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트럴 (Spectral)
By Fonda Lee
* 본문의 기울임꼴과 굵은 글씨는 원문 표기를 그대로 따른 것이며, 각주는 모두 번역자가 추가한 것임을 밝힙니다.
“캘드웰 씨?”
로리는 고개를 들었다. 누녜즈 형사가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로리는 새삼스럽게 그의 커다란 손과 햇볕에 말린 살구 색의, 가죽처럼 거칠고 닳은 얼굴, 그리고 차분하지만 피곤해보이는 눈을 바라보았다. 대놓고 사십 줄의 나이를 드러내는 그의 모습이 마음이 놓일 정도로 솔직하게 느껴져서 그녀는 불현듯 그의 손을 잡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네?” 그녀가 대답했다.
“준비되셨나요?”
준비? 로리는 잠시 생각했다. 2년 동안 그녀의 삶을 살아있는 지옥으로 만들었던 사람과 마주할 준비가 되었나? 실물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그녀가 침대 옆 서랍에 장전된 권총을 두고 자야 했던 이유이자, 밖에 나가거나 친구에게 전화하는 일처럼 평범한 일상생활마저도 거의 할 수 없게 만든 그 사람을. 때로는 보이지 않는 바이스에 폐가 납작하게 쥐어짜이는 듯한 원인 불명의 호흡곤란을 겪게 만든 그 사람을. 정말 만날 준비가 되었나?
로리는 누녜즈 형사의 어깨 너머 방 건너편의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흔들림이 없었다.
“그 남자, 이름이 뭐에요?”
“’그녀’의 이름은,” 누녜즈 형사는 말했다. “쇼나 썰로우(Shauna Thurlow)입니다.”
형사가 돌아서서 문 쪽으로 향했다. 로리의 입안에 건조한 쓴맛이 감돌았고, 그녀의 위장이 절대 풀리지 않을 매듭처럼 조여들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형사를 따라갔다.
*********
20개월 전.
패러다임 이벤트에서 일하는 마지막 날조차 회의에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로리였다. 그녀는 텅 빈 대형 회의 테이블 의자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라도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여유가 반가웠다. 책상은 이미 정리했고, 관련 서류도 모두 분류해서 보관해 두었다. 사원증도 반납을 마쳤고 심지어는 사무실 자리에 있던 쓰레기통까지 비워놓았다. 사실 그녀가 이 인터뷰에 참석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브래드와 안잘리라면 그녀 없이도 자신이 떠난 자리를 채울 인재를 충분히 잘 골라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매니저인 트레버는 마지막 날의 씁쓸한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가 모든 일을 끝마치길 원했다. 이제 와서 트레버가 뭘 기대하든 알 바 아니었지만, 그래도 후임자를 뽑는 데 의견 정도는 보태주는 게 책임감 있는 일처럼 느껴졌다.
천장 중앙에 매달린 다중 스펙트럴 프로젝터에서 접속을 알리는 소리가 나자, 렌즈 하나가 로리 옆에 있는 의자를 향해 회전했다. 평소처럼 단정한 베이지색 슬랙스와 잘 다려진 파란 셔츠 차림의 브래드가 스펙트럴 형태로 나타났다. 그의 물결치듯 구불거리는 짙은 머리는 막 헬스장에서 나온 사람처럼 살짝 헝클어져 있었다. 그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집에 설치된 스펙트럴웨이브 시스템이 회의실 주변의 카메라 정보를 변환해서 집무실에 있는 프로젝션 패드에 반영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연결 지연은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곧 그의 표정이 부드러워지더니 로리를 쳐다보며 윙크했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벌써 체크-아웃한 거 아니었어?”
“면접자들한테 이 회사 오지 말라고 경고할 만큼은 붙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로리의 표정이 미소로 따뜻하게 물들었다. 브래드가 위스콘신에 있는 집에서 원격으로 일한다는 사실이 아쉬울 뿐이었다. 그가 이미 유부남이라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고. 기가 막히게 잘생긴 얼굴에 똑똑하고 사교적인 성격 한 스푼. 그래, 나는 철없는 사춘기 소녀처럼 직장동료한테 반해버린 서른 두살 여성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차라리 브래드가 회사에 직접 출근하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의 스펙트럴 형상만으로도 이렇게 정신이 산만해지니까. 브래드는 언제든지 그녀의 ‘회사 남친’이 될 수 있었다—적어도 로리의 머릿속에서는.
또 한 번 접속음이 울리고 이번에는 로리의 반대편에 안잘리가 나타났다.
“늦은 건 아니지?” 그녀의 발랄한 뉴질랜드 억양에는 잠에서 막 깬 듯한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 그녀는 옆으로 손을 뻗어 유령처럼 희미한 커피잔을 집어 들었다. “여긴 지금 꽤 이른 시간이거든.”
“미안해.” 로리가 말했다. “퇴사하기 전에 뺄 수 있는 시간이 지금밖에 없었어.”
“아, 제발 떠난다는 얘기는 꺼내지도 마.” 안잘리가 과장되게 입을 삐죽 내밀었다.
면접자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세 번째 접속음이 울리고, 짙은 네이비 색 정장 치마를 입은 젊은 여성이 세 사람 맞은 편에 나타났다. 그녀는 완벽하게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손을 들어 인사했다. “미셸 에사키라고 합니다. 면접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미셸. 만나서 반가워요. 와주셔서 감사해요.” 로리가 브래드와 안잘리를 소개한 뒤, 테이블 위 화면을 내려다보며 미셸의 이력서를 훑었다. “그럼 패러다임 이벤트에서 일하고 싶은 이유를 말씀해주시겠어요?”
“물론이죠.” 미셸은 집중하는 태도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녀의 짙은 눈동자에는 자신감과 열정이 담겨 있었다. “이 직무에 지원하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제 경력에도 완벽하게 부합한다고 생각하고요. 저는 지난 5년 동안 주로 중소 기업 고객을 대상으로 오프라인 행사를 기획하는 회사를 운영해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가족과 가까이 지내기 위해 보이시(Boise)에 돌아오면서, 저의 오프라인 행사 기획 경력을 활용하여 보다 규모가 큰 초-위상(transphasic) 캠페인을 관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셸은 말할 때 손짓을 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길고 우아했으며, 손톱에는 매니큐어가 발라져 있었다. 짙은 색의 긴 머리카락은 단정하지만 세련된 집게핀으로 묶어 올렸고, 자연스러우면서도 호감가는 미소를 지닌 사람이었다.
로리는 생각했다. 미셸 에사키가 실제로도 저런 모습일까? 프리미엄 스펙트럴과 마스크 스펙트럴이 흔해진 요즘, 로리는 자꾸만 그런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다—그녀가 보는 사람들의 이미지가 현실인지, 아니면 정교하게 꾸며낸 가짜인지.
그게 중요한 건 아니라고, 로리는 스스로 되뇌었다. 미셸 에사키가 실제로 스물여덟쯤 되어 보이는 매력적인 아시아계 여성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건 그녀가 직업적 삶을 수행할 때 선택한 정체성일 뿐이었다. 중요한 건 그녀의 실적과 경력이지, 그녀의 외형에 대한 세부사항이 아니었다. 로리는 다시 인터뷰에 집중하려 애썼다.
안잘리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카메라에는 보이지 않는 테이블 스크린 위에 메모하는 중이었다. “본인 사업을 운영한 경력이 있는데 패러다임 같은 회사에서 직원으로 잘 적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저는 배우려는 자세와 팀에 가치를 더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이 자리에 지원했습니다.” 미셸이 대답했다. “요즘 오프라인 행사는 사람들을 연결하는 아주 좁은 방법 중 하나에 불과해요. 기업이 정말 의미있는 방식으로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초-위상—그러니까 물리적인 현실, 가상현실, 그리고 스펙트럴—전반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 적응력이 강한 사람이에요. 제 경력을 의도적으로 바꾸려는 것도 스펙트럴 커뮤니티 구축 쪽에서 경험을 쌓기 위해서죠. 그게 앞으로 모든 사회적 상호작용이 나아갈 방향이 될테니까요.”
브래드와 안잘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하는 동안, 로리는 자신의 찡그린 표정을 숨기기 위해 화면을 내려다 보았다. 미셸의 답변에는 흠 잡을 데가 없었다—하지만 그것은 또한 로리가 이곳을 떠나는 이유이자 미셸처럼 젊고 열정 넘치는 후보자가 그녀를 대체하는 이유였다.
인터뷰의 남은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미셸은 에너지 넘치고 누구나 좋아할 만한 사람이었고,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으며, 추천서도 훌륭했다. 그녀가 트레버와 그 패거리가 진행하는 최종 면접에 오르게 될 거라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한 시간 동안 진행된 면접을 마무리하며 로리는 미셸에게 면접에 참여해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며칠 내로 연락이 갈 거라고 설명했다. 프로젝터가 미셸의 연결을 끊자 로리는 브래드와 안잘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이 자리를 두고 저 여자랑 경쟁하지 않아도 돼서 정말 다행인 걸.”
“오, 로리. 일이 이렇게 돼서 얼마나 아쉬운지 몰라. 그래도 이제 훨씬 더 크고 멋진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몸 잘 챙기고, 알았지?” 안잘리는 손을 들어 인사했다. “행운을 빌어.”
로리도 손을 들어 안잘리의 손에 갖다 댔다. 비록 그녀가 느낄 수 있는 거라고는 프로젝션 빛의 희미한 따스함뿐이었지만. “고마워, 안잘리. 너도 잘 지내.”
안잘리의 스펙트럼 형상이 깜빡거리며 사라졌다. 프로젝터 렌즈 중 하나의 불빛이 꺼졌다. 로리는 브래드를 향해 돌아섰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오려고 하는데, 같이 갈래요?”
“좋아요.” 그가 말했다. “좀 이따 봐요.” 그가 저 멀리 떨어진 자기 방 안 어딘가에 손을 뻗어 연결을 끊었다. 그의 형상이 사라졌다.
로리는 자기 책상에 잠시 들러 코트와 가방, 그리고 절반쯤 남은 커피 텀블러를 챙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빈 사무실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이 일이 그리울 것 같진 않았다. 트레버가 그리울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지난 3년 동안 출근한 곳을 떠나려니 약간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로리는 한숨을 내쉬며 엘리베이터로 걸어간 뒤, 8층을 내려가 건물 1층에 도착했다.
워싱턴 D.C.치고 추운 날은 아니었지만, 제법 바람이 불었다. 로리는 바람을 피하기 위해 건물 옆쪽으로 돌아가며 코트를 꽉 여몄다. 그녀는 평평하고 마른 콘크리트 자리를 찾은 뒤, 가방에서 휴대용 프로젝터를 꺼내 디스플레이에 브래드의 번호를 입력했다. 그리고 프로젝터의 삼각대 다리를 펼쳐 바닥에 세웠다.
브래드의 스펙트럼 형상이 그녀 옆에 깜빡이며 나타났다. 이 휴대용 프로젝터의 매핑 및 전송 능력은 사람들이 집이나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기기보다 훨씬 떨어졌고 해상도도 낮았다. 그래서 브래드는 희미한 유령처럼 보였다. 속이 꽉찬 3차원의 존재가 아니라 바람에 날아갈 것처럼 일렁이는, 가장자리는 흐릿하고 속이 텅 빈 유령.
로리는 커피를 길게 한 모금 마시고, 허벅지 위의 담배 갑을 툭툭 두드렸다.
“끊은 줄 알았는데.” 브래드가 말했다.
“맞아. 몇 달 전에 끊었어.” 로리는 담배 갑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비어있었다. “그래도 습관처럼 들고 다니는 중이야. 대신 커피를 더 많이 마시고 있고.”
브래드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물론 진짜로 그녀를 보는 건 아니었다. 로리도 알았다. 그가 보는 건 이 휴대용 기기의 작은 카메라로부터 전송된 영상과 스펙트럴웨이브가 보유한 그녀의 외모 기록이 결합된 ‘합성 이미지’일 뿐이라는 걸. 그럼에도, 그가 그녀를 정말 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진짜 그녀를 바라보는 브래드의 흐릿한 얼굴에 말하지 못한 감정이 머물렀다. 어쩌면 그건 수줍음이었을까? 그는 시선을 옆으로 돌리고는 한 손으로 무심한 듯 귀를 만지작 거렸다. 로리의 심장이 불쑥 튀어나온 설렘으로 두근거렸다. 심지어는 아주 작은 후회의 숨결이 가슴에 내려앉았다. 브래드와 함께 일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몇 달은 두 사람 사이의 불꽃이 튀기엔 충분한 시간이지만, 진정한 친구가 될 정도로 충분하지는 않았다.
“트레버랑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말해준 적 없잖아.” 브래드가 말했다.
로리는 약간 구겨진 담배갑을 열며 얼굴을 찡그렸다. 안에 담배가 없다는 사실이 짜증나면서도 동시에 다행으로 느껴졌다. “내가 커넥트 라이브에 시간을 너무 많이 쏟는 게 마음에 안 들었나 봐.”
트레버는 로리를 자신의 사무실로 부른 뒤 문을 닫았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닮은 길쭉한 얼굴에 붙은 얇은 입술을 혀로 훑었다. “로리 씨가 우리 고객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에 대해서 잠깐 얘기 좀 하려고 불렀어. 로리 씨가 회사 밖에서 보이는, 음… 뭐랄까 사회 운동가적인 행동이 고객들에게 어떻게 비춰지는지에 대해서 말이야.”
“무슨 메시지요?”
그녀는 놀라지 말았어야 했다. 그럼에도 트레버의 말투는 여전히 로리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었고, 본능적인 자기 방어의 감정이 분노로 뜨겁게 달아오른 로리의 얼굴에 고였다.
“로리 씨 생각엔,” 트레버가 못마땅하다는 듯 턱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패러다임의 영업팀 차장이 스펙트럴 사용을 반대하는 반동적 사회 운동에 참여하는 게 적절하다고 보나? 그게 로리 씨나 우리 회사에 어떤 인상을 줄 것 같아?”
“스펙트럴 사용을 반대하는 건 아니에요.” 로리는 항변했다.
트레버는 심기가 불편한 듯 다시 한 번 더 크게 헛기침을 했다. “미안하지만, 워싱턴 포스트에 “스펙트럴에서의 상호작용은 진짜가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나?”
“진짜가 아니라고 한 적은 없어요. 완전히 진정성 있는 건 아니다라고 했죠.”
“진정성이 없다?” 트레버의 얼굴이 분노로 점점 굳더니―만약 그게 가능하다면―이전보다 더 길어보이기 시작했다. “그럼 비 데어(Be There) 캠페인은? 그건 전적으로 멀리 떨어져 사는 가족들을 연결하기 위한 프로젝트였다고. 게다가 백혈병 환자들을 위한 스펙트럴 자선 공연이 얼마나 많은 기부금을 모았는지 아나? 로리 씨는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하는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려는 거야?”
“그런 말이 아니에요.” 로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좀 더 힘 있게 나왔더라면, 언론 앞에서 발휘했던 자신감을 상사 앞에서도 끌어낼 수 있었더라면 하고 바랐다.
“로리 씨가 회사 밖에서 어떤 신념을 가지든 그건 로리 씨 자유야.” 트레버가 말했다.
“하지만 스펙트럴 기반 행사는 우리 회사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 중인 사업이라고.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한테 스펙트럴을 쓰지 말라고 하고 다니면 안 되지! 그렇게 사회 운동가가 되고 싶으면 마스크 스펙트럴이라도 써서 직장에서의 정체성은 감추든지 해야 될 거 아니야.”
로리는 웃음을 터뜨리거나 아니면 머리를 어딘가에 박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건 커넥트 라이브캠페인의 핵심 메시지와 완전히 정반대예요! 우리는 그저 스펙트럴을 책임감 있게, 적절한 범위 내에서 사용하자는 거라구요.”
트레버는 세 번째 헛기침을 했다. 이번에는 그것이 그녀에게 내려진 최종 선고처럼 들렸다. “로리 씨는 좋은 직원이야. 고객들도 로리 씨를 좋아하고, 평가 점수도 나쁘지 않지. 하지만 이런 테크노포비 운동을 계속하겠다면, 패러다임에서 일할 수는 없어. 둘 다는 안 돼.”
로리는 혀끝을 이로 꽉 깨물었다. 그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극적으로 퇴사할 용기는 없었다. 사직서를 낼 수 있을 만큼 용기를 끌어모으는 데는 두 달이 더 걸렸다. 그때 쯤에는 커넥트 라이브활동을 그만두라는 트레버의 경고를 거의 무시해왔던 터라, 언젠가는 트레버가 자신을 해고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뭔가 새로운 일,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할 때였다. 로리가 지금 커넥트 라이브에서 하고 있는 일, 그러니까 뉴스레터를 만들고, 정치인과 언론을 대상으로 청원 캠페인을 기획하고, 사람들에게 그녀가 진심으로 중요하다고 믿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 하는 이 모든 일을 하면서 그녀는 처음으로 진짜 그녀 자신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가슴 깊은 곳의 목소리를 내는 것 같았고, 어쩌면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있다는 감각까지 들었다.
“참 용감한 일이라고 생각해.” 브래드가 말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거 말이야.”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망설임이 섞여 있었다. 로리는 혹시 자신이 그에게 잘못된 인상을 남긴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브래드의 눈이 그녀가 있는 곳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 머물렀다.
“그렇다고 스펙트럴 안티라거나 그런 건 아냐.” 로리가 강조했다. “스펙트럴 기술이 많은 면에서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꿨다는 건 알고 있어. 그러니까 내 말은, 너처럼 위스콘신에 살면서 D.C.에서 일할 수 있는 건 정말 멋진 일이지.”
브래드가 로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다시 웃고 있었다. 로리는 그 모습을 보고 바보처럼 안도했다. 스펙트럴 문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와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로리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브래드는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 아니길 바랐다. 그가 말했다. “뭐, 너네 동네 집값 생각하면 그렇게 좋은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네, 그치?”
“그래, 그게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거야—내 콘도 시세가 더 이상 안 떨어지는 거.”
로리는 고개를 젓고, 그의 팔이 있을 법한 자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푸른색 셔츠의 빛이 그녀의 손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있잖아, 혹시 D.C.에 오게 되면 꼭 연락 줘. 진짜로 만날 수도 있으니까.”
“꼭 그럴게. 계속 연락하자.” 브래드의 환영이 그녀의 어깨를 스치더니 곧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