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영웅홍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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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해요?”

“아니. 슈퍼 생리해.”

“하하. 뭐예요, 그게.”

정말이지. 그때 그 말을 잘 들었어야 했는데 말이에요.

* * *

기절할 것 같은 격통 속에서. 아니 격통 때문에 기절에서 깨어나는데 그냥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더라고요. 원래 기절했다 깨어나면 다 이러나요?

“여자들은 이기적이야.”

목소리가 들리더군요. 곰인형의 탈을 쓴 남자의 비장한 한마디. 제가 눈을 뜬 것을 보고는 말을 꺼낸 것 같아요. 아마 아까부터 멘트 준비하고 있었나 본데.

“남자들은 그걸 알아야 해.”

아픔이 가시니까 주변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곰인형의 탈을 쓴 테러리스트. 쇠사슬에 묶인 저. 어제 산 선물상자는 제 발밑에 놓여 있고. 불 어두운 공장. 그리고 곳곳에 나뒹굴고 있는 장난감들. 아니다. 나뒹굴고 있다는 표현은 너무 박하죠.

방을 빙 둘러 일주하는 기차모형과 그 레일 주변에 도시를 이루고 있는 블럭 장난감들. 적재적소에 배치된 양철로봇과 공룡인형. 이들의 싸움을 지원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는 탱크와 비행기 모형. 그리고 그 외곽 지역을 지키고 있는 소방차와 경찰차.

꽤 멋졌거든요. 그 사이에 쇠사슬로 묶인 나란 사람은 이 장난감 왕국에 좀 과다한 신화적 조미료가 될 것 같기는 하지만요.

“네 인생도 여자 잘못 만나서 끝나는 거고.”

저는 신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어요. 아. 동의했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고개를 저으려고 얼굴을 들었는데 목에 힘이 빠져서. 사실 저라고 상황파악이 된 건 아니거든요.

아마도 어젯밤쯤 선물 상자를 들고 집에 쓸쓸히 돌아오는 길에 누구한테 무척 리듬감 있게 맞았고 눈을 떠보니 쇠사슬에 묶여 곰인형 탈을 쓴 테러리스트에게 위협을 받고 있다는 정도만 아는 거라.

“동의하지?”

“……아저씨 장난감 취향에는요.”

이번에는 테러리스트가 고개를 끄덕였죠. 커다란 곰인형 탈을 쓴 덕분에 조금 귀여웠는데. 악당들은 어쨌든 인정욕구가 쎈 사람들일 게야. 뭐 이런 생각마저 들더군요.

“학생이 눈이 좀 있네.”

테러리스트는 뒤뚱뒤뚱 그 곰인형 탈로도 미처 다 감싸지 못한 엉덩이를 흔들면서 제 앞으로 다가왔어요. 그러고는 털썩, 주저앉아 제 어깨를 토닥였죠.

“말해봐. 너. 홍양이랑 아는 사이지? 그 여자랑 무슨 사이인데? 여자 때문에 네 인생이 끝나게 되었는데. 그 여자에 대한 한풀이 정도는 해야 할 거 아냐?”

“홍양……?”

“그래. 홍양.”

아아. 역시. 나를 납치한 이유가 그거구나. 그제야 납득이 가더라고요. 홍양 때문이었어. 그런 이유라면. 이해할 만하죠. 배울 만큼 배운 성인이라면야 그 정도야. 고백하자면 저도 홍양 때문이라면 뭐든지 할 거라서요. 사람도 때릴지도 몰라.

어쨌든. 그래서 이 홍양이라는 아가씨가 누구시냐. 도대체 얼마나 핫한 아가씨이시기에 이렇게 곰인형의 탈을 쓴 테러리스트가 저를 납치해 가면서까지 그 뒤를 쫓고 있느냐.

남들이 다 아는 식으로 말하자면 21세기 최초로 대한민국 일산에 나타난 슈퍼히어로시죠. 아니. 여자니까 슈퍼히로인인가. 언제나 헷갈리는 단어인데요.

어쨌든 유명하잖아요. 널따란 붉은 천으로 몸 전체를 가리고 일산 전역을 종횡무진 휩쓸면서 불도 끄고 열차충돌도 막고 사람도 구하는 그 아가씨.

연령 불명에 거주지 불명. 그나마 성별만은 목소리 덕분에 여자라고 판명이 나기는 했지만. 이름도 몰라 성도 몰라. 트레이드마크인 붉은 망토 덕에 홍양이라는 별명이 붙은.

쏟아지는 돌무더기를 맞고도 멀쩡하고 빌딩을 길에서 옥상까지 점프로 올라가고 슈퍼파워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정체불명의 적수공권 그 아가씨.

홍양.

“말해봐. 둘이 그날 같이 있었잖아. 어떻게 아는 사이인데?”

“그거 이야기가…… 꽤 구질구질한데요.”

뭐. 테러리스트 말마따나 홍양을 만나고 제 인생이 끝이 날지야 두고볼 일이지만요. 그래도요. 정말 많은 것들이 시작되기도 했거든요. 예를 들자면 글쎄다. 연애라든가요.

* * *

이야기는 삼 개월 전. 영자 씨한테 투덜거린 날부터 시작할게요. 아. 영자 씨는 제가 사귄 첫 여자친구예요. 신영자. 저보다 나이는 두 살 많은데 누나라는 호칭이 어색하다고 그냥 이름에 씨를 붙여서 부르기로 합의를 봤죠.

“영자 씨. 어제는 많이 피곤했어요? 답장도 오늘 약속시간 직전에야 겨우 주시고.”

그날은 모처럼 봄이랍시고 산보를 나온 날이었어요. 조금 걷다가 카페 안에 들어가서 다퉜죠. 네? 아뇨. 이거 나름 까칠하게 한 건데요. 완전 배에서부터 힘을 준 목소리였는데요.

영자 씨는 그러고 보니 그랬네―하는 투로 어깨를 으쓱였어요. 얇은 팔이 살짝 올라갔다 내려갔죠. 그날 아마 회색빛의 후드 달린 티를 걸치고 왔던가.

영자 씨는 조금 작은 키지만 많이 말라서 낭창낭창한데다 제법 미인인데요. 아니. 예쁘다기보다는 귀엽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알았어요. 본론에 들어갈게요.

“그냥 좀 몸이 안 좋았어.”

영자 씨는 뭐랄까. 좀 쿨해요. 자기 할일만 다 하면 다 된 거 아니냐는 투죠. 저는 항상 거기에 끌려다니고요. 그게. 제가 워낙에 연애 초보라서.

“몸이 안 좋으시면 약속 미뤄도 되는데. 저번 달에도 말씀 없이 약속 당일에 잠수를 타셔서 저 속상했었잖아요. 그냥 꿈자리가 사나워서 나오기 싫다고 해도 이해하니까요. 다만 미리 연락만 해 주세요.”

“그래. 경각 씨 말이 맞아.”

네. 경각은 제 이름이에요. 무슨 닉네임 같죠? 하기야. 영자 씨도 그렇게 말했어요. 영자 씨랑은 트위터로 만났거든요. 영자 씨는 디자이너인데 제가 영자 씨 트위터 개인계정에 올라온 그림의 팬이 되어서 SNS로 연락했었죠.

어쩌다 그렇게 안면을 트게 되고 영화도 보고 그러다 사귀게 되었는데. 사귀는 날까지도 제가 본명을 ID로 쓰고 있다는 걸 모르더라고요. 아. 네. 본론.

어쨌든. 저는 투정을 부린 것이 미안해서 조용히 영자 씨의 손을 잡았어요. 그러자 영자 씨 몸에서 나는 그 체취. 아마 향수에 땀 냄새가 조금 섞였는지 살짝 비릿해서 더 생생한 냄새였는데. 딸기향이었어요. 그게 제 손으로 전해졌지요. 어. 이거 의외로 본론이에요.

“많이 아프지는 않으시고요? 그럴 때는 저한테 꼭 말해주세요. 우리 이렇게 서로 만나고 있으니까. 이런 문제에서 서로 기댈 정도의 관계는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나요?”

영자 씨는 살짝 웃고는 저를 다독였죠. 그러고는 약간 부끄럽다는 듯이. 말을 이었어요.

“맞아. 내가 잘못했지. 그런데 경각 씨가 이해를 해줬으면 해.”

“이해요?”

“응. 저번 달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그날이었거든. 내가 그날 즈음에는 예민해져서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상태일 때가 있어.”

그래요. 그날. 그 생각을 못했던 거예요. 가끔가다 대학 친구나 알바 동료가 생리 때 쉬는 모습을 보기는 했지만요. 이렇게 연인 사이가 된 것도 처음이었고 연인이 생리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것도 처음이어서.

“생리해요?”

“아니. 슈퍼 생리해.”

“하하. 뭐예요, 그게.”

정말이지. 그때 그 말을 잘 들었어야 했는데 말이에요.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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