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글, 사진과 동영상. 특정한 시간을 붙잡아 두기 위해 인간이 연구한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었으며, 그 방법 또한 다양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보낸 하루, 친구와 즐겁게 놀았던 추억, 뜻밖의 감동과 기쁨으로 가득한 순간을 시공간 그대로 저장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사실에 가까운 그림을 그리며, 자세하게 일기를 쓰며,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남기며 그래도 가장 비슷한 장면을 기록하고자 한다.
한없이 현실적인 방법으로 과거를 추억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 그 당시에 느끼던 감각의 똑같은 재현이라고는 볼 수 없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당분간은, 그럴 수 없으리라는 것 역시 자명하다. 그래서인지 기억을 온전히 저장하고 재현하는 상상은 여러 환상 콘텐츠에서 종종 다뤄지곤 한다. 과거에는 그림과 글로,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는 마법으로,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는 가상 현실로. 기록 장치와 형태가 무엇이든 인간은 불가능한 ‘시간’의 보존을 위해 무한히 상상했다.
최근의 콘텐츠, 특히 ‘애니메이션’에서 눈에 띄는 기록 보관법은 ‘구슬’이다. 구슬은 묵직한 무게감을 주고, 어떤 재료로 만드는지에 따라, 색과 크기에 따라 묘한 신비감을 주기도 한다. ‘무게감’은 형체가 없는 ‘기억’에 물성을 부여하고, ‘신비감’은 평범한 구슬에 비현실성을 덧씌운다. 픽사의 대표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 시리즈는 ‘기억 구슬’을 등장시켜 사람의 성격이 기억에 어떤 영향을 받는지를 감각적으로 설명한다. 구슬에 저장된 기억의 상태에 따라 인물은 크게 영향을 받는다. 찰나의 감정으로 지나가는 듯 추상적인 시간은 ‘구슬’이라는 단단한 몸을 얻어 구체화한다.
디즈니 100주년 기념작인 애니메이션 〈위시〉에도 이와 비슷한 ‘구슬’이 등장한다. 디즈니의 이야기 역사는 이 영화에서 개인의 ‘추억’으로 표현된다. 100년 동안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을 본 사람들, 그리고 애니메이션 안에서 살아 움직인 캐릭터들은 저마다의 기억을 쌓는다. 《인사이드 아웃》 시리즈의 구슬이 감정에 기반한 ‘기억’이라면 〈위시〉의 구슬들은 ‘추억’에 가깝다. 동심을 위한 애니메이션 제작을 100년이나 이어온 창작진들의 시간 안에서 수많은 사람과 인물이 울고 웃었다. 이처럼 구슬은 소중한 추억을 저장하기에 맞춤인 물건이다.
여기 구슬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물건들로 잔잔한 추억을 회상하는 사람이 있다. 잠에 들었는지, 정신을 잃었다 깼는지 알 수 없는 주인공 ‘나’의 앞에는 그의 기억에 없는 공간이 펼쳐져 있다. 겹겹이 쌓인 선반이 그를 둘러 에워싸고, 칸마다 알 수 없는 모양의 조형물이 빼곡히 진열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사람이 쓰러져 있다. 여긴 어디지, 보아하니 그와 나이가 비슷한 할머니다. 죽은 줄 알았던 할머니의 곁에서 조금 불안하게 서 있으니 다행히 그녀는 정신을 차린다. 그리고는 ‘나’에게 말한다.
또 왔어?
오메르타 작가의 단편 〈다시 찾을 테니까〉는 ‘기억의 저장’이라는 주제로 짧게 쓰인 엽편이다. 순우리말 소일장 참여작이기도 한 이 소설은, 환상적인 공간에서 주인공 ‘나’의 과거와 미래가 조우하는 과정을 담는다. 과거의 ‘나’가 미래로 가고 싶어서 움직인 것도, 미래의 ‘나’가 과거의 ‘나’를 만나기 위해 움직인 것도 아니다. 그저 둘은 ‘우연히’ 만난다. 이 우연한 만남은 서로의 정체를 숨긴 채 낯선 환경을 조성한다.
물론 미래의 ‘나’는 과거의 ‘나’가 반복해서 그곳에 찾아온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그녀는 아마도 최초의 자신부터 일평생의 성장 과정을 지켜봤을 것이다. “갈수록 자주 오네. 슬슬 끝이 보이는가”라는 말을 통해 나이를 먹어갈수록 과거와 미래의 ‘나’가 만나는 빈도가 높아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장면에서는 안타깝지만, 그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이 암시된다.
이 소설에서 ‘나’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구슬’이 사용되지는 않지만, 그와 비슷한 물건이 나온다. 두 명의 ‘나’가 만난 공간에는 ‘기억’을 저장하는 듯한 조형물이 전시되어 있다. ‘여러 가지 것’이라는 불분명한 표현으로 정확한 형태를 알 수는 없지만, “동그란 것, 네모난 것, 삐죽한 것, 붉은 것, 하얀 것, 어두운 것, 밝게 반짝거리는 것”처럼 모양과 색깔이 다양하다. 아마도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에서처럼 기억이 생길 당시의 상황과 분위기, 감정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이 물건들은 단순히 기억을 ‘보관’할 뿐 아니라 그것을 다시 꺼내 재생하는 기능도 있다. 이는 곧 그것들이 훼손되었을 때, ‘나’의 기억 또한 영구적으로 복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미래의 ‘나’는 그것들을 통해 그녀의 과거 기억을 불러낸다. ‘나’에게는 즐겁고 행복한, 아프고 슬픈, 포근하고 아린 기억이 있었다. 이제는 가까운 미래가 되어 버린, 나이 많은 자신 덕분에 ‘나’는 잊었던 추억까지 되찾는다. 잊은 기억을 되찾은 ‘나’에게 미래의 그가 ‘행복한 삶’을 살라는 짧은 위로의 메시지를 남기며 이야기는 끝난다.
이렇게 입체적이고도 매력적인, 때에 따라 날카로운 위기감을 조성할 수 있는 물건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행복’이라는 단순하고 추상적인 메시지만을 던지며 끝나는 것은 의아하다. 물론 이 소설이 ‘순우리말’ 소일장 참여작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한자와 외래어를 쓰지 않고 이야기를 길게 진행하는 데에 창작자로서의 어려움이 있었을 듯하다.
소일장이 종료된 지금, 이 소설은 ‘인생’을 이야기하기에 좋은 소재다. 말하자면 미완된 이야기의 원형인 셈인데, 배경과 소재를 해치지 않고, 중단편 또는 장편으로 개작할 여지가 충분하다. 특정한 빈도로 과거와 조우하는 미래의 주인공. 그들이 만나는 공간과 시간의 모든 설정이 불투명하지만, 작가의 세심한 조율을 거치면 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불완전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앞으로가 기대되는 단편을 만난 독자로서, ‘이야기’가 ‘작품’이 되기 위해 채워져야 할 것을 인물과 사건, 배경의 순서로 짚어보고자 한다.
그러니까 아무 걱정 말고
이 엽편의 등장인물은 두 명이다. 다른 시간 선상의 같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한 명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서로를 마주하고 대화하고 있으니, 둘은 다른 사람이다. 소설의 분량상 두 인물에 대한 정보는 현재로서 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들의 인생과 삶은 기억을 저장하는 물건 안에 단편적으로 새겨져 있을 뿐이다. 만약 이 소설에 부피를 더한다면, 파편적으로 나뉜 기억에 의미를 불어넣을 연속된 인생이 필요하다. 인물로서 ‘나’에게는 현재 전사(前史)가 부재한다.
미래의 ‘나’는 과거의 ‘나’에게 “잊은 것들”을 보여준다. ‘잊은 기억’이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생기지만, 특정한 이유로 생기기도 한다. ‘나’에게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럽거나 괴로운 기억이 선반에는 보관되어 있을 수도 있다. ‘기억 상실’이라는 관습적인 소재를 고려할 때, 어쩌면 ‘나’는 치매 노인일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행복한 기억을 붙들어 둘 수 있는 이 장소가 한없이 소중할 것이다.
‘나’에게 기억은 일반적이지 않다. 어쩌면 그녀는 중요한 기억을 잊은 게 아닐까. 그녀에게는 ‘어떤 이유로’ 기억을 저장할 공간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소설 안에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인물의 가장 큰 특징을 설명하는 데에 필요한, 중요한 단서다. 기억 저장소는 그녀에게 삶의 의미를 일깨워야 하기 때문이다. 핵심 주제는 인물과 긴밀히 연관되어야 한다. 왜 ‘나’의 기억은 저장되기 시작했을까. 어쩌면 그녀가 단계적으로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이 추리소설처럼 펼쳐질 수도 있겠다.
〈다시 찾을 테니까〉에는 ‘사건’이 없다. 물론 ‘나’가 미지의 공간에 떨어져 미래의 자신과 만난 것도 넓은 의미의 사건이겠지만, 그것이 소설 전체의 진행을 절정으로 끌어올렸다가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단지 이 글은 주인공 ‘나’가 낯선 곳에서 자신의 기억을 확인하고 위로받으며 끝나는 단편적인 장면의 묘사다. 분량이 늘어난다면, ‘기억 보관소’를 중심으로 ‘나’의 주변에서 여러 사건이 발생할 필요가 있다.
‘기억 보관소’는 독자 입장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배경이다. 오메르타 작가는 짧은 분량의 이야기 안에서도 ‘나’와 ‘기억 보관소’ 사이에 흥미로운 관계를 여럿 심어 두었다. 첫째로 ‘나’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 없이 이 장소에 정기적으로 방문한다. 그렇다면 ‘나’를 계속 이곳으로 이끄는 ‘힘’이 존재할 것이다. 또는 ‘나’가 이 장소를 방문하는 구체적인 이유나, 공간을 이동하는 데에 필요한 조건이 있을 수도 있다. 그것을 충족하면 ‘나’는 이 장소에 어김없이 오게 된다.
둘째로 ‘나’의 나이가 늘어갈수록 ‘기억 보관소’로의 방문이 잦아진다. 앞서 공간의 이동을 위해 만족해야 할 ‘조건’은 ‘나이’와 관련 있는 듯하다. 나이 든다는 것은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과정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정확한 기억이 어려워진다.’ 이것은 대중에게 매우 익숙하고도 대표적인 기억과 나이의 상관관계다. 그렇다면 ‘나’는 사라지는 기억을 채우기 위해 이곳에 방문하는 것이다. ‘채워야 하는 기억’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인물에 그것을 대입해 사건을 설정하는 것은 작가의 몫일 테다.
셋째로 ‘기억 보관소’에는 최후까지 나이를 먹은 ‘나’가 상주한다. 이 ‘나’는 매우 신비로운 인물인데 마치 소설 전반을 안내하는 게임 속 NPC 같은 역할을 한다. ‘기억 보관소’의 ‘나’는 독자가 보기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나’의 인생 전반에 걸친 기억을 다루는 ‘관리자’. ‘나’를 돌보다가 ‘사후’로 안내하는 ‘인도자’, ‘나’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새로운 삶을 제시하는 ‘안내자’. 기억 보관소 안의 ‘나’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소설의 방향은 완전히 바뀔 수 있다. ‘나’와 ‘나’가 특정 장소에서 만나는 소설로는 매트 헤이그의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를 참고하면 좋다.
여느 이야기나 마찬가지겠지만, 글의 분량과 전개의 설정은 전적으로 작가의 손에 달려 있다. 하지만 더 나은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에 기대 섞인 첨언을 하는 것은, 독자로서의 보람이기도 하다. 현재로서 〈다시 찾을 테니까〉는 그 자체만으로 읽는 사람에게 옅은 위로를 잔잔히 전한다. 이 글에서 인물과 사건, 배경의 부재 또는 미완을 보완한다면, 이미 같은 플롯을 사용하는 여러 좋은 소설처럼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이야기가 탄생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오메르타 작가 고유의 유머감 있는 상상력과 신비로운 공간, 환상적인 인물이 만나 현실과 상호작용하는 관계에서 펼쳐 나갈 이야기를 조금은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자신에게 위로와 힘을 주는 공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할 것이기에, 이 기억의 저장소가 ‘나’와 ‘남’의 감정을 돌볼 수 있는 장소가 되기를 바란다. 언젠가 그럴 수 있다면, 기꺼이 방문할 한 사람의 독자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