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시작은 지구를 침공한 괴수였다. 평온한 지구의 일상에 대괴수들이 나타나고, 지구인들은 혼란에 휩싸인다. 공군 전투기가 와도 꿈쩍하지 않는 이 대괴수에게 강적이 나타난다. 바로 무쇠 강철 로봇. 지구인의 힘으로 만들어낸 대괴수용 로봇이다. 이 순간, 우리는 영화 하나를 떠올리게 된다. 바로 ‘퍼시픽 림’이다.
길예르모 델토로 감독의 ‘퍼시픽 림’은 아직도 회자되는 거대 로봇 영화이다. 이 소설 ‘우리는 먼 곳까지 가지 않는다’는 도입부에서 마치 ‘퍼시픽 림’의 영상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신나게 건물은 파괴되고 괴수는 발악하며 로봇은 활약한다. 그리고 최후에 괴수를 결단내는 로봇을 보며, 우리 지구인들은 ‘안도감’과 ‘즐거움’을 느낀다.
하지만 여기, 작중 화자인 주인공은 전혀 그런 마음이 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지구에 찾아온 외계인이자 괴수를 내려보낸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은하제국에서 미지의 행성을 탐색하러 온 군인인 ‘나’는 불행한 사고로 자리를 비운 작전 참모 대신 지구에 보낸 탐사 로봇(괴수)들의 상황을 본부장에게 보고하러 와 있다. 작전 참모는 지구의 미개함을 우습게 여기고 강하했다가 소식이 끊어졌고, 화자인 ‘나’는 전임자의 거듭된 작전 실패까지 뒤집어쓰고 본부장에게 신나게 깨지고 있다.
빡빡한 제국의 규정 대로 하라고 끊임없이 요구하면서도 왜 작전은 실패하냐고 추궁받고, 개발에 대한 질책과 새로운 작전에 대한 과중한 업무로 차라리 자살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나’의 모습에서 독자는 외계의 장교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다크서클 가득한 개발자를 떠올리고, 안쓰러워한다. 그리하여, 독자는 주인공을 응원해야 하나 아니면 지구의 로봇을 응원해야 하나 묘한 갈등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게 나름의 재미이다.
고작 2회 진행되었지만, 지구에 탐사 로봇(괴수)을 내려보내는 작전을 수행하는 ‘나’와 지구 로봇의 대활약은 다음편을 기다리게 만드는 주요 요소이다.
작가는 스스로 ‘퍼시픽 림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이라는 묘사를 하며 ‘퍼시픽 림’을 대놓고 오마주하면서도 아서 C. 클라크의 단편들 ‘지구에서 퇴각하라’, ‘원주민과의 분쟁’, ‘과학의 패배’ 등을 떠올리게 만든다. 외계와 지구인의 싸움, 선의의 외계인과 오인한 지구인, 그리고 거대 괴수와 거대 로봇의 싸움. 도대체 어느 것 하나 놓칠 재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