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복도는 캄캄했다. 하기 싫은 일은 쌓여 있는데 제대로 집중할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다. 난방도 되지 않는 연구실 창틈으로는 바람이 들어왔다. 프린터는 하루 종일 말썽을 부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까지 연구동에 남아 있는 건 그녀 자신뿐이었다. 연휴가 코앞이니까. 연정은 한참 동안 코를 훌쩍이며 엎드려 있었다. 팔이 저릴 때쯤 고개를 들었다.
‘커피나 한 잔 내려야겠다.’
따뜻한 음료로 속을 채우는 건 재수 시절부터 들인 버릇이었다. 그렇게 하면 마음 안쪽에 자라난 따갑고 껄끄러운 것들이 조금은 무뎌지는 기분이 들었다. 연정은 재수학원으로 향하던 1호선 지하철의 풍경을 아직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반쯤은 졸면서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 등산복 차림의 아줌마 아저씨들, 야구잠바 입은 대학교 새내기들. 연정은 그들 중에 가장 천대받는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자신이 저금통 속을 굴러다니는 10원짜리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만원 전동차 안에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녀는 독하게 공부했다. 벙어리처럼 문제집만 풀면서 입에는 뜨거운 커피를 달고 살았다. 따뜻한 무언가가 마음에 눌어붙은 쓸쓸함을 조금은 녹여 줄 것 같았다. 그렇게 일 년을 견디고 얻은 자유는 며칠이 지나자 일상이 되었다.
합격 통지를 받았을 땐 정말로 느낌이 이상했다. 마치 거대한 폭발에 휘말린 기분이었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르던 기쁨이 가라앉은 자리에는 놀라울 만큼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연정은 새삼 깨달았다. 그녀에겐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좋아하는 것도 없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가라앉은 짐은 털어 버렸지만 그 빈자리를 채울 게 없다는 것을. 제법 이름값 있는 대학은 그녀를 지탱하던 막연한 목표와 동경심, 열등감과 경쟁의식을 무너뜨렸다. 이제 그녀의 삶을 움직이는 건 관성이었다. 학점 따라 결정한 전공, 아무 생각 없이 간 대학원, 학부 시절 때도 읽었던 논문, 늘 살던 대로 살아가는 것.
“거지같네.”
상념을 흘려보내던 연정이 중얼거렸다. 반향 없는 독백이 그녀를 더욱 고독하게 만들었다. 술 생각이 간절했지만 혼자 마시고 싶진 않았다. 그녀는 술보다도 상처 없는 사랑이 고팠다.
때마침 옷걸이에 걸어 둔 코트가 나지막이 우는 소리를 냈다. 연정은 코트 안주머니를 뒤져 자신의 휴대폰을 꺼냈다. 문자를 보낸 건 영빈이었다.
‘커피 한잔 하자.’
괜한 오해를 사는 건 달갑지 않았기에 연정은 어떻게 답을 할지 고민했다.
사실 그녀는 영빈이 싫지 않았다. 조금만 노력하면 어쩌면 사랑에 빠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망설이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은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시시껄렁한 놈들로 가득한 자신의 보잘것없는 추억이 싫었다.
연정은 일단 승낙을 유예하기로 결정했다. 답장을 보내는 대신 전화를 걸었다.
“문자 이제 봤어요. 저 오자마자 계속 커피 마셨는데.”
“커피 마시는 김에 얼굴이나 보자는 거지, 뭐.”
“알았어요. 올라오시면 전화해요.”
“지금 문 앞이야.”
희미하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연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문을 열자 마치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그가 서 있었다. 어깨가 젖은 걸 보니 밖에 눈이 오는 모양이었다.
“늦게까지 바쁘네.”
“바쁘진 않은데 일을 할 수가 없어요. 프린터가 망가졌거든요.”
영빈은 책상 위에 외투를 벗어 두고 복사기 겸용 프린터로 다가갔다. 연정은 빈 커피포트를 씻으며 어깨 너머로 그를 건너다보았다. 그의 둥그스름한 입꼬리는 언제나 선해 보인다. 순수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는 또래 남자들에 비해 옷을 잘 입는다. 옆을 바짝 치고 포마드를 발라 단정하게 넘긴 헤어스타일도 잘 어울렸다. 그 밖에는 모르겠다. 무난한 게 장점인 남자였다.
영빈은 한참 동안 프린터 디스플레이를 들여다보는가 싶더니 이내 정체불명의 버튼들을 눌러 댔다. 연정으로서는 그가 뭘 알고 누르는 건지, 아니면 그냥 색색 가지 버튼을 임의로 찔러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지켜보던 그녀가 한마디 거들었다.
“뭐가 걸렸다고 뜨던데. 오빠 공대생이잖아요. 한번 고쳐 봐요.”
“전자과가 프린터랑 무슨 상관이야.”
“전자 제품이잖아요. 수업 시간에 이런 거 안 배워요?”
그녀가 팔꿈치로 영빈을 쿡 찔렀다. 그녀의 장난기 어린 얼굴 위에 생글생글 웃음이 번졌다. 영빈은 한숨을 쉬며 프린터 뒤쪽 전원 버튼을 더듬었다. 딸깍 소리와 함께 디스플레이가 깜빡였다. 프린터는 여전히 먹통이었다.
“걍 A/S 부르자.”
“안 돼요. 제가 망가뜨렸다고 그러면 어떡해요? 전에도 프린터 때문에 한 소리 들었단 말이에요. 종이 너무 많이 쓴다고. 이거 껍데기 뜯어 볼 수 있어요?”
“그거 함부로 열면 A/S도 안 될걸? 건드려서 잘못되면 네 책임이잖아.”
“오빠 책임이죠. 오빠 여기 들어오면 안 되는 사람인 거 알죠? 프린터에 지문 다 남아 있어요.”
연정은 잉크가 묻은 영빈의 손가락을 가리키며 찬장에서 물티슈를 꺼냈다. 영빈은 프린터 뚜껑을 닫고 티슈를 받아 손에 묻은 검댕을 닦았다.
“네 손에도 뭐 묻었다.”
영빈은 덥석 연정의 손을 잡았다. 손끝으로 그녀의 검지를 문질러 닦았다. 작은 얼룩이 흐릿해졌다. 연정은 뜨거운 물건을 만진 사람처럼 화들짝 손을 빼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커피포트의 물기를 바닥에 털어냈다. 그녀는 문득 이 남자가 마냥 심심한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어색한 침묵이 싫었던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옆집에 이상한 사람 있다고 전에 얘기했었죠?”
“문 앞에 맨날 쓰레기 내놓는다던 그 사람?”
“네. 아무 말 안하고 있으면 일주일 내내 쓰레기봉투를 쌓아 놓는다니까요.”
“뭐라고 좀 하지. 관리실에 얘길 하든가.”
“사람은 착한 거 같은데 그래서 더 짜증나요. 모난 사람이면 따끔하게 한마디 할 텐데 말 꺼낼 때마다 너무 미안해하니까.”
“네가 착해서 그래. 그런 건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지.”
“불쌍한 사람 같아서 뭐라고 하지도 못하겠어요. 하루 종일 집에서 게임만 한다던데요.”
연정은 따뜻한 커피를 홀짝이며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분침은 자정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좋든 싫든 또 하루가 지나가 버렸다.
“데려다 줄까?”
“아니요. 혼자 갈 수 있어요.”
영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문단속 하는 그녀의 작은 어깨를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달빛이 넘실거렸다. 흐릿한 서울 하늘에선 보기 드물 정도로 밝은 달이었다. 문을 닫고 돌아서는 연정의 얼굴 위로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흘러내렸다. 영빈이 연정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는 섬세한 손짓으로 그녀의 단발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겼다.
“귀가 작아서 잘 안 넘어갈걸요?”
“또 넘겨 주지, 뭐. 그나저나 프린터는 어쩌게?”
“솔직하게 얘기해야죠. 출력하려다 망가졌다고.”
“그냥 모른 척 냅둬. 누가 사람 부르겠지.”
연정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인생은 파도와 같다. 뭐든지 모른 척 내버려 두면 어느새 파도에 휩쓸려 사라져 버린다. 연정은 자신의 20대를 흔적도 없이 쓸어가 버린 파도가, 삶이, 시간이 두려웠다. 그에 비하면 프린터 따윈 아무래도 좋다. 내버려 두면 누군가 어디론가 쓸어가 버릴 테지. 연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2
먼저 말을 꺼낸 건 윤석이었다.
“영화에서 보면 말이야, 킬러들은 항상 말쑥한 정장 차림이잖아. 바바리코트에 선글라스 걸치고. 그런데 실제 킬러들은 왜 다 저 모양인지 모르겠어.”
가만히 듣고 있던 규도가 되물었다.
“저 모양이라는 게 정확히 무슨 소리야?”
“지극히 평범하더란 말이야. 돌아서면 얼굴도 기억 안 나.”
“그건 당연한 거야. 어찌 보면 평범함이야말로 킬러가 갖춰야 할 첫 번째 소양이라고 할 수 있지.”
“어째서?”
“너 닌자 영화 본 적 있지? 영화에 나오는 닌자가 왜 구라인지 알아?”
“모르겠는데.”
“복장 때문이야. 까만 옷 입고 두건 쓴 사람은 누가 봐도 닌자일 거 아니냐. 누구에게도 들키지 말아야 할 사람이 가장 들키기 쉬운 옷을 입고 다닌단 말이지. 너 제복 입은 잠복형사 본 적 있어?”
“일리 있군.”
윤석은 규도에게 쌍안경을 건넸다. 규도는 다시 한 번 목표물을 확인했다. 환하게 불을 밝힌 맞은편 건물을 관찰하기란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쉬웠다. 타깃이 된 남자는 자기가 감시당하는 줄도 모른 채 속옷 차림으로 컴퓨터 게임에 열중해 있었다.
남자는 동글동글한 얼굴에 흐리멍덩한 눈매를 가졌다. 평범한 외모 때문일까? 왠지 모르게 아는 사람 같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이었지만 기억에는 남지 않는 보통 얼굴. 규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낯이 익은데?”
“그동안 쭉 우리 조직 일 맡았던 사람이야. 너도 오며 가며 인사 정도는 했을걸?”
남자는 전업 킬러다. 보기엔 신림동 고시 낭인처럼 꾀죄죄하지만 업계에서의 명성은 상당했다. 이제 막 살인청부업자로 첫발을 내디딘 두 사람의 입장에선 여러모로 껄끄러운 상대였다. 첫 작업 대상이 업계 선배인 것도 부담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상대는 베테랑이었다. 얕은 수로 접근했다간 되레 당할 수도 있었다.
“저렇게 밋밋하게 생긴 게 진짜 무서운 놈들이야. 다가와서 푹 찌르고 가버리면 아무도 모른다니까. 순진하게 생겨 가지고 누가 경계를 하겠냐?”
“위에서 시킨 일이니 자세한 사연에는 신경 꺼라. 우린 저 양반 없애고 물건만 찾아오면 돼.”
“찾아야 할 게 여행가방이라고 했지?”
“그래. 주황색 여행가방.”
“근데 저 인간, 좀 이상하지 않냐?”
윤석은 규도에게서 쌍안경을 받아들고 다시 목표물에게로 눈을 돌렸다. 규도 말대로 그에게는 어딘가 독특한 구석이 있었다. 팬티 차림의 살인청부업자는 한시도 몸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못했다. 기마 자세로 게임을 하다가 캐릭터가 죽으면 갑자기 엎드려 푸시업을 하고, 캐릭터가 리스폰(respawn)되면 다시 자리로 돌아와 게임을 했다. 한 판이 끝나는가 싶으면 화장실 문틀에 두 손가락으로 매달려 턱걸이를 하다가 뛰어와 다시 모니터 앞에서 기마 자세를 취했다.
윤석이 말했다.
“두어 시간 전부터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더라.”
“뒷조사 좀 해봤어?”
“몰라. 일하는 방식이 깔끔하기로 유명하다는 것 말고는. 놈이 오른손으로 목울대를 움켜쥐면 아무도 빠져 나오지 못한다더군.”
윤석은 진지했으나 규도는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윤석은 어쩐지 불안해졌다. 규도가 엘리트 체육인 출신이라곤 하나, 상대를 너무 얕잡아 보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물론 규도의 솜씨를 의심하는 건 아니었다. 한때 타고난 싸움꾼으로 이름을 날렸던 두 사람이다. 조직 간의 다툼이 있을 때면 윤석과 규도는 늘 앞장서서 싸움에 임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몸으로 먹고살 수는 없었다. 노후를 생각해서라도 업종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택한 게 청부살인이었다.
행동대원으로 잔뼈가 굵은 두 사람이지만 청부살인은 전혀 다른 영역이었다. 투견과 사냥개가 다르듯이, 싸움을 잘한다고 해서 사람을 잘 죽이는 건 아니다.
“혼자 올라갈 거야?”
“왜? 불안해?”
규도는 가죽장갑을 벗어 입에 문 채 맨손으로 파카 안을 더듬어 장비를 점검했다. 윤석은 대꾸하는 대신 가만히 몸을 돌려 구석에 던져 놓은 자신의 더플백을 뒤적거렸다. 그 안에서 어른 팔뚝 길이의 식도 가방을 꺼내 규도에게 내밀었다. 규도는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누가 보면 횟집 하는 줄 알겠다.”
“3단 접이식이라 편해. 껍데기도 레자 아니고 진짜 소가죽 떼다 만든 거야. 하나 골라 봐.”
윤석은 식도 가방 손잡이를 잡고 플라스틱 버클을 끌렀다. 귀에 감기는 매끄러운 마찰음과 함께 3단 식도 가방이 펼쳐졌다. 찍찍이 덮개를 열자 다섯 자루의 칼날이 새파란 날을 번뜩였다. 맨 아랫단 덮개를 들쳐 본 규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파우치 안에 각종 연장과 함께 숟가락 두 벌이 들어 있었다.
“숟가락은 왜 넣고 다니냐?”
“앞으로 외근이 많을 거야. 짜장면 시켜 먹을 때 숟가락 없으면 불편해. 하나는 네 거다.”
“난 짜장 안 먹어. 그리고 나 찌르는 거 싫어하잖아. 느낌 되게 안 좋단 말이야.”
말을 마친 규도는 품에서 철사 한 묶음을 꺼내 보였다. 마술사가 시범을 보이듯 집게손으로 철사 양 끝을 잡아 팽팽하게 당겼다. 이내 능숙하게 양손을 몇 번 돌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철사 끝에 동그란 매듭이 지어졌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규도의 손에 딱 감기는 손잡이였다. 규도는 피를 보는 것보단 목을 조르는 편을 선호했다.
“이걸로 이제까지 잘 해 왔어. 모름지기 연장보다는 기술이라고.”
“그때는 옆에서 잡아 주는 애들이 있었잖아. 그리고 사람 죽이는 데 기술이 무슨 소용이냐? 어차피 뒤에서 조를 거면서. 그럴 바에야 찌르는 게 편하지.”
윤석은 말을 하면서도 주섬주섬 식도 가방을 접었다.
윤석이 말했다.
“조직에서 왜 우리한테 이번 일을 줬을 것 같냐? 잔심부름이나 하면서 미수금 삥이나 뜯던 우리한테 말이다.”
“글쎄?”
“우릴 밀어 주는 거야. 일종의 전관예우 같은 거지. 원래 대기업들도 자기네서 분사한 회사들은 삼사 년씩 밀어 준다잖냐. 다들 그렇게 크는 거야. 그러니까 이번 일은 실수 없이 잘 하자고.”
윤석의 말을 듣고 보니 규도도 힘이 났다. 이번 일만 깔끔하게 마무리하면 앞으로 일감도 안정적으로 들어올 것이고, 만기 삼 년 남은 보험도 무사히 납입할 수 있을 거다. 치밀하고 침착해야 한다. 십수 년 전 두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더더욱. 규도는 단단한 알이 박힌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대답했다.
“나만 믿어. 수틀리면 맨주먹으로라도 때려잡을 테니 걱정 말고.”
“처음이니까 각별히 신경 쓰란 소리야. 정 뭣하면 같이 올라가자고.”
“둘이 가면 더 의심 받지. 밑에 가서 차 트렁크나 열어 둬.”
규도가 호기롭게 말하긴 했으나 원한 없이 사람을 죽인다는 건 아무래도 심적 부담이 있는 일이다. 그가 그런 무거운 짐을 지기로 자청한 건 역시 자신에 대한 미안함 때문일 거라고 윤석은 생각했다. 그에게는 영원히 갚지 못할 마음의 빚이 있었으니까.
옛날 생각이 나자 윤석은 습관적으로 목걸이에 달린 나이프에 입을 맞췄다. 그 넥나이프는 윤석이 오랫동안 신앙처럼 간직해 온 부적이었다. 햇병아리 시절부터 윤석은 늘 그 나이프를 가지고 다녔다. 성인 남자 중지 길이 정도의 짧은 칼이었지만 경우에 따라 쓸모가 있었다. 택배 박스를 뜯을 때나 손가락을 자르겠다고 겁 줄 때 특히 그랬다.
윤석은 현관문을 나서는 규도의 뒷모습을 불안한 듯 지켜보았다.
‘운명은 아직 내 편이야. 아직은.’
윤석은 생각했다. 많은 징조가 밝은 앞날을 비추고 있었고, 윤석은 스스로 그걸 알아볼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규도가 자신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따라온다는 게 그 증거다. 윤석은 자신의 나이프에 다시 한 번 입을 맞췄다.
사실 윤석은 알고 있었다. 찾아와야 할 여행가방 안에는 수백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 ‘무언가’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우연찮게 엿들은 그런 고급 정보만 아니었으면 애초에 이런 부담스런 임무 따위 관심도 없었을 거다.
조직이 일을 맡긴 것도 그만큼 윤석이 간곡하게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일을 따내기 위해 윤석은 지난 십수 년 간 쌓아 온 뒷골목 인맥과 연줄을 모두 끌어와야 했다. 가방 속의 물건이 뭔지는 몰라도 그걸 사겠다는 놈은 있었다.
윤석은 중간에 가방을 가로채 반값에 넘길 생각이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규도와도, 이 바닥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과도 작별이다. 밤 생활 청산하는 퇴직금이라 여기고 홀가분하게 이 나라를 뜰 것이다. 올해가 가기 전엔 따뜻한 모로코에서 사랑하는 그녀와 새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순간이 올 때까지 오랜 세월을 참고 기다려야 했던 그녀와.
윤석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3
또 죽었다. 잡생각 하느라 포션 빠는 타이밍이 늦었다. 자꾸만 잡생각이 드는 이유는 불안하기 때문이다. 훈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바닥에 엎드려 세 손가락으로 푸시업을 했다. 하루에 수백 번씩 반복하는 동작이지만 할 때마다 힘이 드는 건 마찬가지다.
언젠가 친구가 물어본 적 있다. 왜 그렇게 운동에 집착하느냐고. 훈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불안해서.”
뭐가? 뭐가 불안한데? 친구가 재차 물었다. 그쯤 되면 훈은 늘 하던 대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건 그냥 운동 강박증이었다. 그냥에 이유는 없다. 가만히 있으면 자꾸 손끝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한 시간쯤 쉰다고 신체 능력이 퇴보할 리 없다는 걸 훈도 잘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만에 하나라도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나서 후회하느니 그냥 운동을 하고 말자는 생각이 들면 한시도 몸을 가만히 쉴 수 없었다.
그렇다고 운동 선수가 될 생각을 했던 것도 아니다. 기본적으로 훈은 운동에 재능이 없었다. 특별히 잘하거나 좋아하는 종목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몸이 날쌔거나 덩치가 큰 편도 아니었다. 그가 가진 재주라고는 턱걸이를 연달아 90개 정도 할 수 있다는 것뿐이다. 참고로 1983년 작성된 턱걸이 세계 기록은 120회다. 그나마도 94년도엔 612회로 경신되었다. 턱걸이 90개로는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민다. 설령 612회 이상을 할 수 있다 해도 그게 밥벌이가 되는 건 아니다.
그래서 훈은 킬러가 됐다. 투견이 아니라 사냥개였다. 순박한 얼굴과 평범한 체구로 덫을 놓고 목표물에 접근한 뒤 단련된 오른손으로 숨통을 끊었다. 비범한 손아귀 힘으로 턱을 비틀면 열에 하나는 절명했고 아홉은 기절했다. 간단하지만 효율적인 그만의 방식이었다.
힘을 쓰고 나니 언제나처럼 배가 고팠다. 컵라면이라도 끓일 생각으로 전기 주전자를 올리는데, 둔탁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야밤에 찾아온 불청객. 훈은 짜증스런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구요?”
“성환기획 사장님이 보내서 왔습니다.”
다소 높은 톤의 처음 듣는 사내 목소리였다. 훈은 금세 태도를 바꿨다. 이름만 들어선 꼭 영세 흥신소 같지만, 성환기획은 이 바닥에선 대기업이다. 조직도 크고 다루는 일도 규모가 컸다. 무엇보다도 성환기획은 훈의 밥줄이나 다름없었다. 대부분의 의뢰는 그쪽에서 들어왔고, 중개 수수료도 합리적이었다. 게다가 성환기획에서 대주는 건수는 대부분 액수가 굵직했다.
그러나 그쪽에서 이렇게 직접 찾아오는 일은 드물었다. 어쩌면 지난번에 맡겨 놓은 물건을 찾아가려는 건지도 모른다. 훈은 아무쪼록 새로운 의뢰가 아니길 바랐다. 한창 추울 때 고생했던 터라 당분간은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땅이 어는 겨울은 아무래도 사후 처리가 곤란하다. 시신을 묻기도 힘들고, 잘 썩지도 않으니까.
“나갑니다.”
훈은 큰 소리로 대답했다. 맨발에 삼선 슬리퍼를 꿰차고 달려 나가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작지만 단단한 체구의 까무잡잡한 사내가 서 있었다.
“어휴, 밖은 아직 쌀쌀하네요.”
사내는 넉살이 좋은 편이었다.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신발부터 벗었다.
“들어가도 되죠?”
“그럼요. 들어오세요.”
훈의 대답에 사내는 거리낌 없이 거실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커피 한잔하실래요?”
“네. 설탕은 빼주세요.”
“믹스커피밖에 없는데요.”
“그럼 그걸로 부탁합니다.”
사내는 편안한 자세로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훈의 허름한 집을 둘러보았다. 전기 주전자가 탁 소리를 내며 수증기를 뿜었다. 사내가 물었다.
“혹시 담배 피우십니까?”
“아, 담배는 발코니에서 부탁합니다. 집에서는 냄새 때문에 잘 안 피우거든요.”
“아뇨, 저는 담배 안 피웁니다.”
사내가 대답했다. 사내는 자꾸만 소파 팔걸이의 벗겨진 모조 가죽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어지간히 싱거운 사람이라고, 훈은 생각했다. 믹스커피 두 봉을 뜯어 머그잔에 털어 넣었다. 사내가 물었다.
“보관하신 물건이 저겁니까?”
“맞습니다.”
훈은 사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벽 한쪽에는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주황색 여행가방이 있었다. 조직과 붙어먹던 비리 경찰을 자살로 위장해 치우고 가져온 물건이다. 가방은 조직의 소유가 되었지만 성환기획은 그걸 훈에게 맡겼다. 사건이 잠잠해질 때까지는 그렇게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 훈도 딱히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선입금된 보관료가 짭짤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비리 경찰관의 죽음은 금방 잊혀졌다. 도박 빚은 경찰관이 죽어야 했던 원인이었지만, 한편으론 많은 걸 납득시키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언론과 대중은 경찰의 기강 해이를 질타했고 경찰은 빠르게 사건을 덮어 버렸다. 드디어 가방을 돌려줄 때가 온 것이다.
사내가 물었다.
“열어 보진 않았죠?”
“자물쇠로 잠겨 있어서요.”
“잘하셨어요. 커피 마시고 가져가겠습니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사내는 주황색 여행가방 앞으로 다가가 자물쇠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자물쇠는 처음 받아왔을 때만큼이나 단단하게 잠겨 있었다. 사내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기 주전자가 휘파람 소리와 함께 수증기를 뿜었다. 훈은 주전자를 들어 머그잔에 물을 따랐다. 훈이 물었다.
“더우세요?”
“네?”
“땀을 많이 흘리시는 것 같은데.”
“원래 긴장하면 그렇습니다.”
사내가 대답했다. 훈이 뭐라고 물으려는 순간, 목을 조여 드는 차가운 금속의 질감이 느껴졌다. 인기척보다 빠른 공격이 제법 능숙한 솜씨였다. 훈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허리가 꺾이지 않게 최대한 버티면서 들고 있던 주전자를 기울였다. 뜨거운 물이 사내의 발등 위로 쏟아졌다.
사내가 신음을 삼키며 주춤하는 사이 훈은 발로 탁자를 강하게 밀었다. 반동 때문에 훈과 사내의 몸이 한데 엉킨 채 뒤로 넘어갔다. 그 바람에 목을 조르던 철사가 느슨해졌다. 훈은 어깨 뒤로 손을 뻗어 사내의 손가락을 비틀었다. 사내가 줄을 놓치자 훈의 상체가 자유로워졌다. 사내는 일어나려는 훈의 등 뒤에 매달린 채 팔로 목을 감았다. 어떻게든 훈의 목을 조르려는 생각인 듯했다. 훈은 오른손으로 반쯤 접힌 놈의 엄지를 틀어쥐고 있는 힘껏 조였다. 손가락 관절 중 완전히 접히지 않는 것은 엄지뿐이다.
사내가 “억!” 하고 짧은 비명을 질렀다. 훈은 놈의 팔을 뿌리치고 일어났다. 사내도 훈을 따라 몸을 일으키려 했다. 훈은 손을 뻗어 재빨리 놈의 오른쪽 귀를 잡아챘다. 귓바퀴가 찢어지며 반쯤 뜯겨 나왔다. 사내는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오른손으로 땅을 짚었다. 훈은 왼발로 사내의 손등을 밟고 오른손으로 놈의 머리채를 잡아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오른 무릎을 강하게 차올렸다.
사내는 코피를 쏟으며 뒤로 넘어갔다. 훈의 오른손이 그의 목을 낚아챘다. 그걸로 끝이었다. 사내의 부릅뜬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두꺼운 목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소시지만큼 쪼그라들었다. 30초쯤 지나서야 훈은 축 늘어진 사내를 놓아주었다. 사람을 죽인 건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의 집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도망쳐야 해.’
논리보다는 경험이 먼저 위험을 경고했다. 시신을 치우는 건 나중 일이다. 훈은 허겁지겁 옷을 챙겨 입었다. 현관문을 나서려는데 주황색 여행가방이 눈에 밟혔다. 처음 그 가방을 가져올 때만 해도 훈은 안에 든 물건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자신을 제거하려는 걸 보면 그 안에 뭔가 굉장한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건은 두고 가는 게 좋을까? 일단은 가져갈까? 판단이 서지 않았다.
훈은 본능을 따르기로 했다.
‘나중에 내 목숨과 이 가방을 맞교환하게 될 날이 올지 모른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이건 꼭 챙겨야 한다.’
맡아 두던 여행가방을 들고 복도로 나왔다. 훈은 가방을 벽에 기대어 놓고 손을 뻗어 자물쇠를 만져 보았다. 단단한 걸쇠를 재차 확인하고 나서야 중요한 내용물이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새삼 사내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저 남자는 성환기획을 사칭한 건지도 모른다. 경쟁 조직에서 가방을 가로채기 위해 보냈을 수도 있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훈은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내의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열쇠 꾸러미와 동전 몇 개, 뒷주머니에선 작은 폴딩 나이프가 나왔다. 재킷 주머니엔 지갑뿐이었다. 지갑 안엔 신용카드 하나와 만 원짜리 두 장이 들어 있을 뿐, 변변한 명함 한 장 없었다. 안주머니를 뒤졌다. 휴대폰 두 개. 훈은 그것들을 모두 챙겨 식탁 위에 있던 비닐 봉투에 담았다. 습관처럼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5분이 지났다. 1초가 지날 때마다 도화선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생명줄 짧아지는 게 느껴졌다. 훈은 서둘러 복도로 나와 현관문을 닫았다. 벽에 기대어 놓았던 여행가방을 끌고 가려던 찰나, 훈은 제자리에 감전된 듯 멈춰 섰다. 등줄기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복도에 세워 두었던 주황색 여행가방은 손잡이가 빠진 채 쓰러져 있었다. 손잡이는 꺼낸 적도 없었는데.
‘누군가 있다.’
훈은 몸을 낮추며 어두컴컴한 복도를 살폈다. 폴딩 나이프를 펼쳐 옆구리에 바싹 붙였다. 멀리서 타박타박 구둣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훈은 복도 계단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커다란 체구의 깍두기가 무서운 속도로 층계참을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덩치에 비해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훈은 위험을 직감하고 몸을 숨겼다.
목숨이 달린 싸움에서 기술보다 중요한 건 상황 판단이다. 그러나 익숙지 않은 상황이 훈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언제나 덫을 놓고 기다리는 쪽이었다. 쫓기는 건 영 낯설다. 이 자리에서 엘리베이터를 타야 할지 집 안에 틀어박혀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건 스스로를 함정에 가두는 꼴이었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가방을 넘겨준다고 해서 놈들이 순순히 돌아갈 것 같지도 않았다.
고민 끝에 훈은 가장 그다운 선택을 하기로 했다. 훈은 복도 코너에 몸을 숨겼다. 도약 직전의 개구리처럼 잔뜩 웅크린 채 숨을 죽였다. 그러고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정면 승부에서는 먼저 공격하는 놈이 이기는 법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