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공개 작품을 엑세스 중입니다.

에일-르의 마지막 손님

  • 장르: 호러 | 태그: #호러 #음식 #스파게티
  • 평점×78 | 분량: 122매 | 성향:
  • 소개: 아름다운 아내가 만들어 준 따뜻한 오징어먹물 스파게티. 나는 그 속에서 벌레를 보았다. 3개월 전 우연히 방문한 식당이 나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더보기

죽을때까지 잊지 못할 수밖에 없는(스포일러) 의뢰(비평) 브릿G추천

리뷰어: 리체르카, 17년 5월, 조회 171

스포일러와 함께하는 리뷰입니다. 리뷰어가 생각하기에 이것을 보면 글을 읽는 것에 방해가 되겠구나 싶은 내용은 가렸습니다만, 기본적으로 내용에 관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혹여 읽으신 뒤에 감상에 방해가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다만 다분히 주관적인 이야기이므로, 되도록 글을 읽으신 후에 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을 매혹 시키는 여행지는 위험합니다. 때때로 여행자는 그 기분에 취해 평소라면 하지 않을 선택을 하게 되는데, 애석하게도 오늘의 주인공께서는 가장 좋아하는 음식에서부터 아내와의 추억 담긴 기억, 나아가서는 자기 삶까지 모두 잃어버리는 선택을 하고야 말지요. 결정을 내리게 되는 요지는 간단합니다. 새 여행지에 가서는, 새로운 음식을 찾아보고 싶은 법이 아닐까요.

작가의 의도에 따라 교묘하게 배치된 이야기는 독자를 신중하게 이끌어 갑니다. [오징어먹물 스파게티] 챕터에서 그가 파스타를 “가짜 음식”이라고 표현하며 아내를 묘사하는 방식은 일반적인 남편의 태도와는 사뭇 다릅니다. 가장 좋아하던 음식을 갑자기 손도 대지 않게 된 남자. 토악질할 것 같은 태도를 참아가며 아내를 위해 끔찍한 그걸 입안에 밀어 넣는 남자. 독자가 궁금해하기에 나쁘지 않은 전조입니다.

 

[케이프타운, 남아프리카 공화국] 챕터는 아주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깁니다. 여행지는, 새로운 장소는, 평소 하지 않던 행동들은 주인공을 에일-르로 이끌었을 거예요. 웨이터가 자기소개 하는 식당. 확실히 범상치는 않습니다. 건물 틈 사이의 비좁은 식당. 심지어 이국적인 타지 분위기와도 유리되어버린 분리된 공간에서, 주인공은 그걸 마주합니다.

포크를 집어 들어 면발 사이에 담그고는 몇 바퀴 빙글빙글 돌리자 검은색 소용돌이가 내 손을 덮치기라도 할 것처럼 포크를 타고 올라왔다. 자세히 보니 신기하게도 면은 한가닥뿐이었다. 접시에 담긴 건 믿을 수 없을 만큼 기다란 면 한 가닥이었다. 하지만 절묘하게도 기름진 면은 항상 먹기 좋은 만큼만 감겨 올라왔다.

면을 잔뜩 감은 포크를 입에 넣고는 적당한 부분에서 이를 물어 면을 끊었다. 그러자 마치 면이 살아있는 것처럼 입속에서 탄력있게 미끄러지고 파닥거리며 기묘한 식감을 만들어냈다. 접시에 떨어진 면의 단면을 자세히 살펴보니 면 속에서 새하얗고 끈적한 액체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입속에서 씹히고 있는 면에서도 무언가 흘러나오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통통한 면의 담백한 기름기와 어우러지자 그 조화로움에 혓바닥에서도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고개를 들고 눈을 감아 전율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저는 이런 묘사를 꽤 좋아하는 편입니다. 존재하지 않을 미지의 무언가를 독자 역시도 함께 탐식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게 하거든요. 각별히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고, 이야기를 끝까지 읽고 나면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 드는 부분이라 더욱 좋아합니다. 일전에 단문응원으로 한 마디를 남겼던 적이 있었는데, 여전히 작품을 관통하는 느낌은 동일합니다.

 

 

그 날 이후로 주인공에게 더 이상의 특별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를 즐겁게 하던 모든 것이 의미를 잃었지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경험이 끝난 뒤, 그는 에일-르를 기준으로 천천히 침식하는 자신을 느낍니다. 매일 아침 머그잔에 떨어지는 새카만 커피의 뜨거움을 지켜보는 정도의, 뜨거움.

자신의 삶을 관조하게 된 그가 몸속의 무언가에게 자신을 빼앗기기 시작한 것이 그렇게 늦은 시점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주인공은 그가 만났던 에일-르의 점원과 마찬가지로 숙주가 되는 삶을 천천히 살아가는 것이지요.

 

주인공의 기이한 행태는 [플라나리아]챕터에서 절정을 찍습니다. 그는 아내가 아이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고백하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지요. 저는 그것이 그가 이미 다른 무엇의 숙주로 살아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기에 벌어진 기현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그녀를 아름답다고 여기면서 동시에 괴물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이유가 그의 몸속의 또 다른 존재 때문이었던 것이지요.

사실 이야기를 끝까지 읽기 전까지는 “내 몸속의 또 다른 존재가 말해주고 있었다.”는 문장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그가 아내를 사랑하며 그녀를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시에 괴물을 닮았다고 말하는 것을 납득하려면 그에게 일어났던 일의 진짜 의미를 깨달아야 했거든요. 그가 무언가 잊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음식을 먹었는데,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이해하기까지의 간극.

 

독자는 이 시점에서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주인공에게서 유리되기 시작합니다. 그와 함께 무언가를 먹는 경험에 참여했으나, 그가 뱃속에서 무언가가 파스타를 밀어내버리는 등의 묘사를 하는 동안에도 독자는 그가 정말로 무언가를 품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기 어려우니까요.

플라나리아 챕터의 마지막에서 마주한 장면 때문에 저는 잠시 글에서 눈을 떼었습니다. 둘 사이에 들어선 건 아이가 아니었던 거였어요.

때문에 [미즈사와, 일본] 챕터 통해 확실하게 볼 수 있게 되는 에일-르의 메뉴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충격적입니다. 끽해야 살아 있는 먹거리 아니야? 하고 생각했던 저는 진실 앞에서 잠시 반성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챕터에서 하시쿠라가 “논문에 쓰인 한국어 메모”에 시선을 두는 부분에서 저는 앞부분 챕터를 쭈욱 이끌어오던 “나”의 행방에 관한 힌트를 받은 느낌이었는데요. 그 안에서 몸을 키워낸 무언가가 본래 자리로 되돌아갔고, “나”의 기억도 함께 갖고 간 덕에 한국어에 관심을 둔 것은 아닌가 하는. 약간은 지나친 억측이었습니다. 기억도 되돌아갈까요? 이 부분에 관해서는 언급하신 바가 없어 잘 모르겠군요. 주인공이 인천공항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두 부부를 한국인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마지막 챕터에 나오는 두 남녀와 앞선 두 사람은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걸 먹은 사람들이 한두 명은 아닐 것 같았거든요. 그것은 자신을 먹은 자들을 이용해 몸을 만들어가고 있었으니까요.

 

마지막 챕터의 이름인 [우누칼하이]는 앞부분보다는 뒷부분에서 좀 더 명확하게 다루어집니다. 독자는 맨 마지막 문장에서야 모두가 먹었던 그 먹음직스럽고 수상쩍은 한 가닥의 파스타-벌레-검은 무언가였던 것이 어떤 별에서 온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별과 관련된 일을 하는 자들이 모두 그걸 먹게 되는지, 아니면 명확한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닌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누칼하이. 그러니까 아마추어 천문학자가 발견했다는 미지의 별. ‘그것’이 자신의 고향을 부르는 이름인 에일-르. 그 몸이 완성되는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누가 속단할 수 있을까요. 서서히 다가오게 될 일이겠지만, 명확하게 준비된 공포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야기는 이로서 끝을 맺게 됩니다. 다소 느릿하고 차분한 호흡으로 천천히 건네어지는 이야기이므로 괴이에 천천히 스며들었던 독자의 뺨 한 대 찰싹 때려 정신차리게 할 만한 끝으로는 괜찮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 음식점의 이름에 에일-르였을까, 하는 의문에 관한 답으로도 훌륭하고요.

 

다소 사설이 길었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거든요. 여전히 아주 많은데, 너무 횡설수설하는 것 같아 지우고 줄이고 뱃속에 꼭꼭 밀어 넣었습니다. 다행히 제 뱃속에는 이야기를 밀어내려는 무언가가 존재하지는 않는 모양이에요.

 

글을 읽으며 가장 아쉬웠던 점이라면 글쎄요. 긴장감의 부재가 아닐는지 싶습니다. 글 전반적으로 묘한 긴장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당겼다가 놓고, 늘였다가 탁 잡아끄는 종류의 탄력성 있는 긴장은 아니었습니다.

덧붙여 붉은 눈과 검은 벌레들의 이야기에 관해서는 너무 마지막에 우르르 쏟아져 내리는 느낌이었고요. 마지막에 진실이 드러나면서 갑자기 휘말리고 쓸려 내려가면서 이런 이야기였구나 하는 기분보다는 뭐야? 라는 기분이 먼저 들어버리는. 전조 없는 급작스러움을 만난 것이 묘하게 섭섭하더군요. 좀 더 알려줄 수 있지 않았나? 홍수나, 붉은빛으로 빛나는 별 같은 모호한 이야기 말고 좀 확실한 무엇. 그런 아쉬움이 드는 거예요.

마지막까지 에일-르(Heyl-r)라는 말을 작가님이 적절히 만드신 건지 명확하게 지칭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궁금하더군요.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말이거나 아나그램으로 섞인 단어가 아니라면 이 부분에 관한 답을 궁금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겁니다. 오늘 하루가 죽을 때까지 당신을 따라 다닐지도 몰라요.”

마지막으로, 에일-르의 점원이었던 피슬리가 주인공에게 건네었던 이 이야기야말로 에일-르의 손님을 곤경과 함정에 빠트리는 마법의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독자들 역시도 그 기묘한 식당에서 함께 식사했었지요. 이 글을 읽고 리뷰하고 있는 저부터가 리뷰를 읽는 독자분을 ‘그것’으로 인도하는 숙주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을 때까지는 아니겠지만, 꽤 오래 생각하게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급작스럽게 주인공이 바뀌게 되는 [미즈사와, 일본]에서부터 갑자기 어리둥절하게 된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몰입하여 읽는 데 큰 무리가 없어 좋았습니다. 작가님의 문장과 적절한 단어가 세련되고 깔끔합니다. 구조에서 조금 어지러움을 느끼신다면 재독하실 때에 더욱 맛있게 읽으실 수 있는 글입니다.

다소 두서없는 리뷰를 드려 죄송스럽군요. 배가 부른 기분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