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그리아 왕국의 시간을 되돌리며 [팬픽] 의뢰(감상) 브릿G추천

리뷰어: JIMOO, 5월 15일, 조회 69

모든 것이 끝나고, 육체와 영혼의 연결이 끊어지면서 짊어지고 있던 오랜 통증은 사라졌다. 이스카는 그걸로 그럭저럭 만족했다. 이루지 못한 바람들은 내려놓자. 죽어서도 후회만 하는 영혼은 너무한다. 노력으로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걸 배우는 시간이었다. 다 버려도 좋으니 하나만 되돌려 달라 신에게 빌던 간절함도 놓고 가자. 끝이 나긴 하는구나. 마지막을 맞이한 이스카는 저승과 이승 경계에서 시간의 정령을 만났다.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시간을 되돌릴 수 있어? 그런 게 정말로 가능해? 가장 먼저 떠올랐던 그리운 얼굴을 밀어내고 이스카는 소중했던 다른 사람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행복했던 시간만 반복하며 살아간다면 좋겠다.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고, 병들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고, 걱정도, 미움도, 증오도 없이 좋은 것만 주고받고 싶던 생각은 역시 건강하지 못하고 나약한 마음 때문이었을까?

그가 특별히 약해 빠진 인간인 건 맞다.

누구나 그런 생각은 하지 않나? 시간이 흐르지 않고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이스카가 사람의 귀중함을 몰라서 누리지 못한 건 아니었다. 시간 하나하나를 붙잡고 싶다. 행복에 겨워 잃어버릴까 두려웠고 그 두려움은 끔찍한 현실이 되었다. 약점이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는데 마음은 무거웠다.

더 잘 해주고 싶었어. 모두에게. 그리고 누르자한에게. 무슨 말이라도, 아무 말이라도 전하고 싶다. 말없이 온종일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겠다. 모르는 사람으로라도 좋다. 그건 좀 서운하려나. 이스카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아직 무엇도 말하지 않았다. 얼마만큼 가능하다는 건지 몰라서 조바심이 났다.

그 소원엔 어떤 대가가 필요하죠? 난 이제 가진 것도 없습니다. 죽은 자의 영혼에게서 무엇을 가져가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내 영혼도 산산조각 내겠습니까?  

시간의 정령은 고개를 저었다. 대가는 이미 치렀습니다. 삶 속에서 어떻게 발버둥 쳤는지를 본 것으로 충분합니다. 시간의 정령이 이스카의 등에 손을 대자 그들은 어딘가로 이동해 있었다. 특정 시간대에 갇힌 그들의 모습은 평온하고 좋아 보였다. 당신의 바람대로냐 묻는 시간의 정령에게 이스카는 그렇다 말했다. 고장 난 시간 속에서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건 씁쓸했다. 흘러가는 삶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우리는 왜 서로를 상처 주며 살아야 했을까? 

이젠 됐습니다. 

이스카는 저승으로 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설마 더한 고통이 기다리고 있으려나? 그건 좀 두렵다. 영원히 쉴 수 있다면 좋겠다. 아무 생각도 떠올리지 않고, 감정 없이, 꿈도 없이. 

만나고 싶지 않습니까? 

누구를 말입니까? 

이스카는 시간의 정령이 묻는 알 수 없는 말에 감정을 억눌렀다. 고통이 사라진 게 아니었나.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심장도 없는 주제에. 이스카는 누르고 누르다 참지 못하고 뱉어냈다. 

누르자한은, 만날 수 없지 않습니까?

이젠 그만 나를 보내주십시오. 당신도 사악한 정령들처럼 괴롭히는 것이 목적입니까? 

가능하다면요. 가보겠습니까? 

시간의 정령이 하는 말을 듣다가 이스카는 시야가 뜨겁고 뿌옇게 흐려졌다. 이상했다. 

나는 육체가 없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며 피부 촉감과 심장으로 느끼고 머리로 생각한다 믿습니다. 그렇지만 그건 모두 그들의 영혼이 하는 일입니다. 어느 이들은 장애가 있어도 영혼으로 보고 듣고 표현합니다.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아도 못 듣고 못 보고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듯이 말입니다. 

공간 흐름이 달라졌다. 누르자한을 처음 보던 순간부터 누르자한이 죽기 직전까지 이스카와 누르자한의 수많은 순간이 담긴 거울의 문이 그들의 주변을 둘러싸며 생겨난다. 

어느 순간으로 가보겠습니까? 

저기, 그냥 보고만 오는 겁니까? 

거짓말 같이 마주할 순간을 열망하며 평생을 버티고 살아왔는데 막상 마주할 수 있다고 하니까 도망치고 싶어졌다. 존재하지 않는 환상 같은 거라면, 망설일 이유는 없다. 그렇게라도 볼 수 있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삶을 되돌리는 거라면? 누르자한이 죽음을 겪고 영혼이 부서지는 순간까지 다시 겪어야 하는 거라면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그녀가 고통당하는 것도 싫고, 무엇보다 이스카는 감당할 수 없었다. 간절한 눈으로 반짝이는 추억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만나던 누르자한이 서 있는 문에 다가가, 그녀의 머리카락이라도 만져보고 싶어 손을 내밀다가 얼어붙는다. 

이스카는 울기 시작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나아갈 수 없다.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아서 사라져 버리고 싶었지만 여기서 더 어디로 사라진단 말인가 그것도 모르겠다. 이미 이곳은 그가 갈 수 있던 지경의 끄트머리였다. 

 용기를 내면 갈 수 있다. 용기인지 만용인지는 모르겠다. 충분한 시간을 가지라고 고민하게 두었다면 이스카는 시간이 지속되는 동안 영원히 이렇게 고민만 하고 있었을 것이다. 

못 하겠습니다. 저를 그만 저승으로 보내주세요. 그녀를 고통스럽게 하고 싶지 않고 저는 그런 그녀를 보는 것이 두렵습니다. 마지막까지 왜 고통을 주는 겁니까? 나는 고통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까? 신께서 그런 목적으로 날 창조한 겁니까? 그런 거라면 차라리 어머니 태중으로 돌아가서 태어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게 낫겠습니다. 

기회가 있는데 버리겠단 겁니까? 모든 것을 바로 잡고 되돌릴 기회요. 

정령의 말에 이스카는 멈칫하며 겨우 고개를 들었다. 울어서 엉망이 된 얼굴은 복잡하게 고뇌하고 있었다. 

바꿀 수 있나요? 바꾸지 못한다면요. 만나고 싶지만 과거를 그대로 되풀이하고 싶진 않습니다. 

진정해요. 이스카. 지금 하는 그 말들이 당신의 소원이었습니까? 누르자한을 잃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고 죽지 못해 사는 순간도 분명히 있었겠지만요. 계속 싸웠잖아요.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요. 다 잃었습니다. 나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죠? 

많은 걸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바라만 보기만 하는 것도 좋지요. 바람 불고 하늘이 좋은 날엔 손을 잡고 꽃길을 걸어보세요. 당신은 그 이상한 춤을 추고 그녀가 웃는 걸 볼 수도 있겠죠. 별것 아니지만 살아 있어야 할 수 있는 작고 중요한 일들이요. 마지막 기회를 놓칠 겁니까? 꿈에서도 울면서 기도했던 걸 알고 있어요. 당신의 살아있는 모든 순간에는 그 기도가 있었습니다. 바꿀 수 있다면 모든 걸 되돌리고 싶다면서요.

……맞습니다. 

그만둘 건가요?  

아니요. 해보겠습니다. 

이스카는 주저하다 대답했다. 언제로 돌아가야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심을 내렸다. 기왕이면 처음이 좋겠다.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그때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형, 동생에게 잘 해줄 겁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망설이며 해주지 못했던 것들 전부 하고 살겠습니다. 누르자한을 일찍 만나서 곁에 두고 제가 가진 모든 재능을 써서 왕국을 떠나 그녀와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그래도 정해진 운명이 다가와 끝이 좋지 않게 된다면 후회하지 않도록 매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기적 같은 날이라고 생각하며 살겠습니다. 

잘할 수 있을까요? 

굳은 다짐을 반짝이는 눈으로 전하던 이스카는 갑자기 자신감이 줄어들었는지 또 망설였다. 시간의 정령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못 말리게 답답한 사람이다. 

살아보세요. 당신이 생각하고 그리는 대로. 간절했던 그대로. 전생에서 바닥을 치며 울었던 시간만큼 기쁘게 살아봐요. 새로운 삶을 응원하며 지켜보겠습니다. 다음 생이 끝나고 만날 땐 기뻐서 우는 이스카를 보고 싶네요. 

이스카는 눈물을 글썽거리다가 시간의 정령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의 방향이 엇갈리는 어색한 악수를 하고 그는 훌쩍 떠났다. 이번에야말로 모든 망설임과 겁을 내려놓고, 가는 듯했으나 들여다 보니 이스카는 이스카였다. 그는 다르게 살아보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이스카로서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이전과 완벽하게 같지 않을 것이다. 

넘어지고 아프긴 하겠지. 그만큼 용감하게 일어서길. 

 

 

 

 

“어떻게 되었나.”

여차저차해서 이렇게 되었습니다, 시간의 정령은 저승에 있는 여왕에게 말해주었다. 

“이스카. 이 바보 같은 녀석은, 바뀌지를 않아.” 

여왕은 그리운 얼굴로 웃었다. 그녀는 자기 자식들에게 평등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스카에게는 조금 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정령들을 상대해야 하는 비슷한 아픔 탓인지, 누르자한을 죽게 했다는 죄책에서 오는 마음인지 모른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궁금하군.” 

이스카가 이런 소원을 빌었습니다. 시간의 정령은 뒷말이 더 있는데 의도적으로 생략하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여왕은 영문을 모르고 심기 불편한 얼굴이 되었다. 

“부러우십니까?”

“뭐 조금?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였던 적은 없었으니까. 그게 마음에 걸리기는 해. 지난 일이니 어쩔 수 없지.”

“그럴까요?”

시간의 정령은 그를 매우 수상한 눈길로 관찰하고 있는 여왕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힘껏 밀어버렸다. 여왕의 영혼은 어딘가의 공간으로 날아가 하늘에서부터 추락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런 젠장!!!!!! 망할 놈의 정령!!!!!! 무슨 짓을 한 거야?!!!!!! 

여왕은 씩씩거리며 눈을 떴다. 

 말 그대로 눈을 떴다. 풍경이 들어온다. 익히 아는 것들이었다. 그녀의 배는 불러있었다. 영안이라도 트인 건지 뱃속에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복잡한 궁리를 하고 있는 이스카의 영혼이 보였다. 하도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실실 튀어나왔다. 시종들이 놀라다가 시선을 피한다. 여왕은 거울을 보지 않고도 알 수가 있었다 살면서 지어본 적 없는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였다. 

 

 

*

시간의 정령이 다녀가고 행복한 시간의 루프 안에 갇힌 영혼들은 고민을 마쳤는지 연이어 날아올라 빛무리처럼 그 차원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인생을 바꾸어 보고 싶어 했다. 욕망보단 행복을, 사랑을, 순간을, 무너질 왕국을 차지하기 위해서보다는 이미 가졌던 것을 더 잘 누려보기 위해서,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좋은 추억을 주었던 이들에게 집중하기 위해. 

 하그리아 왕국의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PS. 하데스가 그래도 된다고 허락했다고(아무 말 하기)……

제 마음대로의 팬픽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난네코 작가님의 <하그리아 왕국> 많이 읽어주시길!! 

 

*참고로 이스카의 이상한 춤이 궁금하시다면?

리뷰어 청심님의 멋진 팬아트를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청심 <천재 왕자님도 못하는 것이 있다고요>
https://britg.kr/novel-review/1957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