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40년째가 되는 날에 자네에게 돌아와서 청을 하나 하겠네. 자네의 영혼이나 마음을 원하지도 않을 거고, 자네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거라면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겠어. 만일 자네가 그 청을 들어주면 우리 거래는 끝나는 거고, 만일 들어주지 않으면 자네를 데리고 가겠네. 어때?”
영혼을 내놓길 거부하는 청년 제르베르에게 악마 루시퍼는 앞으로 쭉 승승장구하도록 밀어주겠다면서 위와 같은 조건을 내건다. 이를 수락한 제르베르는 대수도원장, 주교, 대주교, 추기경을 거쳐 999년 교황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다음 해에 세상이 멸망하리란 대재앙설이 세간에 퍼지는 사이 마침내 약속의 날이 다가온다.
‘악마 교황’이란 제목에서 무언가 어두침침하거나 묵시록적인 분위기를 상상했는가? 가톨릭에서 세족식 후 교황의 발에 입맞추는 의식의 기원을 재해석한 이 단편은 오히려 시종일관 수다스럽고 위트가 넘치는 작품이다. 마법서를 즐겨 읽는 교황에서부터 악마에게 굽실대는 추기경까지, 130년 전의 작품이라 믿기 힘든 불경한 상상력을 느껴 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