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sis

  • 장르: 판타지, 역사 | 태그: #천사 #환생 #속죄
  • 평점×39 | 분량: 130매
  • 소개: 인간으로 태어난 천사와 지켜보는 천사의 죄갚음에 대하여- 뒷편인 몰락과 연결됩니다. 더보기

Dee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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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위 땅 아래, 영광, 영광, 영광—

아아 주여, 용서하지 마옵소서-
저는 제가 하고 있는 일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나이다.

데시스 (Deesis : 歎願 : entreaty)

러시아, 1237년.

방 안은 어두웠다. 아니, 당연한 일이다. 성인의 손바닥 두 개를 합친 것보다 약간 작은 유리 창문은 빛을 들이기엔 적합하지 않은 구조였고 그나마 그 위에 온도 유지를 위한 검은 벨벳 커튼이 드리워져 비밀스런 몸짓으로 태양의 시선을 가리웠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방 안을 밝히기 위해서는 짐승의 기름으로 만든 초가 필요했다. 물론 촛불은 너른 방안을 환하게 밝히기엔 적당치 않았다.

희미하게 비친 촛불이 거의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의 차가운 돌벽을 훑어내린다.

어둠 속에 몸을 맡기고 거대한 의자에 반쯤 파묻혀 있던 방의 주인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곧게 뻗은 다리는 원래부터 그리했다는 듯 어머니 대지에 버티고, 힘있게 선 허리에서 등으로 흐른 직선적 곡선을 타고 팔까지 여린 촛불이 흘러내렸다. 곧 그의 팔 끝을 장식하는 남자다운 손 끝에서 불꽃이 일어나 두 번째의 초에 옮겨 붙었다. 치익-하고 순간 밝게 타오른 촛불에 비친 남자의 얼굴은 단정하나 그만큼 차갑기 그지없었다.

훑어내린 돌벽에서 밖 바람 체온을 느낀 수증기가 반짝-하고 이슬로 굳는다.

남자는 부싯돌을 놓고 표정없는 얼굴로 다시 의자에 앉아 발치에 떨어진 곰 가죽을 추슬러 올렸다. 이제 그 손엔 우필(羽筆)이 쥐어졌다. 사각거리며 잉크와 양피지가 화합하는 소리가 곧 방안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이슬은 방울지어 굴러떨어진 촛농처럼 어머니 대지로 소환된다.

“… 님.”

누군가 남자를 부르는 소리를 들은 듯했다.

“…루스 님?”

익숙한 소리. …츠-라는, 떠올리는 것조차 싫을만큼 풋내나는 이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권위의 상징. 남자는 본청으로 올리기 위한 문서의 작성을 멈추고 추켜세워진 권위에 답했다.

“들어와, 유리예비치. 무슨 일이지?”
“편지가 하나 도착했습니다.”
“편지라면 그 전 것들과 함께 저녁시간에 함께 보도록 두면 되지 않나.”

남자의 은회색 눈동자에 질책의 빛이 서리자 편지를 가져온 남자가 의식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한 것입니다.”

대지에서 하늘로, 그러나 하늘에서 대지로도- 옛 일을 되풀이하듯 생명이 태어난다.

시선이 편지로 향해, 익숙한 이름을 확인하고는 눈이 가늘어졌다. 다시 우필이 움직이는 소리가 이어진다.

“아아, 그녀의 것이군. 여유가 없으니 항상 말하는 그곳에 가져다 두도록. 나중에 시간이 나면 읽어보도록 하겠다.”
“네, 그럼.”

다시 방 안의 사람은 쉴새없이 움직이는 우필의 모습으로 혼자가 되었다. 잉크를 찍어나가고, 양피지에 생각을 새긴다. 그러다 예상치 못하게 끼어든 상념에 펜이 의도하지 않은 움직임으로 작은 잉크방울을 새겼다. 남자는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잉크를 흡수하기 위한 올 가는 천조각은 창가에 있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리고 목적지. 천을 주워올리다 스친 손길에 커튼이 회색빛 흐린 빛줄기를 쏟아내었다. 남자는 눈을 찡그리다 천을 조심스런 손길로 들어올렸다.

「…릴츠.」

흐린 날씨에도 눈이 부리도록 시려, 목소리가 메아리쳐 얼음조각처럼 부숴졌다. 남자는 그 호칭을 싫어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계속 그렇게 불렀다. 관계, 시간, 정점, 적, 동지 – 아무 것도 아니지만 중요한 것, 버릴 수 없으나 가지고 싶지도 않은 것. 그리하여 그는 예전에 그 호칭을 신경쓰는 자신을 묻어버렸다. 그런 그녀에게서 편지가 왔다고 한다.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갈등이 극에 달하고, 동서 양쪽에서 말발굽 소리로 혼란스러운 이 시점에. 그것에 대한 이야기일까.
창 밖에서 회색빛 구름이 뭉클거리며 얼음 결정의 형태로 흐린 태양을 가려버렸다. 남자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눈이… 내리려는가-”

하지만 그 생명은 곧, 이 땅에서 사라질 것이다.
신이 만든 것 중 가장 순수하며 가장 죄 많은 최초의 창조물이.

* * *

러시아, 1225년.

안드레이 이바노비치(Andrei Ivanobich)는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하다. 지금 그가 서성이고 있는 회랑 너머의 방에서, 그보다 두 살 더 많은 그의 사랑하는 아내가 셋째이자 첫째인 아이를 낳고 있었으니 말이다. 처음 태어난 아이는 몸이 약해 열흘을 넘기지 못했고, 튼튼하게 태어나 안심하고 있었던 둘째는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돌도 되지 않은 어느 날 원인불명의 돌연사를 맞이했었다. 그렇기에 이번 아이는 그들 부부에게 있어서 마지막 기회와도 같은 것. 그는 두 손을 모아쥐고 주님께 짧게, 그러나 강하게 기원했다.

‘주여, 이번에도 저희에게 그런 슬픔을 안겨주실 바엔 차라리 그저 저희 목숨을 거두소서.’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방 너머에서 으엥으엥하고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바노비치는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주님과 모꼬쉬(Mokoshi), 뻬룬(Perun) 등 그가 아는 모든 신들께 감사드리기 시작했다.

“뭐하십니까- 나으리, 산모와 아이도 안 보시고요?”

아이를 받은 노파가 고개를 내밀고 그를 부른다. 그는 만면에 환히 웃음을 띄며 방안으로 날 듯이 뛰어들어갔다. 약간 부은 얼굴이 축축히 땀으로 젖은 아내가 둘둘 말린 강보를 안고 출산의 고통도 이미 잊었다는 듯 배시시 웃어보이고 있었다.

“아아- 정말이지 수고했어, 타쉬카. 어디 보자, 이 아이가 내 아이란 말이지? 이 아이가 우리 아이란 말이지?”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해 떨리는 손으로 강보를 조금씩, 조금씩 열어 보았다. 그곳에 아이가 있었다- 아직 뱃속의 흔적을 지우진 못했으나 머지 않아 천사같이 곱슬거릴 금발을 흩날리며 오동통한 흰 뺨을 부비대고 웃어줄 그의 자식이. 이바노비치는 자기도 모르게 주여, 감사합니다-를 입 밖으로 내어 외쳤다. 정말이지 이보다 더 행복한 날은 그의 인생에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이바노비치는 아이를 조심스레 그 어미 곁에 내려놓고 포대기를 처음처럼 여미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아이가 눈을 떠 시선이 마주쳤다. 파란, 얼음 낀 가을 하늘처럼 파아란 눈이었다.

“어머니를 닮았군, 파란 눈이라니. 타쉬카, 정말 수고했어. 아들이야, 딸이야?”

아내 나탈리야(Natalia)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미소지어 보였다.

“안드루샤, 당신… 아들이나 딸에 연연하는 사람 아니죠? 물론 우리에겐 우리의 모든 것을 이어갈 아들이 필요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태어난 아이를 미워하거나 하진 않을거죠?”
“그거야 당연하지! 우리가 얼마나 자식을 바랐는지는 모두가 다 알고 있잖아? 아들이든 딸이든 이 아이가 우리 아이인 건 변함없어. 그리고 난- 지금 당장 주님이 나타나 최후의 심판을 주관하신다 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행복하다고.”

강보를 세심하게 여미며 이바노비치가 대답했다. 아내의 태도로 이미 깨달았지만 그의 기쁨은 덜어지지 않았다. 아이는 몇이고 더 낳을 수도 있다- 이렇게 옆으로 와준 한 생명만 건강하게 자라준다면, 그래서 모든 뒤이은 자식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이름은 무엇으로 짓고 싶어요?”

아내의 물음에 이바노비치는 웃으며 대답했다.

“신부님께 여쭤봐야 알 일이지만, 어머니를 닮은 아이니 그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게 하고 싶은데. 하지만 축복 속에 태어난 아이니까 야냐(Yana)라고 짓고 싶기도 하고. 당신 생각은?”
“저도 야냐가 마음에 드네요.”

이제서야 피곤을 느끼는 듯 더 깊게 몸을 누인 나탈리야가 어린 딸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야냐, 야냐- 너는 축복받은 아이란다. 야냐-”

그러나,

“새로 태어난 생명의 이름은 미하일(Mikhail)로 하십시오.”

길고 우울한 얼굴의 이콘(icon) 아래, 같은 얼굴로 선언한 신부의 말에 이바노비치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보통 교구민의 뜻을 더 존중하여 이름을 정해준다던 라파일(Rafail) 신부이건만, 자식의 이름에 대한 부모의 권리보다 더 굳건한 결정권을 그 스스로 가지고 있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껏 지극히 부정한 이름이거나 이교도의 이름이 아닌 한 신부가 이런 자세를 취한 적은 없다 알고 있었던 이바노비치였기에, 그는 다소 우울한 얼굴로 질문했다.

“…제 자식의 이름이 부정합니까?”
“아니오, 부정하지 않습니다.”
“제 자식의 이름이 불합리합니까?”
“아니오, 불합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어떤 이유가 더 있냐고, 그리 외쳐묻고 싶었으나 신부에의 존중 때문에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거기에 라파일 신부는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한- 하지만 전혀 모르는 것을 말하는 듯한 얼굴로 부연했다.

“다만, 계시되었습니다.”

신부의 설명은 그것이 다였다. 그렇기에 딸에게 남자의 이름을 지어주어야 하는 것치고는 전혀 합당하지 않은 것 같은 설명을 듣고서도 더 물을 수 없어 이바노비치는 순응하기로 했다.

여자아이가 하나 태어났다. 남자의 이름을 가지고 살아야 할 여자아이가—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