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One day at a time’의 싱글맘이 전역 후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불현듯 「Broken Flower」의 이름 없는 두 주인공이 떠올랐다. 전쟁이 끝난 후 수년 만에 상상할 수 없던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된 이들의 황폐한 이야기가. 드라마 속 인물 역시 전시 후유증으로 자신의 트라우마를 뒤늦게 깨닫고 고통스럽지만 천천히 삶의 모습을 받아들여나가는데, 이 소설은 아시다시피 더욱 깊고 독하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옛 전우를 만나게 된 그 순간부터, 작중 설정만으로도 떠올릴 수 있는 예상된 서사를 과감히 회피하며 나아가기 때문이다. 누구도 함부로 구원을 갈망하거나 시도하지 않으며, 부서진 상태로 남은 삶의 모양을 그저 담담히 그려낼 뿐이다. 지난 추천평에서처럼 다시 한 번 스티븐 킹의 이야기로 마무리를 해보자면, ‘인생은 도랑에 처박혀 있는 녹슨 휠캡과도 같고 그런 인생은 멈출 줄 모르는 것’이므로.
다시 보는 베스트 추천작
부서진 상태로 남은 삶의 모양을 그리다
2017년 9월 1차 편집부 추천작
폐허를 맴도는 남은 자들의 삶, 그 굴곡의 한가운데에서
전쟁이 끝난 뒤 군장교로 복무하던 ‘나’는 상관에게 이끌려 특이하다고 소문난 창관을 찾는다. 이윽고 안내받은 그 방에는 전쟁 중 불의의 사고로 퇴역했던 옛 전우이자 스승,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자 친구, 그리고 첫사랑이라 여겼던 ‘그녀’가 있었다. 5년 만의 재회였다. 종전 후 사방을 수소문하며 찾아다녀도 찾을 수 없던 그녀가, 좀처럼 기억할 수 없던 모습으로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 작품은 꽤나 지독하다. 한번 읽기 시작하면 음울하고 날선 폐허의 한가운데로 금세 마음 한구석을 단단히 저당 잡힌다. 그 누구의 이름도 등장하지 않고 그 어떤 감정도 제대로 걸러지지 못하는 것처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이미지는 폐허 그 자체다. 불행의 거래를 철저히 차단하고, 감정의 우위를 한 치도 용납할 수 없어 줄곧 발악하는 삶. 망가진 몸과 마음으로 뒤섞이는 전희마저도 비극의 심상으로 와 닿을 만큼 건조하고 황량하다. 더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는 존재들,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버티는 삶들을, 그저 담담히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마치 우리가 인생의 지난한 굴곡들을 반복해 살고 있는 것처럼.
부서지고 남은 꽃. 부서진 꽃 곁에 멈춘, 부서진 꽃 같은 사랑. 제목에 깃든 ‘꽃’의 심상은 다소 고전적이고 곳곳에서 변주되는 이미지는 지나치게 익숙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구원과 치유를 무작정 강조하지 않는 이 폐허의 이야기가 마음 깊이 남는다. 완결성을 바라지 않은 채, 과정에 그저 몸을 맡기는 것. 또 작가의 의도가 다분한 소제목의 변화로 서사를 곱씹어 보는 것도 좋겠다. 가제로 시작된 이야기는 공백과 무용의 시기를 지나며 원제로 다시 돌아오고, 이야기의 흐름 또한 이를 따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을 읽는 동안 끔찍한 사고 후유증에 시달리던 스티븐 킹이 자신의 경험을 투영시켜 써내려간 소설 『듀마 키』의 한 대목이 문득 떠올랐다.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도 전하고 싶은 문장으로 모호한 추천평의 끝을 갈음해본다. “아무튼 당신 뜻대로 해요. 그동안 부디 당신이 삶을 살고 삶이 당신을 살아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