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 작품을 완독하고 무엇으로 감상을 시작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다. 어느 하나로 방향을 잡을 수 없을 만큼 소설이 전개되는 모든 부분이 마음에 들었고 그에 대해 전부 리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여전히 이 작품에 대한 한 갈래 시선을 정할 수 없기에, 정말 하고 싶은 말을 전부 써보도록 하겠다.
우선, 이 소설은 새롭지 않은 것들이 엮여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일제강점기와 흡혈귀, 기계, 조선인과 일본인. 언뜻 보면 각각의 단어가 하나의 작품에서 이어지기란 쉽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은별 작가의 소설 <아리>는 놀랍도록 자연스러운 전개로 이 모든 것을 하나의 축에 꿰어버린다.
일제강점기라는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명징하다. 보통, ‘일제강점기’는 독자의 머리에 그 시대를 드러내는 다양한 이미지를 생성해낸다. 칼과 총을 찬 순사, 무섭고 무거운 분위기처럼. 사실, 일제강점기를 통해 작가는 소설의 도입을 더 분명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소설 <아리>에는 시대적 배경보다 흡혈귀 주인공 아리가 먼저 등장한다. 이로써 소설은 덜 선명할지 몰라도 더 신비로워진다. 스스로 손목을 긋는 한 아이. 이름은 아리, 자기 손목에서 피를 빨아먹을 정도로 다정한 이 흡혈귀는 독자들에게 두려운 이질감보다는 호기심을 느끼게 한다. 아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소설의 시작에서 든 생각이었다.
자신보다 어린 생명을 취해야 했던 아리는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흡혈귀이다. 조선인을 비하하는 단어로 ‘조센징’이 쓰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으며, 아리 역시 ‘조센징’으로 불렸을 것이라는 추측은 쉽게 이루어진다. 실제로 소설 내에 ‘조센징’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도 한다. 당시 아리는 일본인보다 심리적으로, 때로 물리적으로 낮은 위치에 존재했을 것이다. 조선인 아리는 ‘흡혈귀’라는 설정을 통해 더 변방으로 이동한다. 아리는 일제강점기의 ‘조선인’보다도 낮은 자리, 조선인보다도 바깥쪽, 조선인보다도 어두운 곳에 위치하게 되는 것이다.
조선인은 조선인을 반길지는 몰라도 흡혈귀를 반기지는 않는다. 진정으로 남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존재. 그것이 소설 <아리> 속의 흡혈귀다. 독자들은 아리가 자신의 실체를 남에게 밝히는 순간, 그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고 오히려 변방으로 쫓겨나는 존재가 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을 먹어야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존재는 흔히 이물, 요괴 등으로 묘사되곤 했는데 오래전의 설화부터 최근의 작가들이 다루는 이들(인간 신체 일부를 섭취함으로써 살아가는)의 특징 중 하나는 대부분 인간과 화합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포식자와 피식자가 화합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인간을 먹고 살아야만 한다’라고 설정된 이들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어 산다. 이는 인간이 이물을 (의도하였든, 그렇지 않든) 힘과 무력으로 압도하고 있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하며, 그렇기에 이물은 몰래 인간의 신체를 구하러 돌아다닐 수밖에 없다.
인간과 철저한 대척점에 있는 이물들은 죽은 인간만을 취한다거나 최대한 적은 양의 인간을 공격하는 등 선하게, 또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을 먹어야만 하는 존재로 묘사되는 경우가 있으며 이런 작품에서 인간은 대체로 필요 이상으로 이물을 미워하며 때로는 이물을 말살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이들로 표현된다. 위의 구도는 소설 <아리>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대립으로 치환된다. 조선인이자 흡혈귀, 즉 이물인 아리는 일본인 순사 쿠로사와 이치고와 대척점에 서 있다. ‘조선인-일본인’이라는 관련 이외에도 ‘흡혈귀-인간’이라는 설정은 아리와 이치고의 거리를 더욱 멀게 한다.
이치고는 아리와 같은 흡혈귀를 찾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자신의 남편이 흡혈귀에 의해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 드러나지 않은 정보를 유추해보자면 아리의 아버지에 의해 이치고의 남편이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아리를 조여오는 이치고의 움직임에 독자들이 더 주목하도록 하는 장치이다. 아리를 이치고가 찾아내는 순간, 그가 일본인 순사라는 것을 이용해 어떤 잔인한 복수를 할지 생각하는 지점에서 소설의 긴장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치고는 “근방에서 그나마 평판이 좋은 순사”다. 그에게 있는 한 명의 딸은 아리의 친구 쿄코이고 그는 아리의 비밀을 모르는, 유일한 일본인 친구다. 심지어 쿄코는 일본이 한국에 어느 정도 잘못을 하고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이치고의 딸이라는 위치와 아리의 친구라는 속성이 맞물려, 쿄코는 이치고와 아리의 중간지점에 존재하는 인물이 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아리지만, 쿄코 또한 캐릭터를 분명히 사용한다면 충분히 존재감 있는 인물이 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소설의 발전 가능성’을 적으며 자세히 언급하겠다.)
소설의 절정은 결말부에서 보인다. 시체의 피를 먹는 실수를 한 아리가 남긴 혈흔을 찾아온 이치고는 집에서 나오는 노인을 흡혈귀로 오해하고 그에게 총을 쏜다. 아리가 자신의 보호자이자 할아버지인 호성을 막으려고 하지만 이미 때는 늦고 호성은 숨을 거둔다. 순사 이치고 역시 호성의 칼을 맞아 숨지는 방식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이 부분은 소설의 결말이지만 아리의 인생이 이후에도 이어진다는 가정을 한다면 그의 삶에서 하나의 큰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쿄코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친구인 아리를 찾는 쿄코의 독백으로 이야기의 맺음이 이루어지지만, 독자의 머리에서는 다양한 갈래로 이후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소설이 더 길어질 수 있다면
‘있다면’이라는 가정을 하기는 했지만 이 작품은 길어질 때 더 좋아질 수 있는 소설이다. 일례로 위에서 쿄코라는 캐릭터의 발전 가능성에 대해서 말했다. 아리의 어린 시절에 발생한 하나의 짧고 강한 사건을 다루며 이 작품은 끝났지만, 중편이나 장편으로 발전시킨다면 아리와 쿄코의 관계를 중심으로 소설을 전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쿄코는 단편 <아리>에서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어른을 상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또한 결정적인 아리의 비밀을 끝까지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쿄코가 성인이 된다면 어떨까? 아리의 비밀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아리가 흡혈귀라는 소식을 들은 쿄코는 적잖이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 전환점에서 쿄코는 아리의 편을 들까. 아니면 완전히 아리에게서 돌아서 어머니인 이치고의 편을 들까. 쿄코에게도 자신의 정체를 분명히 해야 하는 시기가 올 것이다. 이 지점에서 쿄코가 하는 선택에 따라 소설의 색은 분명히 바뀔 수 있다.
쿄코의 부모는 모두 흡혈귀의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이는 쿄코가 아리의 친구였다는 과거를 순식간에 뒤집을 수있는 요소이다. 쿄코가 아리의 적으로 돌아서는 건 한순간이 될 수 있다. 추가로, 각 인물들의 연결고리가 단단하게 이어진다면 좋겠다. 소설에서 드러나지 않은 이치고의 과거와 아리 아버지의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호성의 이야기 등 단편 안에서 다뤄지지 않은 인물들의 숨겨진 서사를 통해 소설이 주는 느낌은 분명하고 다양해질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매력적이었던 부분을 한 군데 더 뽑자면 이치고와 아리의 할아버지인 천호성을 묘사할 때 사용되었던 ‘기계 장치’들을 말할 수 있다. 순사이자 기술자인 이치고가 자동인형을 만들어 집안 곳곳을 정리하거나 쿄코를 돌보게 하는 모습은 초기의 로봇을 연상시킨다. 또한 천호성의 몸 역시 의체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장면을 확장한다면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편의 ‘SF’가 완성될 가능성이 보인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펼쳐질, 흡혈귀가 주인공인 SF는 어떤 느낌일까.
마지막으로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캐릭터의 쓰임이었다.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게 된 한 명의 독자로서 더 많은 인물을 만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조은별 작가는 인물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소설을 쓴다는 생각이 든다. 한 편의 소설로 단정지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단편 <아리>가 보여준 인물들은 마치 꼭 맞는 퍼즐처럼 제 자리에 들어맞았다. 긴 소설은 더 넓은 공간과 더 많은 인물을, 더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 단편 <아리>는 길이가 늘어날 때 더 반짝일 수 있는 작품으로 보인다.
<아리>의 20개 챕터가 맞물리는 이음매가 아주 단단했다. 그리고 각각의 이야기를 이루는 구성 요소들의 발전 가능성 또한 좋았다. 단편 자체로 충분히 흥미로운 이 이야기에 욕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애정이 생겨 감상 뒤의 이야기를 괜히 덧붙여 보았다. 리뷰를 쓰는 내내 아리라는 이름을 가진 특별한 친구와 조선 곳곳을 비밀스럽게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 감상은 좋은 작품을 만났다는 기쁨에 우주를 유영하고 있는 내 마음을 간신히 붙들어, 가장(假裝)한 진지함을 가지고 쓴 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