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기 마련입니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죠. ‘인상 깊은 첫 문장’하면 누구나 다 떠올리는 이 문장을 뜬금없이 인용한 이유는, 오늘 리뷰 할 《하그리아 왕국》이라는 작품을 이보다 더 잘 요약한 말도 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그리아 왕국》은 군상극의 형태를 띤 궁중암투물로, 하그리아 왕국 여왕 샤흐라자드와 그녀의 세 아들 아르샨, 이스카, 스피타만의 왕위쟁탈전을 주로 다루는 이야기입니다. 아들들끼린 서로 사이가 좋지만 외부인들은 통 이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고, 특정 사건을 기점으로 경쟁은 급격하게 치열해지는데요.
결국 왕가도 가정의 일종이라는 점에서 이 가정은 무척 불행한 가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보다 무거운 짐을 짊어져 자식들을 돌봐줄 겨를이 없는 어머니, 동생들에 비해 무능력한 장남, 능력은 출중하지만 왕위 따위엔 관심이 없고 자유를 원하는 차남, 야욕은 가득하지만 출신이 미천한 삼남까지. 인물들은 모두 각각의 불행을 안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지만, 회차를 거듭할수록 어째 제 눈엔 폭주하는 열차처럼 쉽사리 피할 수 없는 비극이 다가오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단순한 기우라면 다행이겠지만요.
과연 하그리아 왕국의 차기 왕은 누가 될까요? 이 치열한 다툼에서 또 누가 희생되고, 누가 피를 흘리게 될까요?
물론 결말은 작가님만이 알고 계실 겁니다. 하지만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이 작품이 몹시 재미있다는 사실입니다.
《하그리아 왕국》의 가장 큰 장점은 역시 술술 읽히는 문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작품 내 모든 문장은 그리 복잡하지도 않고, 이해하기 어려운 복문도 없습니다. 가끔 보이는 비문이 흐름을 끊을 수는 있지만 그 정도는 감안할만하지요. 세상에 오타 없이 완벽한 글 같은 건 없으니까요. 《하그리아 왕국》은 독자에게 친절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설명해주는 작품입니다.
그 외에 독보적인 장점을 꼽아보라고 하면 탄탄한 설정인데요. 자랑은 아니지만, 저는 일단 글을 쓴 다음에 설정을 짜는 버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설정에 맞춰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에 맞춰서 설정을 짜는 거죠. 그러다 보니 중반부부터 설정에 오류가 생기기도 하고, 내용이 뒤죽박죽 얽혀 이야기의 절정에서 힘이 떨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그리아 왕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이 없어 전 회차를 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몇 화만 읽어도 작가님께서 얼마나 이 세계를 사랑하고 계신지 알 것 같았습니다. 모든 묘사와 비유가 꼭 어린 소녀의 보물상자를 열어본 듯한 기분을 안겨다줍니다. ‘내가 정말 아끼는 이것들을 네게도 보여줄게’, 이 작품은 제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어요.
흡인력 있고 피 말리는 암투물을 선호하시는 분, 탄탄한 설정과 정성 가득한 세계를 좋아하시는 분께 《하그리아 왕국》을 추천 드립니다.
……자, 그럼 대략적인 작품 소개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지금부터는 그냥 이 작품의 독자로서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떠들겠습니다. 애초에 저는 내키는 대로 쓰는 것만 잘 하는 인간이라서요. 《하그리아 왕국》이 어떤 작품인지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이쯤에서 본문으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하그리아 왕국》을 읽으면서 생각난 모티프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물론 꿈보단 해몽이라고, 제가 멋대로 살을 갖다 붙인 것에 불과한 이야기지만 기왕 떠오른 것 다른 분들과 공유하는 것도 재미난 일이겠죠.
1. 파리스와 황금사과
작중 등장하는 세 명의 왕자들과 샤흐라자드를 보면서 제가 연상한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테티스 여신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해 화가 난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가장 아름다운 여신께’라는 문구가 적힌 황금 사과를 던지는 모습인데요.
헤라, 아프로디테, 그리고 아테나가 이 사과를 놓고 다투게 되었고 그녀들은 최고신 제우스에게 판결을 맡겼지만 그는 여신들의 분노를 감당하기 두려워 파리스라는 청년에게 일을 미룹니다. 결국 권력의 횡포로 세 여신 중 가장 아름다운 여신을 골라야 하는 처지에 놓인 건 파리스가 되었습니다.
헤라는 권력을, 아테나는 전쟁의 승리를,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인을 조건으로 자신을 선택하라고 종용합니다. 고민하던 파리스는 결국 아프로디테에게 사과를 바치고 (이미 결혼한 신분이지만) 아내로 헬레네를 얻는데요.
저는 이 세 명의 여신들이 차례로 아르샨, 이스카, 스피타만과, 그리고 파리스는 샤흐라자드 여왕과 상응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구보다 적법한 혈통의 아르샨과 천재적 면모를 보이는 이스카, 작중 제일가는 미인의 아들인 스피타만, 이들 중 한 명에게 왕위를 주어야 하는 샤흐라자드.
헤라는 최고 여신이며 가정을 주관합니다. 아테나는 전쟁을, 아프로디테는 사랑과 미를 관장하죠. 파리스는 사랑을 택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그는 사랑의 보복이 가장 두려웠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원초적 욕구이자 최후까지 갈망할 수밖에 없는 것, 사랑. 그리고 작중 샤흐라자드는 삼남인 스피타만을 가장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남편들과 아들들에게도, 겉으로는 진실한 사랑 따위 찾아볼 수 없는 무심한 태도로 일관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을 택한 파리스의 최후는 사랑하는 헬레네를 건 트로이 전쟁 말미에 독화살을 맞고 비참하게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샤흐라자드는 파리스와 다른 최후를 맞이할 수 있을까요? 그녀가 지지하는 왕자가 무사히 옹립될 수 있을까요? 어쩌면 그녀의 선택도 그녀의 안위에 가장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지 않을까요?
어떤 결말이든 저는 그것이 샤흐라자드에게 가장 비참한 결말이 되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이스카가 반란을 일으켜 샤흐라자드를 몰아내고 두 형제를 모두 죽여 왕이 되는 결말을 기대하고 있습니다만, 이건 너무 파격적인 전개죠.
하지만 뭐, 기대는 자유잖아요. 저는 이스카의 성공적인 자유 쟁탈전을 응원합니다.
2. 적색과 녹색
아르샨과 이스카가 결투재판을 벌이는 과정에서 아르샨을 지지하는 무리들은 붉은색, 이스카를 지지하는 무리들은 녹색을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아르샨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저는 작중 전개가 이스카와 스피타만 간의 혈투로 이어지고 아르샨은 겉절이(…)가 될 거라고 예상했는데요.
작가님께선 제 예상을 가볍게 박살내주셨습니다. 어쩌면 누구보다도 평범한 아르샨과 누구보다도 천재적인 이스카야말로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방해되는 존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흔히들 빨강의 보색이 파랑이라고 알고 있지만, RYB 색상모델에서 붉은 색의 보색은 진한 녹색입니다. 이스카의 아내 누르자한의 몸을 침범한 색도 붉은색이었죠. 샤흐라자드가 아들들의 결투재판에서 착용한 장신구엔 붉은색과 녹색이 섞여 있습니다. 그녀가 두 왕자들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적색은 생명, 열혈, 정열을 의미하고 있기도 합니다. 아내의 염원을 이루어주기 위해 왕이 되려고 노력하는 아르샨과 잘 어울리죠. 녹색은 대개 자연, 평화, 안정을 상징합니다. 수술실에서 환자들의 붉은 피로 인한 잔상 효과를 줄이기 위해 수술복에 쓰이는 색도 녹색입니다. 붉은색은 침범하는 색, 녹색은 방어하는 색이죠.
단순히 색만 활용했을 뿐이지만, 참 멋스러운 연출입니다. 아직 보지 못한 회차들에도 이런 멋진 연출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3. 이사야
샤흐라자드 여왕은 많은 애첩들을 거느리고 있지만, 최근 가장 총애 받고 있는 남성은 궁정학자 이사야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 어디서 많이 들어보지 않으셨나요?
사전에 따르면 ‘이사야’는 여호와의 구원, 혹은 예수와 동일한 의미의 단어입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였던 그는 20세에 선지자로서의 소명을 받고 ‘궁정 선지자’, 혹은 ‘대선지자’로 불렸는데요.
재미있는 점은 이사야가 예수를 배반한 제자인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자 유다의 희망인 메시아의 구원을 동시에 상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출세엔 관심이 없지만 연구를 위해 여왕과 동침하며 그녀와 많은 대화를 나눕니다. 여왕도 선뜻 그와의 대화를 기꺼이 여기면서 두 사람은 남모를 정서적인 교류를 쌓아갑니다.
작가님께서 노리고 지으신 이름인지, 이 이사야라는 인물이 차후 어떤 활약을 펼칠지 저는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왕과 가까이 있는 이 인물이 누군가의 구원이 될 수 있다면, 또 누군가는 그에게서 절망을 얻을 수도 있겠죠. 어떤 식으로 흘러가든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끝으로 이사야 54장 10절을 소개하며 감상 마치겠습니다.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이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과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아무래도 리뷰는 처음이라 부족한 점도 많고 내용도 중구난방이겠지만, 부디 《하그리아 왕국》의 감상에 이 리뷰가 도움이 되길 빕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