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연기

마지막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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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그 눈, 눈을 조심해.”

티끌하나 없는 바닥을 또각또각 걸어가며 카렌은 아이샤에게 당부했다. 오전에는 늘 상태가 좋은 매셔 부인이 간호사복을 알아보고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병동에서 가장 엄격하기로 소문난 간호사 답게 카렌은 무표정한 얼굴로 인사를 받은 뒤 큰 키로 성큼성큼 걷는다. 그런 카렌을 따라잡기 위해 애쓰며 아이샤는 다시 한번 환자 차트를 살펴보았다. 이미 여러번 보아 익숙한 사내의 얼굴이 나타났다.

데이비드 조지 맥그로운, 1917년 7월 4일 생.

입원일자 1940년 9월 19일. 연극공연 중 떨어진 무대 조명판에 전두엽 부상. 이후 뇌간질 및 부정기적 발작.

온순하고 다정한 성격. 지능 평균이상. 공격성 전혀 없음. 모든 치료 활동에 협조적 참여.

그러나 본인이 미치지 않았다고 굳게 믿고 있음. 두번의 탈출 전력.

(주의: 연극배우 출신으로 연기가 매우 뛰어남. 면담시 주의할 것.)

“맥그로운씨는 그럼 여기 4년 계셨군요.”

“그래, 하지만 기간 대비 가장 많이 탈출을 시도한 환자지. 겉보기랑 달라. 조심해야해.”

카렌이 걸음을 뚝 멈췄다. 아이샤는 얼른 그녀 뒤에 붙어섰다. 205호 명패를 확인한 뒤 카렌은 두번 노크 한 후 문을 열었다.

방은 여느 방들과 다름없이 하얗고 깔끔했다. 맥그로운씨는 왼편 침대옆에 바짝 붙어서 창을 열고 창살 너머로 나무를 관찰 중이었다. 역광을 받아 그의 그림자가 길게 방 바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큰 덩치의 카렌에 가려 아이샤에겐 그의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카락과 호리호리한 몸의 오른편밖엔 보이지 않았다.

“안녕, 데이브. 좋은 아침이에요. 뭘 보고 있어요?”

“안녕 카렌. 나그네비둘기를 보고 있었어요. 그나저나 승진했다고 들었어요. 이제 내실로 가시겠군요.”

“맞아요. 그래서 새로운 당신의 친구를 소개하려고요. 아이샤, 데이비드에요. 데이브, 이쪽은 아이샤 매드로프요.”

그러며 카렌은 몸을 틀어 데이비드와 아이샤 사이에서 한걸음 물러났다. 데이비드는 천천히 창에서 얼굴을 떼고 몸을 돌려세웠다. 동쪽에 환한 햇살이 그의 구부러진 머리카락과 반듯한 이마, 깊은 아이홀과 오똑한 콧날을 지나 매끈한 뺨과 강인한 턱을 비췄다. 마른 듯 가늘고 긴 체형에 비해 목이 굵은 남자였다. 싱긋 웃는 얼굴엔 개구쟁이 소년같은 느낌이 남아 있었다. 볼에 옴폭한 보조개가 인상적이었다. 그가 아이샤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맥그로운씨.”

“그냥 데이브라고 불러 주세요, 카렌처럼요. 저도 아이샤라고 부를께요. 괜찮죠?”

그러며 남자는 다시 한번 싱긋 웃었다. 창 밖의 하늘만큼이나 푸르고 푸른 그의 눈동자가 함께 싱긋 웃었다.

캘크라토 정신요양병원의 원장 어니스트 스토브 박사는 의사치고는 인문학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전기충격 요법, 기절요법, 체온조절요법 등 새로운 정신질환 치료 방법에 관심을 갖긴 했지만 동양적인 요법 – 명상, 요가 -등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한창 햇살이 좋거나 날이 좋을 때 환자들에게 한시간 가량의 산책 요법이 시행된 것도 스토브 박사가 온 이후부터였다.

그러나 간호사들에겐 이 시간이야말로 가장 긴장되는 시간이었다. 비교적 상태가 좋은 환자들만 참여하는 치료법이라고는 해도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발생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이샤 역시 두 눈을 크게 뜨고 느릿 느릿 정원을 산책하는 환자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눈이 아프겠어요. 하지만 매셔 부인은 괜찮을 겁니다. 그분은 주로 밤에 약해지거든요.”

아이샤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데이비드의 다부진 어깨와 툭 불거진 목젖이 눈에 들어왔다.

“제가 놀라게 해 드렸나요? 죄송해요 아이샤.”

“아니에요 데이브. 너무 집중했었나봐요. 인기척을 못 느꼈어요.”

“가만히 서서 한 곳만 보는 거, 힘들지 않으세요? 괜찮으시면 같이 걸을까요?”

아이샤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브는 한가로운 표정으로 뒷짐을 진 채 작은 그녀의 체구에 맞추어 천천히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참 멋진 곳이에요, 여기 캘크라토요.”

“그런데 왜 나가려고 하셨어요?”

환자가 병원을 칭찬하는 일은 드물다. 아이샤는 전혀 예상치 못한 데이브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데이브는 푸핫, 웃음을 터뜨렸다.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아니에요 아이샤. 제가 생각해도 웃긴 말이네요. 두번이나 도망치려 한 주제에 여기가 좋다고 했으니까요.”

그는 커다란 눈을 개구지게 찡끗한 뒤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제가 하는 말, 의사 선생님들께 말하지 않을거죠? 특히 독슨 박사님이요.”

아이샤의 갈색 눈에 순간 공포가 스쳤지만 호기심이 두려움을 이겼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날 봐요, 아이샤. 날 보고 솔직하게 말해줘요. 어때요, 내가 잘 생겼나요?”

아이샤는 고개를 들어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푸르른 신록의 싱그러운 빛 사이로 산들바람에 그의 곱슬머리가 나부끼고 있었다. 깍아낸 듯 매끈하고 균형이 잘 잡힌 얼굴, 또렷한 이목구비, 그리고 무엇보다 끝없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푸르고 푸른 눈.

“…네.”

아이샤는 어쩐지 부끄러워져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데이브는 호탕하게 웃더니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여 작은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내 잘난 외모는 모두 어머니 덕이죠. 어머니는 유명한 쇼걸이었어요. 얼마나 예뻤냐면, 무려 록펠러를 낚았죠.”

아이샤의 두 눈이 다시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이제 환자를 봐야 한다는 자신의 임무는 모두 잊은 채 놀란 얼굴로 데이브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난 열다섯살이 될 때까지도 몰랐어요. 그 많은 돈을 받고도 무대 위에서의 찬사를 잊지 못해 매일 술과 춤으로 밤을 세웠던 엄마가 죽기 진적에야 말해줬거든요. 엄마가 그렇게 간암으로 가지 않았다면 아마 아직도 모르고 있었겠죠.

‘넌 록펠러의 아들이야. 가서 네 몫을 찾아.’

엄마가 이미 자기 몫을 받아 몽땅 써버렸다는 것도 나중에 알았어요. 아무튼 엄마는 내가 록펠러 집안 사람이라는 걸 증명할 작은 사진 한장을 주었죠. 방금 관짝에서 나왔다해도 믿을 것 같은 록펠러와 눈이 부시게 예쁜 엄마가 갓난 아기를 안고 찍은 사진이었어요. 거기 있는 애가 나였던거죠.

나는 처음엔 전혀 찾아갈 생각이 없었어요. 나는 배우가 꿈이었거든요. 연극판을 기웃거리고 할리웃에 들어갈 길을 찾았죠.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조명판에 머리를 얻어맞기 전까지 말이에요.

사고를 당했고, 종종 전혀 기억할 수 없는 순간들이 왔어요. 무대엔 더 이상 설 수 없었죠. 생각해보세요, 어떤 관객이 연기하다말고 졸도하는 배우를 보고 싶겠어요? 모든 장르가 호러로 변할텐데 말이에요.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지고, 치료비도 부담이 되던 중 엄마의 말이 생각났어요. 그래서, 밑져야 본전이다 생각하고 그 석유왕 집을 찾아갔죠.

그게 잘못이었어요. 나는 분명 간질과 발작 증상은 있어요. 그건 나도 인정해요. 하지만 미치진 않았거든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나를 여기 넣어버렸어요. 정신병원에. 여기 출신이 되면, 내가 세상에다 대고 무슨 말을 하더라도 아무도 믿지 않을테니까요.”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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