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깨달음을 위해 오리온 외곽 지엽(枝葉)의 학자들이 세운 설명비(說明碑) 발췌문

  • 장르: SF | 태그: #재난 #기후위기 #조류 #괴생물체 #우주 #지구 #크리쳐
  • 분량: 88매
  • 소개: 거대한 보라색 조류가 지구를 덮친다. 유기체 시대의 종말이 도래한 이 행성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더보기

우리의 깨달음을 위해 오리온 외곽 지엽(枝葉)의 학자들이 세운 설명비(說明碑) 발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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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리고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기록한 것이다. 너희 모두는 이로부터 각자 교훈을 얻으라.

보라색 조류(潮流)는 가장 먼저 펜실베이니아 동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뉴욕과 필라델피아의 쓰레기 매립지 무덤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며. 그것은 분명한 목적을 가진 듯 움직였고, 분란을 찾아 헤매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분노, 부패, 발효, 쓰다 버린 콘돔, 그리고 깊은 사유의 악취를 풍겼다. 그것의 표면은 썩어 문드러진 흰 거품으로 들끓었고, 거대한 곰팡이 껍질들이 밀려드는 조류의 압력에 맞춰 생겨나고 찢어졌다.

그 솔기와 균열 사이로 그것의 본래 색이 언뜻언뜻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콩코드 포도를 연상시키는 푸른빛 도는 보라. 고대에는 오직 황제와 그의 측근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권력의 색이었다.

조던 시더스는 스쿨킬(Schuylkill) 협곡을 따라 흐르는 그것을 지켜보았다. 일부 구간에서는 협곡의 깊이가 40~50피트나 됐다. 비록 학교에서는 빈둥대는 학생이었지만, 조던은 눈치가 빠른 청년이었다. 그는 조류가 빙가먼 거리에 있는 파친코장을 삼켜버리면서도 자신의 학교에는 손도 대지 않는 것을 보고 곧 그것의 괴이함을 알아챘다. 그는 또한 조류가 필요할 때마다 계곡의 비탈을 따라 촉수를 뻗어 올리며 아주 체계적으로 길을 따라 있는 술집과 주류 판매점, 맥주 유통상과 담배 가게들을 흡수하는 것을 지켜봤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조류는 마약 거래소와 거리의 딜러들을 탐욕스럽게 찾아다녔고, 그들이 필사적으로 사용한 총기는 오히려 그 흐름을 더 빠르게 만들 뿐이었다.

조던의 여동생은―세상의 종말이 오지 않았다면 요리사가 되었을―조류의 기원을 이해한 첫 번째 인류였다.

“젤리야.” 그녀가 말했다. “난 늘 사용하지 않은 젤리 봉지들이 다 어디로 가는 건지 궁금했거든.”

그녀의 머리는 어깨에서 귀 밑까지는 붉은색이었지만, 그 위는 검정색이었다. 몇 달 전쯤부터 사실상 삶을 포기한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조류가 계곡을 집어삼키는 것을 지켜보며,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절망감이 틀리지 않았다고 느꼈다.

그녀는 영상을 녹화해 브이로그에 자신의 생각을 남겼고, 그 후로 그 어떤 것도 업로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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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메리 카운티 감독위원회 참모총장이 펜실베이니아 주지사와 나눈 통화 녹취록]

—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주지사님. 이런 형태의 오염 누출은 처음 봅니다. 계곡을 따라 흐르긴 하는데, 마음만 먹으면 오르막도 타고 올라갑니다.

— “마음만 먹으면”이라니, 무슨 뜻이오?

— 그게 문제입니다. 이건 그냥 아래로 흘러내리는 액체가 아닙니다. 뭔가를 ‘합니다’. 살아 있는 것처럼요.

— 정신이 제대로 붙어있는 사람으로 좀 바꿔주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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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류의 초기 목표는 사소하고 자기 탐닉적인 것처럼 보였다. 스쿨킬 강을 따라 내려가던 그것은 도심으로 향하는 대신 북 필라델피아 쪽으로 방향을 틀었고, 가는 길마다 파티 용품을 모으며 뉴저지를 가로질러 해안으로 가는 가장 짧은 경로를 택했다. 그것은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반 마일 너비의 땅을 완전히 초토화시켰다. 모든 것을 납작하게 눌러버렸고, 당연하게도 그 안에 존재하는 대부분을 삼켜버렸다. 전봇대는 그것이 가장 즐겨 쓰는 공성추가 되었다.

홍수가 지나간 자리마다 불길이 치솟았지만, 정작 조류 자체는 화염이나 극심한 열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종종 제련소와 주조소를 우회했고, 당국은 이 사실에 주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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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쯤 조류의 평균 속도는 시속 8마일 정도였다. 주류 창고와 부딪힐 때는 조금 느려졌고, 메스 암페타민 공장을 만나면 빨라졌다. 젓가락과 일회용 플라스틱 식기를 엮어 만든 정찰선들이 본체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덩어리들을 몇 마일 떨어진 곳까지 운반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이것이 어쩌면 조류가 가는 길목에 있는 쓰레기 매립지들을 깨어나게―사람들은 곧 이 사태를 ‘각성(Awakening)’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했을 지도 모른다. 곳곳에서 지류가 범람했다.

환경 재난에 대응이 느린 미국답게, 사건 발생 후 첫 72시간은 부정, 책임 공방, 그리고 상황 평가에 소비되었다. 불은 진압되었고, (살아남은) 도로들은 정비되었으며, 체육관이 파괴된 고등학교들은 경기 일정을 조정했다. 펜실베이니아 주방위군이 소집되었지만, 그들의 주된 임무는 약탈을 방지하고,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도로 복구를 돕는 것이었다.

뉴저지 주방위군은 해외에 파병된 상태였으므로, 그곳에서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당국과 언론은 이 정체불명의 홍수가 다른 평범한 홍수처럼 바다로 흘러가 사라지길 바랐다. 그들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조류가 해변으로 흘러가게 두었고, 정말로 조류는 베이 헤드와 비치 헤이븐, 두 곳의 해변을 덮쳤다. 해안가를 장악한 조류는 촉수를 바다로 뻗어 상어를 괴롭히거나, 해안가의 술집을 약탈했다.

불을 싫어한다고 알려졌음에도 곧 대마초와 햄프 연기가 점령지 전체를 뒤덮었다. 수 백개의 오래된 붐 박스가 폭발하듯 내지르는 음악 소리가 공기를 가득 메웠다. 매립지에서 되살아난 또 하나의 산물이었다.

소음은 한순간도 줄지 않았다. 보라색 조류에게는 안식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것은 축제를 즐기러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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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부터 우리 학자들이 ‘탈유기적 봄방학기(Post-Organic Spring Break)’라고 부르는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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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 샌즈 부동산 관리회사에 남겨진 음성 메시지―“이 끈적한 물질이 아직 우리 구역까지 내려오진 않았습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주택을 폐쇄해야 할 것 같습니다. 냄새가 너무 역해서 도저히 살 수가 없습니다. 가능하시다면 사람을 좀 보내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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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형태의 조류, 이른바 ‘콩코드 확산체(Concord Sprawls)’(이하 ‘보라색 조류’)는 햇빛을 즐겼고, 그 햇빛을―인류에게는―못된 장난의 연료로 삼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바다 위에서 코스튬 보석과 SUV들로 인공 암초를 쌓으며 즐거워했다.

지류들이 두 주요 지역에 합류하면서, 해당 지역의 조류가 끈적하게 부풀어 오르며 양 방향으로 몸집을 키웠다.

그러던 중, 폐쇄된 스태튼아일랜드의 프레시 킬스 매립지 전체가―수년 전 폐쇄되었음에도 불구하고―폭발하듯 깨어나 뉴저지 해안으로 향했다. 그것은 가는 길에 있는 모든 술집과 컨트리 클럽, 스트립 클럽 및 싸구려 선술집을 샅샅이 털어간 뒤에 퍼스 앰보이와 사우스 앰보이를 가로지르며 단 1센티미터도 남기지 않고 해안가 구석구석을 잠식해갔다. 그리고는 다른 보라색 조류들과 뒤섞인 채 애틀랜틱 시티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집어 삼켰다. 카지노 직원들은 도망쳤지만, 끈질기게 슬롯머신 손잡이를 붙잡으며 자신의 운을 시험하던 도박꾼들은 그곳에 남겨졌다. 그들의 운은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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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류 덩어리들이 제트스키를 타고 바다와 강을 누비더니, 곧 모터보트까지 몰았다. 그들은 해안경비대의 규정을 대놓고 조롱했으며, 경비정이 접근하거나 조사를 시도할 때마다 유독한 가스를 분출했다. 효과적으로 그들을 저지할 수단이 없었던 경비대는 결국 물러났다. 선박들은 해당 해역을 피하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 무렵 ‘해당 지역’의 범위는 아래로는 케이프메이까지, 위로는 델라웨어 만을 따라 컴벌랜드 카운티의 습지대로 확장되었다. 그곳은 원래도 배들이 온갖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는 곳이었다.

순식간에 수만 마리의 물새들이 그 지역을 떠났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