 것은 용서가 아니라 사죄였다. 아니, 카바드에게 필요한 것은 사죄가 아니라 단순한 응징일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카바드는 순간,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이 무엇인지도 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망망대해에서 정처 없이 표류하는 배처럼 말이다.’

 

뿡아 작가님의 <부활>에서 ‘용서’는 도덕적 우위를 점해버리기 위해서 이용하는 행위이자 정치적인 수단처럼 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모진 고통과 죄악과 고행에서 벗어나 진정한 내면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aphienai(잊다, 놓아주다) 같기도 합니다. 어느 쪽으로 해석하더라도 작품을 읽는데 큰 차이는 없을 것 같습니다. 행위로서 용서는 수단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구원으로서 용서는 정신적으로 존중받기 위한 배상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리뷰어 난네코의 해석일 뿐입니다. 저는 문학 작품을 읽고 해석하는데 있어서 정합적으로 합치된 정답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여러분께선 저랑 달리 여러가지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활>의 마지막에서 그가 모두를 용서함으로써, 행위니 구원이니 하는 것들에서 초월했다고 생각합니다. 인과응보로써,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게 됩니다. 단순한 수준의 응징보단 평화가 더 소중할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 또는, ‘쇠퇴하거나 폐지한 것이 다시 성하게 됨. 또는 그렇게 함.’ 혹은, ‘『기독교』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을 떠난 예수가 자신의 예언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일.’이라는 뜻을 가진 부활이라는 제목에 걸맞는 결말이 바로 용서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줄로 요약하자면, 저는 뿡아 작가님의 중단편 소설 <부활>은 진정한 의미의 해피엔딩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헤아릴 수 없는 분노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용서는 분노를  잠재우고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오늘 하루를 의미있게 보내지 못함에 좌절할 필요도 없고, 모욕을 당했다고 반드시 응징을 가해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해석한 <부활>의 참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소설을 써주신 뿡아 작가님께 마음 깊이 배례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