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은 물결에 흩어지네

  • 장르: SF, 기타 | 태그: #가상역사 #타임리프
  • 평점×5 | 분량: 88매
  • 소개: 멀지 않은 미래, 덧없는 꿈을 꾸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더보기
작가

벚꽃은 물결에 흩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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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당신이 좋아하던 말이었지요. 당신이 처음으로 읽은 우리말로 된 책이라고 했었던 게 생각이 납니다. 당신은 언제나 그 앞에 있는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는 말을 기어코 외면했습니다. 우리는 현재를 지배하는 쪽이 아니라 지배당하는 쪽이었으니까요. 우리를 강제로 병합한 연방은 자신들의 피지배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의 언어까지 탄압하지 않았지만, 사회엔 이미 연방 공용어를 배우지 못하면 주류로 진출할 수 없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자연 도태되지 않기 위해 너도나도 우리의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언어를 필사적으로 익혔습니다.

홀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집을 정리하던 중에 지하 창고 깊숙한 곳에서 발견한 그 책을 당신은 마치 어머니처럼 애지중지했습니다. 당신은 사라진 우리 언어의 책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표지는 떨어져 나가고 당신의 땀과 기름이 밴 페이지들이 누렇게 변색 되어 이젠 우리 아이도 그 책을 손대기 싫어하지만, 나는 그 책을 차마 버리지 못합니다. 당신이 좋아하던 구절이 새겨진 페이지를 펼치고, 고개를 파묻고 한껏 냄새를 빨아들입니다. 당신의 냄새가 납니다. 아직도 당신이 내 옆에 있는 것만 같습니다.

당신이 떠나신 후 절에 다녔습니다. 신이 있다면 우리를 왜 이렇게 고통 받게 하느냐고, 차라리 악마와 손을 잡아 신을 죽이겠다고 하던 당신이 아신다면 신보다 저를 먼저 죽이려고 하셨겠죠. 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저의 악업을 씻고 당신의 평안을 빌고 싶은데 제 말을 들어줄 동지들이 이젠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요.

절에서 만난 한 친구의 소개로 이 요양원에서 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요양원은 전선에서 돌아온 부상병이 머무는 병동과 나이가 너무 들어 연방에 기여할 수 없는 노인들이 있는 요양동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당신의 극락왕생을 바라는 마음으로 저는 한 노인을 씻기고 식사를 수발하고 잠자리를 살핍니다. 요양원에 나간 첫날, 발가락이 가렵다고 울부짖는 청년을 보았습니다. 같이 간 친구는 저런 환자를 요양원에서 많이 보았지만 볼 때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했지요. 포탄에 맞아 사라져버린 다리에서 어떻게 통증을 느낄 수 있는 거냐면서요. 그러나 저는 그 환자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이미 사라져 보이지 않지만 늘 제게 새로운 아픔을 주고 있었으니까요.

저와 친구는 요양동에 배속되었습니다. 전문 요양사를 따라서 병실에 들어서자, 한 할아버지가 저를 보자마자 신음을 내기 시작하셨습니다. 어머, 할아버지가 웬일이시지? 갸웃거리던 요양사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제가 이 요양원에 나온 지 5년째인데, 이 할아버지가 무슨 말씀하시는 걸 처음 보네요.”

언젠가 집의 지하실에서 들었던 아이의 울음소리가 생각납니다. 무언가 의사 표현을 하려는 모습이 신기했나 봅니다. 저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았습니다.

우아, 우아, 으어.

그저 말없이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할아버지의 음성은 이내 울음으로 바뀌었습니다. 뭐가 그리 서운한 지 제 어깨를 치기도 하셨죠. 오랫동안 찾아오는 이가 없었다는 요양사의 설명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할아버지를 끌어안고 쉬쉬, 등을 쓸어주었습니다. 오래된 책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어요.

“자기가 할아버지 손녀랑 닮았나 보다.”
“어쩌면 첫사랑이 생각나셨을 지도 모르죠.”
“어머, 낭만적인 구석이 있다니까.”

친구의 농담에 살포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저에게 낭만적인 구석이란 게 있다면, 그건 모두 당신한테 물든 것일텐데, 당신이 지금 여기에 없다는 게 더 실감이 났습니다. 요양사는 저를 그 할아버지에게 배정해주었습니다. 안 그래도 다루기 어려운 환자였는데 잘 됐다면서요. 어쩐지 귀찮은 짐을 떠맡기는 듯한 기분도 없진 않았지만 괜찮았습니다. 저의 죄업을 씻는 일에는 작은 공양으론 어려울 테니까요. 저는 기꺼운 마음으로 그 할아버지를 맡았습니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