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인공지능이 쓴 소설이 현실화된 지금이지만, ‘인공지능이 창조성(creativity)의 영역까지 침범할 수 있을까?’는 한결 더 깊은 영역의 질문일 것이다. 컴퓨터와 인간의 사유 방식을 비교하자면, 바닷가에서 잃어버린 반지를 찾을 때에 사람은 자신의 발자국을 되짚어 돌아가며 반지를 추적하여 찾아낸다고 하면 컴퓨터는 포크레인과 덤프트럭을 끌고 와서 모래밭을 전부 헤집어 찾아내는 쪽에 가깝다고 한다. 현대의 인공지능은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고 그중에 최적을 찾아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단계에까지 이르러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 모래밭의 모래는 우리가 아는 모래이고, 인공지능이 생산해내는 이야기도 세상에 없는 것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비밀유지각서 해제」는 이야기를 생산하는 인공지능 자판기를 주인공으로 등판시킨 단편이다. 이야기를 뽑아내는 자판기 ‘세헤라자데’, 애칭 ‘헤라’는 여러 카테고리 버튼을 가지고 있고, 각각의 카테고리는 인물, 배경, 시점, 사건, 장르 등등 세세하게 분류되어 사람이 자신의 선택을 마치고 나면 이야기를 토해낸다. 주인공은 헤라의 회사에 소속되어 헤라가 만들어낸 이야기에 자신의 색깔을 담아서 다시 쓰는 직업을 갖게 된 작가이다. 월급을 받으며 마음껏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에 놓여서 기뻐했던 것도 잠시, 자판기의 카테고리를 통해 뽑아낸 이야기를 차별성 있게 고쳐 쓰는 일에 주인공은 점차 지쳐간다. 입사 초반의 반짝반짝함을 되살리라며 자신을 독려하는 편집장의 말에도 한숨만 나올 뿐이다. 그러던 중에 나는, 신입 작가인 진주 씨와 말을 나누게 되는데…….
「비밀유지각서 해제」에서 출발해서, 「제우스- 비밀유지 각서 해제2」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엄청난 굴곡이 있거나 굉장한 스릴이 넘치지는 않지만 흥미진진하다. 여러 작가들이 헤라의 글을 받아써서 자신만의 개성을 첨가하며 수정하고 또 수정할수록 헤라는 점차 완벽해지고, 마침내 헤라의 글은 단순히 인공지능이 쓴 것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 없는 수준을 넘어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수준에까지 이른다. 하지만 고흐의 터치를 흉내 낸 AI가 그림을 그리고, 빅데이터를 통해 인공지능이 쓴 소설이 공모전을 통과한다고 해서 과연 우리는 인공지능이 예술의 영역을 넘었다고 볼 수 있을까? 중간에 등장하는 편집장의 대사가 몹시 인상적이다. “이런 클리셰는 누구나 다 알고 있고 헤라도 쓸 수 있는 거라니까. 그것만 보려고 하는 사람은 없어. 그 이상을 원한다고. 그 이상.” 학자들은 인공지능의 발달이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는 특이점이 다가오고 있다고 예측하고 있다. 언젠가 정말 그런 강력한 인공지능이 출현한다면 그 인공지능은 새로운 이야기를 써낼 수 있을까? 우리가 원하는 바로 그 이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