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목걸이 선풍기
주인공의 어머니, 이맏자 할머니는 분홍색 목걸이형 선풍기를 갖고 계십니다. 작품에서는 머지않아 사람을 잃을 폭염이 다가올 것을 예상합니다. 하지만 목걸이 선풍기를 하루종일 켜놓는다면, 사흘이 채 지나지않아 전력이 나갈 것입니다. 그럼에도 선풍기는 필요합니다. 찰나의 목숨이라도 더 영유하기 위해.
2 폭염
8월은 무덥습니다. 사람을 쪄죽인다는 말이 비유가 아닙니다. 아지랑이가 올라오면, 누구나 아른거리는 공중을 마시고 정신을 잃습니다. 환각을 보고, 귀신을 쫓다 에어컨 없는 밖에서 객사할 운명입니다. 때문에 전세계 많은 곳에서 8월 한낮에는 밖에 나가지 말라는 경고를 합니다. ‘나’조차 8월 무더위 속에서 어머니를 찾아 뛰어다니다간 사흘이 채 지나지않아 죽을지 모릅니다.
3 주위
‘나’는 주위를 둘러보지 않습니다. 주위에는 골목이 있습니다. 그 안에는 누군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허나 ‘나’는 그곳에 들어가선 안된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세상에 너무 많은 것에 초점을 잡으면, 사람은 결국 과거에서도 현재에서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단순히 현재만을 볼 수 없습니다. 꿈에서는 과거를, 숨 쉬면서는 지금을, 두려워하면서는 딸이 사라질 미래를 볼 수 있죠. 허나 ‘나’에게 과거는 참고 볼 만큼 괜찮지 못합니다. 하나의 과거고, 연장된 현재기 때문입니다.
목걸이 선풍기와 폭염주의.
어머니의 행방은 묘연합니다. 허나 사흘이 지나지않아 주인공은 평온해집니다. 8월 무더위에서 정신을 잃기 전에, 꺼진 목걸이 선풍기에 군더더기 희망을 가지 않겠다는 선고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나’는 골목을 거부합니다. 골목은 무더위입니다. 그 슬픔에서 선풍기가 없이는 삶을 살 수 없겠죠. 허나 골목은 2명의 가족을 앗아갔습니다. 그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확신하지 못할 주인공은 더 이상 관심을 주려하지 않습니다. 이는 슬픔 속에 더이상 무더위로 몸을 내던지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고입니다. 누이가 사라지고, 아버지가 실종되고 두 가족이 죽지 않은 채로 주인공의 어머니가 사라집니다. 주인공은 이 일을 악몽이라 믿으려합니다. 이미 악몽이겠죠. 허나 악몽과 현실의 차이는, 깰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가 팻말을 들고 사라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몇번이고 다시본다한들, 공포로부터 깨어날 수는 없습니다. 애초에 사랑하는 딸이 있는 이상 그래서도 안됩니다. 허나 과거의 악몽이 현재의 현실로 연장되었습니다. 바로 ‘골목’입니다.
골목과 환각
골목에서 사라진 이들을 본다는 걸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허나 이것이 실상인지는 구분할 수 없습니다. 꿈은, 언젠가 그것이 사라진다는 것을 아는 것과 다르게 환각은 현실로 스며듭니다. 폭염이 달군 정수리의 신기루가 환각이라면, 열병이 낫듯 환각도 나을테지만 말입니다.
허나 골목조차 환각입니다. 8월, 누이가 골목길을 따라 들어간 것인지, 8월 아버지가 본 것 분홍 원피스가 골목의 그림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골목은 무더위가 끝나는 순간 사라집니다. 이를 ‘나’는 은연듯 눈치채고 있습니다. 아마 어머니도 이를 알고 계신 듯 합니다. 8월, 수명이 길지 않은 목걸이 선풍기와 함께 사라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폭염 경보로 열병을 겪으면, 이내 목숨이 위태로워질 겁니다. 그럼 환각에서 길을 잃겠죠. 8월, ‘나’가 무더위를 헤쳐, 골목을 보며 할머니를 쫓아 사라진 딸을 붙잡는 것은 이 때문일 것입니다. 더 멀리가면 ‘나’의 환각이 치유됨과 함께 딸은 골목 속으로 사라질테니 말입니다.
그런만큼 8월은 양가적인 계절입니다. ‘나’가 혹은 누군가의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동시에 현실에서 꿈깨듯 일어나, 이내 실재를 아지랑이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폭염 주의呪醫
폭염은 연달아 발생한 실종 속에서 파괴된 ‘나’를 치료할 의사입니다. 주술사는 주물과 주약으로 병을 치료합니다. 이를 주의呪醫라 부릅니다. 폭염은 주의입니다. 폭염이 매개가 되어 모든 것을 고칠 수 있습니다. 죽은 영혼과 마주하면 주인공은 치료될 수 있을 겁니다. 옛 가족을 되찾을 수 있겠죠. 허나, 주인공은 무력합니다. 가족에게 있어 주인공은 더이상 희망을 느끼는 것을 거부하려는 듯 합니다. 희망이 있으면 8월의 무더위 속에서 환각을 보며 골목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허나, 주인공은 이미 현재에 살고 있습니다. 깨어나서는 안될 현재죠. 그러니 주인공은 희망이 있어선 안됩니다. 나을 순 있지만 나아서는 안됩니다. 때문에 ‘나’는 항상 괜찮지 못합니다. 괜찮을 수 없고, 괜찮아서도 안됩니다.
저편
저편은 흔히 사후세계의 대명사로 사용됩니다. 골목은 실종된 사람이 가는 저편입니다. 절도, 기도원도 아닌 어딘가에 있는 ‘나’의 사후세계죠. 골목의 사람은 죽음이 유예된 조금은 특별한 저승입니다. ‘나’는 이미 골목 저편에 있을지 모릅니다. 사라진 가족들의 시선으로 골목 저편에 서있는 건 다름 아닌, 미래에서 방황하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누이는 골목에서 ‘나’를 봤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는 누이를 보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보고 골목으로 들어간다면, 가족은 저편에서 살아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골목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나는 살아있었을 겁니다. 때문에 지금 같은 슬픔에 예방될 수 있던 것이고, 단 한번도 괜찮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딸과 아내를 위해 죽어있습니다. 아마 딸도 할머니를 찾지 못해 죽을 지 모릅니다. 치매에 걸린 ‘나’가 어머니를 쫓아 골목으로 사라진다면, ‘나’를 보고 아내가 8월 무더위 속에서 환각이 된다면 딸조차 자신은 골목의 저편에서 죽어야함을 깨달을테지요. 허나 모순적이게도 이런 죽어있을 삶에서 비로소 주인공은 살아있습니다. 마치 어머니께서 골목의 존재를 눈치채신듯, 아들 ‘나’와 손녀딸이 한순간이라도 보이지 않으면 안절부절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처절하게 감정을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감정의 존재 증명일겁니다. 이조차 죽음이 있는 실종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데 말입니다.
4 골목 저편
‘나’는 무더위 속에서 이미 목숨을 잃었습니다. 실종되지는 않았습니다. 실종되었을 수도 있죠. 딸을 찾고 돌아온 아버지의 눈에 아들은 무언가가 사라져 있습니다. 그것이 존재가 되었건, 마음이 되었건 말입니다. 아마 골목 저편에서는 아버지가 감정을 잃은 듯 할 겁니다. 골목 저편에서 아버지를 바라보는 ‘나’의 눈에 아버지는 존재를 잃었습니다. 결국 이 글에서 모든 것은 사라짐까지의 유예 기간을 갖습니다. 죽음입니다. 다만, 존재 대신 희망을 포기함으로써, 목걸이 선풍기를 들고 열병 속으로 걸어가지 않을 뿐이죠.
실종이 존재를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상태로 규정하듯, 꿈이 현재를 미래도 과거도 아닌 꿈 그 자체로 비정하듯, 골목 밖에서 주인공은 희망의 포기라는 꿈을 꾸는 실종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도 주인공은 살짝의 민틋함으로 삶에 걸쳐있습니다. 딸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골목의 저편에서도, 골목의 한편에서도 환영을 거부하는 주인공은 그렇기에 딸을 쫓아 자신마저 실종되지 않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설령 딸이 죽음을 유예하여 살고 있다고 한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