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디오라마!

  • 장르: SF, 판타지
  • 평점×10 | 분량: 34매 | 성향:
  • 소개: 외계인들의 박물관 안 디오라마에서 일하는 인간 알바생 더보기

떠나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공모(감상) 브릿G추천 공모채택

리뷰어: 샘물, 23년 3월, 조회 38

필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금 꺼내고자 한다.

첫 직장은 정말 우연찮게 들어갔다. 온라인에 올려둔 이력서를 봤던 A기업이 면접을 보자며 나를 불렀고, 다행히도 그 면접은 잘 통과되어 처음으로 ‘회사원’ 딱지를 붙일 수 있었다. 다만 IT쪽 업무로 들어간지라 워라밸은 꿈도 꾸기 힘들었다. 9:30 to 6:30 근무로 계약서는 작성됐지만 언제든 야근을 해도 피고용자가 불만을 가질 수 없게 ‘포괄임금제’가 적용되었고, 6시 30분 퇴근? 명절 연휴 때 전체적으로 일찍 퇴근하는 날 빼고 저 시간에 퇴근한 적이 없었다. 업무가 안 끝나서 나나 선임한테 배달시킬 저녁메뉴 정하라는 관리자의 말이 없는 게 다행일 정도다.

놀랍게도, 당시의 필자는 큰 불만이 없었다. 월급은 초년생이 받기엔 썩 나쁘지 않은 액수였고, 밤새 프로젝트에 본인이 협조한다는 느낌이 썩 불쾌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럴 줄 알고 들어간 업장이었기에 각오는 한 셈이었다. 다만 여차저차 체력이 박살나기 시작하며 제 시간에 집중하기 힘들어지고, 임금포괄제가 적용되지 않았을 경우 월급이 사실은 필자가 처음 회사에 제시했던 금액보다 적었다는 걸 깨닫고 난 후, 의지가 하나씩 깨지기 시작했다. 그 외에 더 치명적인 이유가 있긴 하지만 너무나 개인적인 이야기기 때문에 언급하지 않겠다. 결과적으로, 실패하더라도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실패하자는 생각을 갖고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회사를 제발로 나왔다. 여전히 그게 잘한 행동인지 모르겠다.

 

 

사람은 자기 세상밖에 모르는 생물인지라 다른 무언가를 이해하려면 그것을 경험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타인의 사고관념, 이성의 선호 및 행동, 빈부의 차이로 달라지는 행동의 제약 등 단순히 책이나 다른 정보매체로 보고 듣는 것보다 본인이 직접 그 상황에 처하는 것이 많은 깨달음을 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들을 모두가 의지에 따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질병이나 편견으로 사람을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고, 가난한 이가 아무런 기반없이 부자의 삶을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가능성은 모두에게 열려있지만 현실의 기회는 일부에게만 허락된 셈이다.

‘윤하’가 외계 박물관에 가게된 경유를 떠올려보자. 그녀는 스스로 지구를 떠난 것이 아니라 무관계한 고위층과 어느 외계인의 합의로 선택’당한’ 것이다. 만약 윤하가 애초에 선택당할 권리도 없었다면? 그녀가 고위층으로 간주되는 인간이거나 그 계급의 자제였다면? 다른 측면에서, 윤하가 외계인의 존재를 믿고 있으나 그들을 혐오하고, 인류가 가장 우월하다고 믿는 인간이었다면? 아니, 결국 간택당한 인간이 북미에 거주하는 ‘제시 올랜드’였다면? 마지막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한, 앞서 제시된 가능성은 이 이야기를 시작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또다른 윤아’의 인간적인 특성이 된다. 그들은 그저 본작의 ‘윤아’와 사회적 지위가 다르고, 또다른 사고관념을 가진 동일한 인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 둘은 그녀가 이야기 마지막에 도달한 깨달음에 함께할 수 없다. 당연하다, 이 이야기는 오직 한 인간의 경험이며, 그것을 짐작케하는 어떠한 정보도 암시되지 않았으니까. 슬픈 일이다. 윤아가 이야기 끝에서 얻은 교훈은 어느 인간에게나 알려줘도 값진 내용이지만 이 이야기 뒷편에 숨겨진, 그 지구의 수많은 인간들은 이것을 깨달을 기회를 얻지 못한다. 석가모니가 해탈의 경지에 도달했음에도 중생들도 이 경지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며 깨달음을 여정따라 전수한 것이 이런 측은지심에 기인한 것일까?

흥분한 나머지 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결이 다른 소리를 적어버리고 말았다. 읽는 분들에게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필자는 이 감상문에서 기연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의 주인공을 비판/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설령 작가가 원하는대로 조작 가능한 이야기 속 인간들도 완전해질 기회를 박탈당하는데 현실의 장벽을 눈앞에 둔 인간이 어떻게 완벽해질 수 있냐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하찮은 존재가 스스로 쌓아올린 빈부격차를, 생명의 유전자로 쌓인 성별의 차이를, 지역과 출신으로 나눠진 좁은 땅에서의 삶을 일개 인간이 극복하여 개척하는 건 힘든 일이다. 노력의 경중으로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인간의 한계로 여기고 슬퍼해야만 하는 것일까? 어쩌면 균등하지 못한 경험과 인식은 사람 하나하나의 가치를 고유하게 만들고, 그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을 만드는 것일지 모른다. 나는 갖고 있지만 타인은 없고, 반대로 내가 갖지 못한 것을 타인이 갖고 있는 것. 인간을 이루는 생각과 요소를 다양하게 쪼갤수록 모든 인간은 존재할 가치를 갖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존재와 교류했을 때 그것을 편견과 선입견으로 배척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의 요소를 받아들이는 자세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맹목적 수용이 아니다. 필요하면 취득하고, 필요에 따라 거절해야 하며, 서로의 것을 합해 더 나은 것으로 나아갈 줄 알아야 한다.

끝으로, 이 이야기가 이어질 미래에서 기대하는 장면은 서로 다른 인류가 될 두 사람의 만남이다. 여전히 인류의 냄새에 절어 외계의 존재를 배척하는 인간, 그리고 윤아와 같이 모든 존재가 힘으로 다른 존재를 억누르지 않는다는 관념을 체득한 인간, 서로 모습은 같아도 생각이 다른 두 인간이 만나면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킬까? 한쪽이나 양쪽이 소멸할 것인가, 아니면 더 많은 인류가 우주의 나그네가 되어 드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발판이 될 것인가?

 

좋은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