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히치하이커에 대한 몽타주

  • 장르: SF, 판타지 | 태그: #타임리프 #시간선 #가상역사
  • 평점×15 | 분량: 118매
  • 소개: 진애는 엄마를 보러가는 길에 한 남자를 차로 친다. 정체 모를 남자는 이상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더보기

어느 히치하이커에 대한 몽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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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월 ×일. 나는 소련의 영화 제작자이자 이론가였던 레프 쿨레쇼프(Lev Kuleshov)를 만나 우연히 그의 실험에 참여했다. 낯선 외지인의 무표정에 끌린 쿨레쇼프는 영화 필름으로 내 얼굴을 촬영했다. 그리고 그 쇼트를 스프 한 접시, 관 속의 아이, 소파 위의 여인이 촬영된 쇼트에 각각 이어 붙였다. 실험 결과. 편집본을 본 사람들은 나의 무표정에서 동일한 감각을 느꼈다고 말했다.

스프에서는 배고픔을, 아이에게서는 슬픔을. 여인에게서는 사랑을…’

– 신원 미상자의 일기 中 (1953년, 전쟁기념관 소장)

***

고라니였다. 아니. 고라니였어야 했다. 고라니였어도 죄책감을 느꼈을 테지만 고라니가 아니라면 죄책감에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정확히 5초 전. 진애는 차 앞으로 느닷없이 나타난 무언가에 핸들을 급히 왼쪽으로 틀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를 그것은 보닛 위에 한번 크게 튕기더니 앞 유리창 상단에 부딪힌 후 시야에서 사라졌다. 도로는 와이프아웃 되듯 밀려났고 이내 큰 흙더미가 몰려왔다. 지금은 브레이크를 밟은 채 덜덜 떠는 구두코만 보일 뿐이었다. 빌어먹을 똥차는 에어백마저 터지지 않았다. 어쨌든 차는 흙더미를 올라타고 멈춘 게 분명했다. 진애는 백미러를 보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봐야 했다. 그게 대체 뭐였는지 확인하려면 고개를 들어야 했다. 머리가 크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이토록 천근만근 무거운지는 몰랐다. 진애가 겨우 고개를 들어 백미러를 봤을 때 작은 프레임 안에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씨발…”

진애는 숨이 턱까지 꽉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렸을 때 엄마를 따라 온탕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느낌과 비슷했다. 운전석 문을 열고 나가야 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신음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다시 백미러로 시선을 돌렸을 때 사람이 움찔대고 있었다.

‘아직 죽지 않았어!’

시냅스에서 터진 이 문장이 살려야 한다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진애는 안전벨트를 풀고 운전석 문을 열었다. 도로에 얼굴을 파묻고 쓰러져있던 그를 보고 처음에는 여자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가 어깨까지 내려오는 장발의 남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어디서 구하기도 힘들 것 같은 넝마를 걸치고 있었는데 가까운 곳에 검게 그을린 봇짐이 떨어져 있었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남자가 벌떡 일어난 건 막 그를 돌려 눕힐 결심을 했을 때였다. 얼마나 멀쩡하게 일어나던지 진애는 하마터면 눈물이 터질 뻔했다. 신장이 190센티를 훨씬 넘어 보이는 남자는 무표정하게 진애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길고 기름진 머리칼 사이로 희번덕거리는 눈동자에 살기가 스쳤다. 진애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어떤 욕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곡사포는 피했는데 차는 미처 생각 못 했네.”
“예?”

진애는 남자가 내뱉은 문장을 곱씹었다. 곡사포? 그녀가 병역의 의무를 진 건 아니지만 군대 무용담이라면 지겹도록 들었다. 곡사포라면 무기의 일종아닌가. 진애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여겼지만 남자는 이내 그녀가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해줬다.

“그래. 포탄에 팔다리가 날아가는 것보단 낫지.”

그제야 진애는 남자의 몸에 짙게 밴 연기 냄새를 맡았다. 아니. 연기 보다는 화약 냄새에 가까웠다. 진애는 일련의 상황들에 대한 나름의 추리를 시작했다. 자연스레 그녀의 전문 지식이 동원됐다. 남자는 아마 배우일 것이다. 근처에서 시대극 혹은 전쟁 영화를 촬영하던 중이었겠지. 반나절을 기다려도 대사 한 줄 없는 시체 연기 말이다. 그리고는 길고 긴 대기 시간을 때울 겸 촬영장을 이탈했을 게 분명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남자가 진애에게 성큼 다가섰다.

“여기는 몇 년도죠?”

진애는 자신의 추리를 수정했다. 남자는 대사가 있었던 모양이다. 근데 촬영하던 영화의 장르는 대체 뭔지. 진애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2025년이요.”
“2025년… 간격이 너무 적어.”
“저기 괜찮으세요? 방금 제 차에… 치이셨는데요.”
“괜찮습니다. 다행히 제가 화랑 출신이라 이 정도 충격은.”

남자가 채 말을 끝내지 못하고 휘청댔다. 진애가 얼른 그를 부축했다.

“기가 흩어졌어. 수련이 부족한 모양이야.”

진애는 이 와중에도 몰입을 유지하는 남자에 내심 감탄했다. 남자는 다시 중심을 잡고 진애를 내려다봤다. 구릿빛 피부가 볕에 닿아 번들거렸고 화약내를 뚫고 전해져 오는 시큰한 땀 냄새가 어지러웠다.

“일단 차에 타 계시면 가까운 병원을 검색해 볼게요.”
“안 됩니다.”
“안 되다니요? 지금 상태가…”
“어차피 틈을 건너면 자연 회복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요.”

진애는 남자가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말을 거는 느낌이었다. 남자는 대수롭지 않은 듯 바닥의 봇짐을 집어 들었다. 진애는 슬슬 짜증이 올라오고 있었다.

“저기요. 곡사포고 나발이고 치료를 거부한 건 그쪽이에요. 나중에 나이롱으로 드러누워 봤자 전 몰라요.”
“저는 히치하이커입니다.”
“알아요. 알았으니까.”

순간 진애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히치하이커?

“그러니까 여기서 차를 잡고 계셨다는 거예요?”
“정확히는 아가씨 차가 저와 만난 거죠.”
“내 말은 여행 중이었냐고요.”
“여행이라면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

진애는 남자의 애매한 화법에 현기증을 느꼈다.

“어디 아프세요? 몸 말고 목 위 쪽으로요.”
“머리를 다친 것 같지는 않네요.”
“정신 말이에요. 정신!”
“보시다시피 전 멀쩡합니다. 시간선을 통과하면서 현지 적응 데이터가 급격히 다운로드 됐지만 말이에요.”

미.친.놈.이.다.

진애의 머릿속은 그 다섯 글자로 가득 찼다. 아마 저 봇짐 속에는 그녀의 상상을 가뿐히 뛰어넘는 것들이 들어있을 것이다. 얼마 전 본 미드가 떠올랐다. 고속도로 인근에서 토막 난 여성들의 시신이 발견되고 FBI가 수사에 나서는 내용이었다. 진애는 틈을 보고 있었다. 냅다 차로 뛰어가 문을 잠그고 시동을 건다면 남자를 따돌릴 수 있을까. 남자의 피지컬을 보니 열 발자국도 못가 잡힐 게 뻔했다. 뭔가 시간을 벌게 필요했다. 순간 진애는 자기도 모르게 그가 든 봇짐을 낚아 채 가드레일 너머로 던졌다. 남자의 시선이 포물선을 그리는 봇짐을 쫓는 사이 진애는 잽싸게 방향을 틀었다. 마침내 한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뒤에서 터지는 거대한 빛을 느꼈다. 진애가 돌아보기 무섭게 빛은 일대를 집어삼켰다. 남자가 진애를 덮쳤다. 진애는 생각했다. 그래. 어차피 언젠가 죽으려 했던 거 조금 더 아플 뿐이겠지. 설마 산 채로 토막 내기야 하겠어? 두려움은 잠깐일 거야. 그렇게 단념한 진애는 남자의 육중한 근육이 뿜어내는 힘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남자가 진애의 목을 조르는 일은 없었다. 진애가 슬며시 실눈을 뜨자 빛은 막 허공의 한 점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남자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하마터면 당신까지 빨려 들어갈 뻔했잖아요!”

흥분한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침방울들이 얼굴에 닿는 게 느껴졌다. 그제야 진애는 봇짐이 떨어져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그들이 알아차렸을 거예요. 이제부터는 달리는 수밖에 없어요.”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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