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갓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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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오래 걷다 보니 끝이 보였다. 오랫동안 한기에 노출된 코 끝은 감각이 없었다. 찬 바람에 뿌옇게 고여오는 눈물 때문에 뿌연 시야 사이로 논 밭 끝자락에 우뚝 서 있는 주공 아파트의 시커먼 형상이 보였다. 군데 군데 누렇게 켜진 창 불빛이 마치 이 빠진 괴물 같았다. 느닷없이 실종됐다는 동네 미용실 주인 이야기가 떠올랐다. 지헌은 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술 좀 작작 먹고 다니랬지!’

아내 말이 맞지. 가로등 하나 없는 시커먼 어둠 속에서 지헌은 고개를 주억거린다. 술 좀 그만 마셔라, 핸드폰 잘 챙겨라, 교통 카드 따로 들고 다녀라. 지나고 보면 언제나 아내 말이 맞다.

그런데 아내 말을 듣는 건 왜 이렇게 귀찮을까. 아내 말대로 교통 카드만 하나 있었더라도 이 새벽에 궁상맞게 똥거름 냄새를 맡으며 논 밭 길을 걷는 일 따윈 하지 않아도 될 텐데. 그나마 핸드폰 분실 보험을 들어 놓은 거 하나는 아내 말을 따라서 다행인가. 하지만 애초에, 조만간 개발 제한 구역이 풀려 땅값이 오를 거라며 아내 말을 따라 이 곳에 집을 사지만 않았어도…

투두둑-

어둠 속에 들리는 소리가 그의 생각을 뚝 끊었다. 뭐지? 이번에도 아내의 말소리가 떠올랐다.

‘거기다 음식물 쓰레기 갖다 버리는 사람이 그렇게 많대. 어차피 썩으면 거름 되니까, 밭 주인한테도 좋은 일 아니야?’

‘좋기는. 썩는다고 다 거름인가. 그거 몰래 버려서 몇 푼이나 벌겠다고 그런 짓을 해, 쯧쯧.’

그의 반응에 아내는 무안한지 지헌을 쳐다보다가 덧붙였다.

‘하긴, 그래서 거기 쥐가 엄청 많다더라고. 아라 엄마도 지난번 도로에서 쥐를 밟아서 타이어가 아주 엉망이 됐대.’

‘쥐들이 미쳤구만. 왜 도로로 기어 나와?’

‘도로에만 있게. 그 쪽 인도로 다니다 보면 얼어 죽은 쥐 밟은 일도 종종 있다던데. 으으- 징그러.”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50줄의 남자가 쥐 소리에 놀라 겁을 집어 먹다니. 그는 무안함을 떨치려 수그렸던 등을 쭉 폈다. 그리곤 누가 보기라도 했을까 고개를 뻗어 이리 저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밭 한가운데 쯤에서 허리를 굽어 땅 쪽을 향해 있는 인영 하나가 보였다.

“흠, 흠.”

토하느라 바빠 보이는 이였다. 쯧쯧, 지헌은 혀를 찼다. 그는 언제나 주량 조절에는 자신 있었다. 자신은 술자리를 좋아하는 거지 술을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매번 아내에게 호기 롭게 말한 대로였다. 꼴불견이군.. 그는 입속 말을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밭의 사람도 볼일을 마쳤는지 인도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성큼 성큼 걸어오는 이는 커다란 룩색을 멘 서른 중반 쯤의 사내였다. 그는 밭고랑에서 인도 쪽으로 가볍게 몸을 날려 우뚝 올라섰는데 그 폼이 전혀 취한 것 같지 않았다.

‘역시 젊음이 좋구만.’

방금 전까지 토했던 사람 같지 않게 날렵한 몸짓에 지헌은 감탄했다. 남자는 가방을 고쳐 매더니 재빠른 걸음으로 지헌의 곁을 스쳐갔다. 그의 가방에서 뭔가 떨어진 것도 같아 그를 부를까 했지만 빠르게 사라지는 남자를 보자 지헌도 괜시리 마음이 급해졌다.

몇 시쯤 됐으려나… 아까 지하철 역사에서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나온 게 12시 32분.. 그러니 지금 새벽 1시가 좀 넘었을테고 아내는 아직 자지 않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들어가는 게 현명하다.. 들어가면 일단 최대한 반성하는 연기를 해야지. 대학 때 연극 동아리를 했던 게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 그때는 꿈에도 몰랐지… 그런 생각을 하며 지헌은 더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그때였다. 발에 물컹한 것이 밟힌 것은.

“아이 씨-”

지헌은 나지막이 욕설을 뱉었다. 들렸던지 앞의 남자가 뒤돌아보는 게 보였다. 지헌은 밟은 것을 툭 걷어차 밭으로 굴려 보내고 마른 풀에 구두를 문지르려 밭둑 쪽으로 향했다. 앞의 남자가 여전히 멈춰 서 있는 게 보였다.

“망할 쥐새끼들”

지헌은 중얼거리며 구두를 문질렀다. 얼어붙은 밭 위로 그가 걷어찬 것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두껍고 뭉툭해 보이는 것은 쥐라고 하기엔 꼬리가 없었다. 두툼한 스테이크 조각마냥 퉁퉁한 모양이었다.

“뭐야 저게-”

그는 허리를 숙여 떨어진 물체를 조금 더 자세히 보았다. 뭉특한 끝에 짤막한 가지 다섯개가 나 있는 그것은… 끝마디가 잘린 사람 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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