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은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서 일어났다. 잠시 영문을 몰라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여기는 어디고 나는 왜 이곳에 있을까. 샷시문 위에 난 불투명한 유리창에서 새벽의 빛이 스며들었다. 추위에 굽은 손가락으로 문을 열었다. 축축한 새벽공기가 폐부에 스며들었다. 삐삐. 청소차가 좁은 골목길을 지나친다.
연은 뒤늦게 자신이 나온 곳이 1층 창고라는 걸 깨달았다.
가파른 2층 계단을 오르자 남자의 코고는 소리를 들었다. 문은 채 닫히지도 않았다. 조심히 그 문을 열자 거실바닥을 뒹구는 소주병과 대자로 누워 자는 석철이 바로 보였다. 잠시 주저하던 그녀는 조심히 발을 옮겨 안방으로 갔다. 그리고 연방 뒤를 보며 장롱에서 가방을 꺼냈다. 일반 가방보다 조금 컸지만, 한 손에 들수있을 정도로 가벼웠다. 언제고 급히 도망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한 가방이었다.
드르렁, 커헉.
숨을 참았다. 그가 깼을까? 그런 그가 이곳으로 들이닥치지 않을까? 귀를 기울인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장이 타들어가는 기분이다.
피유, 드르렁.
잠시 뒤에 들리는 소리에 그녀도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잠시 고민을 하다가 한켠에 걸린 베이지색 트렌치 코트를 꺼내 입었다.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장롱 문을 닫자 화장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몇 번이나 봐도 익숙하지 않은 흉을 마주할때마다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걸 애써 참는다. 이내 그녀는 화장대 서랍에서 선글라스를 찾았다. 집어드는 손등이 붉게 일그러졌다.
거실로 나온 연은 모로 누운 석철의 등을 힐끗거렸다. 언제부터인지 코를 골지 않았다. 탁, 데구루루. 그를 보고 걸음을 옮기다 소주병이 발에 채였다. 바닥을 구르던 병이 벽에 부딪혀 멈췄다. 파르르 몸을 떠는 연은 눈도 감지 못하고 석철의 등만 쳐다봤다. 금방이라도 더벅머리가 불쑥 솟아오를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자 그녀는 신발을 신고 집을 뛰쳐나왔다.
기차역.
연은 낡은 트렌치 코트 깃을 잔뜩 세우고 얼굴을 그 안에 숨겼다. 이미 초록빛이 도는 스카프를 목과 코까지 친친 감은 상태였다. 눈가를 가릴 잠자리 선글라스까지 낀 상태로 연은 기차에 올랐다.
마지막 꽃샘추위에 기차 안은 히터의 열기로 후텁지근했다. 평일의 아침, 여행보다는 일의 목적으로 하행선을 탄 사람이 몇 명 있다. 저마다 무료하고 피곤한 표정으로 창밖을 보다가 들어서는 연을 흘깃거렸다. 그녀를 보는 그들의 눈에 잠시나마 호기심이 드러났다. 연은 그 눈빛에 잔뜩 몸을 움츠리고 코트 깃을 잡아 위로 끌어올렸다. 오른손에 든 옷가방이 무척 무거웠다.
자리에 앉았어도 연은 연방 주위를 살폈다. 플랫폼에서 잰걸음으로 기차에 오르는 사람들을 살폈고, 자신이 있는 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봤다. 덜컹이며 기차가 움직였다.
연은 마지막까지 플랫폼과 계단을 노려본다. 익숙한 풍경이 뒤로 밀려갔다. 메마른 회색의 건물이 점차 빠르게 사라지고 앙상한 가지가 드러난 나무들과 채 녹지 않은 눈이 곳곳에 있는 산의 풍경이 나타났다. 기차가 터널로 들어가자 사위가 어두워진 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 연은 너무 낯설고 애달파 고개를 돌려버렸다.
따뜻한 공기가 언 몸을 녹이자 밤새 긴장했던 어깨에서 천천히 힘이 빠졌다. 앞으로 숙였던 몸도 좌석 등받이에 기댔다. 기차가 레일 위를 달리는 규칙적인 소음에 연의 두 눈이 자꾸 감겼다. 창백한 햇살이 그녀 위에 쏟아졌다. 텅 빈 들판에 잿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다시 터널과 암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