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소찰

  • 장르: SF, 로맨스
  • 평점×77 | 분량: 93매 | 성향:
  • 소개: 급격하게 뒤틀린 지반 밑에서 움직이는 것의 정체를 파헤치기 위해 지하 탐사를 간 에스터와 인류세로 만들어진 괴물의 한시적 조우 더보기

소재의 참신함에서 눈이 번쩍. 과학적 정합성과 메시지의 표현 방식에서는 고개를 갸웃. 공모(비평) 브릿G추천 이달의리뷰 공모채택

리뷰어: 사피엔스, 23년 8월, 조회 142

읽은 지 좀 됐는데 이제야 리뷰를 씁니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처음 읽을 때는 파라소찰이라는 이름 때문에 읽게 됐습니다. 이름이 상당히 새롭고 멋있고, 도대체 파라소찰이라는 게 뭘까, 폐플라스틱에서 탄생한 생물이라고? 이런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읽다 보니 정말 흥미로운 생명체였습니다. 지금 지구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 정말 이런 게 하나쯤은 생길 것 같거든요. 저도 평소에 플라스틱과 비닐 쓰레기 때문에 지구가 망할 거라고 생각해 오기도 했고요. 그런 상상도 했거든요. 분명 인간이 플라스틱보다 빨리 썩어 없어질 거다. 먼 미래에 외계인이 지구에 와 보면 플라스틱만 가득하고 그걸 만든 인간은 하나도 보이지 않을 거다, 그렇게요.

또한 흥미로웠던 점은, 에스더와 파라소찰의 조우와 교류였습니다. 파라소찰이 에스더를 잡아먹으려 하고 에스더가 도망다니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고요. 특히나 파라소찰의 꿈이랄까 환상이랄까, 에스더가 목격 한 그것들이 특수문자와 이모티콘으로 표현된 것이 참으로 신기방기하고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이 부분을 좀 더 보완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아쉽고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지점들이 있더라고요. 스토리 전개상의 아쉬움은 아래에 이유이 님께서 이미 리뷰를 써 주셔서 저는 다른 부분을 짚어보겠습니다. 이게 제가 공순이다 보니 그럴 수도 있습니다. SF를 읽다 보면 과학적 정합성을 따지지 않을 수가 없더라고요. 판타지면 몰라도 SF에서는 어느 정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미래 기술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게 한정돼 있고 100% 들어맞을 필요도 없지만(그러면 소설 쓰기가 아예 안 되는 부분도 있으니까요) 현재 밝혀진 과학적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 설정들은 몰입감을 방해하더라고요.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지요. 현재 우리의 세계와 아예 물리 법칙이 다른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설정이라면 모르겠지만 현재 우리 세계를 확장해서 쓰는 소설이라면 지금까지 밝혀진 과학은 어느 정도 존중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에스더가 혼자서 그 깊은 동굴까지 들어갔다는 부분입니다. 보통 이런 탐사는 팀을 이뤄서 하지 않습니까? 위험하니까요. 조난당할 가능성을 생각하면 절대 혼자 못 가죠. 따라서 단순히 취미로 그랬다는 설명보다는 더욱 설득력 있는 이유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는 작가가 에스더를 동굴 속에 집어넣으려고 이런 취미를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한 마디로 작위적이라는 거죠.

이건 제가 생각해본 건데, 맘에 드시면 채택하셔도 좋고 아니면 어쩔 수 없고요, 일단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에스더가 취미로 내려간 게 아니라, 평소 지하에서 어떤 이상한 움직임이 일어난 것을 의심하고 있는 지질학자라는 설정입니다. 그런데 동료들이 에스더의 말을 믿어주지 않죠. 이유야 많을 것입니다. 에스더가 아줌마라서? 평소 실수를 많이 해 와서? 등등이요. 아무튼 그렇게 지하를 돌아다니면서 내가 뭔가를 찾고 말겠어! 이런 심정이다가 파라소찰을 만나는 거죠. 개인적으로는 이쪽이 좀 더 자연스럽다고 보이는데 작기님이 보시기엔 어떠실까요?

그 다음은 과학적인 상식 부분에서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파라소찰은 폐플라스틱이라는 유기물에서 탄생했고 그렇다면 몸이 유기물로 이뤄져 있을 텐데 플라스틱을 먹지 않고 동굴 안의 암석만 먹는다는 부분이 논리적이지가 않습니다(수정을 먹는다고 나오는데 수정을 이루는 물질은 규소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는 것은 에너지 보충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우리 몸을 이루는 재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은 아기 때부터 우리가 먹어온 그 음식들을 재료로 만들어진 물체입니다. 그런데 파라소찰은 유기물에서 탄생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유기물을 먹지 않으면 몸이 점점 무기물로 바뀔 것입니다. 그 메커니즘이 어떻게 되는지는 차치하더라도요. 우리도 유기물에서 탄생했는데 그렇다고 플라스틱을 먹진 못 하죠. 그렇다고 돌을 먹는다? 고개가 갸웃거려집니다.

둘째, 플라스틱은 잘 썩지 않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매우 잘 부서집니다. 열과 빛에 약해서 작은 가닥으로 부서지는데 그것이 바로 미세플라스틱입니다. 50만년이라는 시간은 매우매우매우매우매우 긴 시간입니다. 플라스틱이 그 동안 거의 부서지지 않고 덩어리 그대로 존재한다는 게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플라스틱 자체도 문제지만 더욱 문제는 미세플라스틱입니다. 플라스틱은 모아서 재활용 하면 되는데 미세플라스틱은 그러기가 힘드니까요. 그리고 플라스틱은 ‘잘 썩지 않는’ 것이지 ‘아예 썩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저 정도 시간이면 인간이 플라스틱을 먹는 미생물을 개발하든지, 자연 스스로 그런 미생물이 진화하든지 할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그리고 현재 작품에서 플라스틱과 광물이라는 단어를 혼용하여 쓰는 부분이 보이는데요, 플라스틱은 광물이 아닙니다. 플라스틱은 기본적으로 탄소와 수소의 결합을 베이스로 한 유기물이고요, 이 두 원소 간의 결합이 들어가 있지 않은 모든 다른 물질이 무기물입니다. 따라서 탄소 자체와 수소 자체는 무기물입니다. 무기물 중에서도 특히 결정을 이뤄 암석을 만드는 물질들을 광물이라 부르고요. 그러므로 플라스틱을 광물이라 부르는 부분은 조심해서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소설을 읽다 말고, 뭐? 하면서 몰입감이 떨어지거든요.

또한 미래 인류가 무기물과 유기물로 이뤄진 존재라고 하셨는데, 이미 현생 인류도 무기물과 유기물로 이뤄진 존재입니다. 근육과 (뼈를 제외한)장기는 거의가 유기물이지만 우리 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물(H2O)와 뼈(인산칼슘)가 무기물이거든요. 물이 우리 몸의 70%를 차지한다는 걸 생각하면 우리 몸은 사실 유기물보다 무기물이 더 많죠. 그리고 세포 내의 효소라든가 이런 것들에 아주 미량이지만 미네랄들이 들어갑니다. 혹시 종합영양제 드신다면 성분을 보시면 알 것입니다. 거기에 금속과 미네랄이 포함돼 있다는 것을요.

또 하나를 말씀드리자면 파라소찰의 기원인데요. 암석 동굴에서 플라스틱이 녹아내리면서 생겼다고 두루뭉실하게 표현이 돼 있는데, 현재 지구 생명의 기원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보면 이 역시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지점입니다. 생명체는 수십억년의 세월(수십만년보다 훨~~~~씬 긴 세월이죠)동안 RNA, DNA, 단백질 같은 조각들이 생겨나고 거기서 단세포 생물(로 지낸 기간이 정~~~~~말 깁니다. 다세포 생물이 지구 상에 존재한 시간보다도 훨씬 깁니다)을 거쳐 다세포 생물로 진화를 해 왔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차곡차곡 느릿느릿 진화해온 결과가 현재의 생명체인데, 단순히 암석에 플라스틱 녹은 것이 섞였다고 생명체가 생겼다는 설정이 작위적으로 느껴집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굳이 소설 속에 표현하지 않는 것이 어떨까 생각됩니다. 그냥 어쩌다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게 생겼다, 이런 거죠.

마지막으로는 주제랄까, 메시지랄까, 그런 부분에서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요.

담장 님께서는 평소 인외의 존재에 관심이 많으시다고 하셨지요. 저도 담장 님의 작품을 다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몇몇 작품이나 리뷰, 게시판 글에서 그런 관심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인외의 존재를 그릴 때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저는 생각하는데요. 바로 인외의 존재를 인간과 비슷하고, 인간을 숭상하고 경외하고,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존재로 그리는 것입니다. 그건 인간중심주의라고 생각하거든요. 인외의 존재를 이렇게 묘사하면 이건 포스트휴머니즘이 아니라 휴머니즘이 돼 버린다고 생각해요.

인간중심주의, 휴머니즘은 얼핏 듣기에는 좋은 단어 같지만 실상 역사를 살펴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저 말 속의 ‘인간’이란 ‘중산층 비장애 양성애자 백인 남성’을 뜻하거든요. 휴머니즘을 표방하는 사상들을 잘 살펴보면 여성, 장애인, 유색인종, 동성애자 등을 뭔가 부족한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이걸 극복하려는 사조가 포스트휴머니즘이라고 저는 알고 있고요.

따라서 인외의 존재에 대해 고찰하는 이야기라면 이런 부분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파라소찰이 인간과의 교류를 갈구해왔다는 부분, 인간에게서 자신의 기원을 찾는 부분이 저는 인간중심주의로 보여요. 안드로이드가 사람되고 싶어하는 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실 저는 안드로이드가 사람 되고 싶어하는 이야기에 공감도 못 하고 좋아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파라소찰이 에스더에게 장난감 이상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상대에 대한 호기심에 몸이 달아오르는 사람이 에스더뿐이라면요? 그러다 결국 파라소찰에게서 어떤 경외감이나 편안함을 느끼고 파라소찰의 일부가 되어버린다면? 세상 밖으로 나가 너의 존재를 알리고 올게, 이런 것보다는요. 에스더가 세상 사람들에게 파라소찰의 존재를 알리고 이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결심하는 것 역시 인간중심주의로 보이거든요. 인간이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게 말이 안 된다, 파라소찰 넌 모르겠지만 인간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그럴 권한이 있다, 이런 사상으로 보여요. 파라소찰 그 자체가 뭔가를 해결하려는 의지나 아니면 아무것도 해결하고 싶어하지 않는 의지가 있다면 어떨까요?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 소설의 메시지 제시가 너무 직접적이지 않나 하는 것입니다. 읽다 보면 약간 뭐랄까, 플라스틱 버리지 말자는 캠페인의 일환으로 보이거든요. 이건 파라소찰의 기원에 대해 너무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 그리고 에스더가 결말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동굴 밖으로 나가는 부분 때문에 그렇게 느껴집니다. 캠페인으로 느껴지면서부터는 작품이 문학이 아니게 느껴지거든요. 따라서 이 부분을 좀 바꿔보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쓴소리 가득한 리뷰를 썼군요. 언제나 말씀드리지만 저는, 정말 맘에 들어서 추천하고픈 작품이나, 맘에 들지만 어딘가 아쉬운 작품에 대해서 리뷰를 씁니다. 그 부분을 보완하면 완벽에 가까운 작품이 탄생할지도 모른다는 소망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이 리뷰로 속이 상하셨다면 깊은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

담장 님의 SF에 대한 사랑 존경하고, 작품 언제나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 많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