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리뷰는 일월명 작가의 연재 《개인의 자격 단편집》 중 단편 〈유장균〉과 〈KIR〉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개인의 자격’이란 무엇일까. 적어도 현대는 어느 때보다 ‘개인’ 또는 ‘개별’이라는 단어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느 때보다 개개의 파편이 부유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혹자는 그것을 ‘조각난 시대의 표상’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글쎄, ‘개(個)’라는 말이 그토록 부정적으로 쓰일 위치에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개성(個性)’, 그리고 ‘개인(個人)’은 현시대의 트렌드이자 유행이며 중요한 가치이다. 공동체의 역할과 집단의 향방, 거대 정의와 진리가 중요시되던 시대에서 한 걸음 멀어진 지금은 개별의 시대이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등장한 《개인의 자격 단편집》이라는 연재의 제목은 눈에 띄기 마련이다. ‘개인’이 되기 위한 ‘자격’을 논한다니. 당연한 의아함과 호기심에 작품을 하나하나 확인할 수밖에 없다. 연재의 제목처럼, 지극한 개인의 이야기를 감각적으로 다루는 작가의 시선과 문장이 작품 안에 녹아 있다. 어떤 것은 실험적이며, 어떤 것은 독창적이고, 어떤 것은 가벼운 유머가 있다. 이 글에서는 가장 순식간에 읽을 수 있는 〈유장균〉을 통해 개인의 자격 중 ‘이름’에 관한 사유를 면밀히 살펴보고자 한다. 동시에 단편 〈KIR〉을 통해 작가의 문장과 이야기 구성력의 가능성을 점쳐보고자 한다.
개인의 시대에 개별을 논하는 단편집이야말로 가장 현대적이니까.
내 이름은 유장균
지금은 ‘개인’을 드러내는 (또는 구별하는) 몇 가지 특징과 기호가 있다. 이름, 주민등록번호, 각종 사이트의 아이디와 비밀번호 등이 이에 해당한다. ‘개별’의 사회에서 호명의 방식은 점차 변화한다. 등장인물의 이름을 알파벳으로 표현하거나 숫자, 기호 등으로 붙이는 구성이 최근의 소설에서 많이 보인다. 마치 이 사회의 익명성을 반영하듯, 다양한 ‘이름’들이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이름은 비단 익명성을 위해 단순화되는 방식으로만 변하지는 않는다. 개성 있는 닉네임은 현대를 이끌어가는 또 하나의 특징이다. 유튜버, SNS 스타 등은 오히려 가장 눈에 띄는 이름으로 자신을 꾸민다. 이름만 들어도 아는 유명 유튜버들은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되기도 한다. 이름에는 자아가 드러나기도 한다. 이른바 ‘부캐’ 열풍은 하나가 아닌 여러 자아를 투영하는 개인을 보여주며 하나의 진리가 아닌 보편의 개인이 중시되는 풍조를 날카롭게 조명한다.
일월명 작가는 이런 ‘이름’이 범람하는 시대에 하나의 기묘한 소설을 내놓았다. 이름하여 ‘유장균’. 유장균은 사람의 이름이다. 익명도, 개성도, 자아도 아닌 하나의 이름은 위의 기준과 특징에서 모두 벗어난다. 어느 물결에도 끼지 못하는 이 이름을 통해 작가는 ‘틈새의’ 개인을 조명한다. 안타깝게도 ‘유장균’은 AI가 자동으로 교정·교열을 보는 사회에서 살아간다. 그렇기에 상당한 애를 먹는다. 지금도 다양한 문서작업용 프로그램에서 이용되는 ‘자동 맞춤법 검사’ 기능은 간혹 비문을 교정해주는 고마운 존재다. 하지만 ‘유장균’과 같은 이름을 가진 이들에게는 아주 튼 골칫거리다.
만약 ‘유장균’이라는 사람이 내 근처에 있다면 그에게 붙여줄 수 있는 별명은 “듣자마자 딱” 떠오른다. 괜히 곤혹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리듯 속으로 생각하는 그 단어는 ‘유산균’이다. ‘유산균’이라는 명사가 있기 때문에 맞춤법 검사기는 ‘유장균’이 자신의 이름을 입력할 때마다 ‘유산균’으로 고치는 작업을 반복한다. 작가는 자동으로 맞춤법을 고쳐주는 거대한 시스템에서 ‘예외’가 된 개인을 그린다. 상당히 재치 있는 방법이다. 흥미롭게도 이 맞춤법 검사기는 인간이나 표준국어대사전이 아닌 이상 백 퍼센트 정확하지는 않다는 오점을 안고 있다. 게다가 기능을 업데이트하지 않거나, 최신의 프로그램을 설치하지 않으면 이전의 맞춤법을 그대로 글에 반영해서 오히려 비문이나 오문을 유도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맞춤법 검사기는 자신이 알고 있는 규칙이 확실하다는 듯 남을 고치고 바꾸려 든다. 설령 그것이 맞는 말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마치 거대한 하나의 법을 정해두고 개인을 끼워 맞추려는 공동체나 집단처럼 보인다. 기능을 업데이트하지 않고 과거의 낡은 잣대로 세상을 보는 이들이 있다. 남을 꼬깃하게 접어서 틈에 어떻게든 맞추려는, 저 혼자 맞다고 주장하는 몰개성의 남발. 개인과 개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유장균’은 그런 이들을 대표하여 소설에 쓰였다. 개그코드가 유난히 많은 소설이라 순식간에 웃으며 읽을 수 있지만, 여러 번 볼수록 유장균의 한탄이 단지 그의 것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이 온다.
맞춤법 검사기의 틈에 끼인 당신과 내 이름을 보자. 우리는 어떤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유산균’에서 글자 하나 바뀌었다고 ‘틀렸다’라고 말하는 사회를 이토록 가볍고 확실하게 비트는 단편을 만나 놀랍도록 반가웠다. 틀린 것은 이름이 아니다. 그것을 ‘검사’하고자 하는 시스템이다. 세상은 변화하고 있고, 업데이트되지 않은 것은 우리의 이름이 아닌, 맞춤법 검사기다.
KIR. 로봇의 인격과 종료
엽편 〈KIR〉은 하나의 사건에 대한 판결문 형식을 띤다. 최근 보고서, 논문 형식으로 실험되는 소설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픽션을 논픽션의 구조에 녹여 내는 시도는 독자에게 가상을 보다 현실적으로 느끼도록 한다. 실제 있었던 한 사건의 결과를 알려주듯, 건조하고 사무적으로 쓰인 이 엽편에서도 얕지 않은 사유의 확장이 이루어진다.
사건의 시간적 배경은 2058년, 지금으로부터 약 35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후다. SF로 분류할 수 있는 이 작품은 로봇의 상해와 데이터의 삭제를 다룬다. “인공지능의 인격 형성 가능 여부 증명”이라는 의미심장한 글귀가 말해주듯 로봇이 완전한 인격을 가질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듯싶다. SF, 특히 로봇 공학이 등장하는 문학에서 종종 등장하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 역시 작가 코멘트에서 언급되고 있으니 형식 외적인 면에서는 SF 장르의 정석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가능성과 완결성 두 가지에 모두 초점을 두고 감상하게 된다. 먼저 가능성을 말해보자. 로봇 공학 3원칙과 기계의 자살, 인공지능에서의 인격이 결합한 이야기는 적어도 SF에서 신선도가 높지는 않다. 하지만 자주 쓰이던 소재라고 해서 모든 작품이 상투적으로 평가받지는 않는다. 일월명 작가는 ‘유장균’이라는 앞의 소설에서 충분히 명확한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구성력을 보여주었다. 작가의 소설에서 보이는 ‘신선함’은 아주 큰 매력이다. 어떤 평범한 주제도 그는 더 자유롭게 그려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자유로움’은 어디로 뻗어가야 하는가. 소설의 진행 방향은 독자의 질문에 답을 하는 과정을 통해 잡을 수 있다. 〈KIR〉은 하나의 주문에서 끝나지만, 원고와 피고, 사건이 있다는 점에서 픽션의 요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이 소설에서 독자로서 궁금한 것은 ‘그래서?’이다. 이 사건은 어디에서 촉발하였는가. ‘그래서’ 어디로 가는가. ‘그래서’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그래서’ 가해자와 피해자는 어떻게 되는가. ‘그래서’ 로봇의 자살이란 무엇인가. 작가가 궁극적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주제는 무엇인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는 것은 독자가 흥미를 느끼는 동시에 그 의문이 작품 내부에서 해소되지 않는다는 양면성을 내포한다. 요지는 〈KIR〉 안에 많은 의문이 숨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분명히 긴 분량으로 늘어날 때 더 많은 장점을 보여줄 수 있다. 판결문은 원고와 피고에게 각각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단순하고 사실적인 공식 문서 하나에서 뻗어갈 작가의 상상과 그로 인해 발생할 사건이 궁금해진다. 미래에서 날아온 하나의 공적 문서, 그 뒤에 숨었을 로봇과 자살, 생과 사의 교차가 독자의 흥미를 자극한다. 마치 후속이 있을 것처럼 긴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형식 실험을 놓치고 싶지 않다면, 작가 스스로가 이 작품의 길이와 구조에 충분히 만족한다면 앞뒤를 늘리지 않고도 더 나은 작품으로 수정할 수 있다. 〈KIR〉에서 가장 먼저 보완되어야 할 부분은 ‘상황 설명’과 ‘메시지’이다. 실제 판결은 원고와 피고가 서로의 이해관계를 잘 알고 있다는 가정 아래 쓰이지만, 소설은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 ‘독자’를 가정하고 쓰는 글이다. 따라서 내부의 이야기가 좀 더 외적으로 드러날 필요가 있다. ‘지능형 로봇 KIR’이 파괴됨으로써 두 개인에게는 어떤 피해가 있었을까. 그리고 피고와 원고는 정확하게 어떤 사이일까. 피고는 왜 로봇을 파괴했는가. 피고의 심신미약과 그가 ‘데이터를 인격체로 칭하는 행위’는 둘 다 단순한 ‘정신적 혼란’으로 기술되어야만 하는가. ‘메시지’를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내용을 요약하는 ‘한 문장’이 필요하다. 아무리 짧은 소설이라도 시놉시스를 쓴다면 구조를 잘 잡을 수 있다. 시놉시스나 주제가 되는 문장에 작품의 진행을 비교하는 과정만으로도 수정과 보안이 이루어질 수 있다.
로봇과 인간의 관계성에서 창의적인 돌파구를 찾을 때, 그리고 더 많은 정보가 추가될 때, 인물과 사건 간의 유기성이 회복될 때의 가능성이 보이는 작품이었다. ‘기계의 인격 형성은 가능한가’라는 논제를 다루는 소설 〈KIR〉은 논픽션과 픽션 형식 양쪽으로의 가능성을 모두 내재한 글인 만큼 작가의 실험 정신이 중요하다. 이쪽과 저쪽. 독자는 취향에 따라 여러 방향을 제안할 수 있지만, 선택은 작가의 몫이다. 당연히, 독자는 작가를 믿는다. 더욱이 그가 하나의 세계를 관통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일월명 작가는 하나의 굵은 심지를 가졌다. 그는 자신이 만든 공간과 사건 안에서 인물과 사건을 배치하는 재미와 이야기를 구성하는 맛을 안다. 짧은 분량 안에서 개인이나 집단, 사회의 단면을 선명하게 그리며 미래와 현재의 현상을 진단하여 가공할 줄 안다. 그러므로 그의 다음 작품을 독자가 기다리지 않을 재간은 없다. ‘개인의 자격’을 논하기로 작정한 만큼 있는 힘껏 현실을 직시하는 소설이 등장하기를 기대해본다. 장르를 불문하고 환상을 어느 정도로 가미하든, 그의 작품 안에서 움직일 기민한 현실을 발굴해내고 싶다. 개인의 수는 많고 그들 안의 이야기는 더욱 다채롭다.
작가는 ‘자격’이라는 이름표를 모두에게 부여하기 위해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다. 어느 한 사람도 죽거나 뒤처지는 일이 없기를. 그리하여 모두가 ‘자격’을 부여받는 공평한 이야기가 일월명 작가의 세계관 안에서 무한히 뻗어나가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