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쇼핑목록

  • 장르: 추리/스릴러 | 태그: #살인자의쇼핑목록 #강지영 #추리단편 #추리스릴러단편선
  • 평점×49 | 분량: 114매
  • 소개: 할인마트의 캐셔지만 고객의 구매 물품을 보고 상대의 직업을 추리해 내는 여자. 그러던 중 최근 벌어진 연쇄살인마로 추측되는 한 남자를 추적하게 된다. 더보기

살인자의 쇼핑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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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캐셔다. 대형 할인마트에서 물건 값을 계산하는 게 내 일이다. 하루 평균 600명가량의 고객을 만나고, 그들이 내민 7500개 정도의 물건을 바코드 판독기에 들이댄다. 보통의 캐셔들은 화장실에 다녀오고 싶거나 식사를 해야 할 때 ‘정산중입니다’라는 푯말을 세워놓고 자리를 비운다. 하지만 나는 자리를 비우는 일이 거의 없다. 내게 표정 없이 물건을 내미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게 얼마나 즐겁고 흥미진진한지 동료들은 모른다. 스커트 아래로 생리혈이 줄줄 새는 줄도 모르고, 방광이 빠듯하다 못해 오줌을 질금대는 줄도 모르고 사람들의 면면을 훑다보면 어느새 퇴근시간이 되어버린다. 나는 잠자는 시간조차 아깝다.

화려한 붉은 꽃이 정신없이 프린트 된 원피스를 입은 저 여자는 누드 모델이거나 에로 배우다. 일주일에 한 번 마트에 들러 장을 보는데 사가는 물건들이 거의 일정하다. 스무 개들이 한 묶음의 반창고, 양상추 두 통과 1킬로그램짜리 닭가슴살 세 팩. 그녀는 속옷을 입지 않는다. 등이 깊게 파이고 몸에 바듯하게 달라붙는 원피스 어디에도 속옷의 흔적은 없다. 걸을 때 마다 앞가슴의 두덩이 살이 리드미컬하게 출렁인다. 몸의 중심부에 볼록 솟아 오른 치골이 시선을 모은다. 그러나 젖꼭지만은 도드라져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도 저 반창고는 여자의 젖꼭지를 감추기 위한 용도이리라. 속옷 자국이 나면 안 되는 직업, 날씬한 몸매를 반드시 유지해야 하는 직업. 그건 바로 누드 모델이거나 에로 배우뿐이다.

“적립카드나 제휴카드 있으세요?”

여자는 앞니로 껌을 자근거리며 고개를 젓는다. 매주 나는 묻고, 그녀는 고개를 저으면서도 우리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묻고 젓기를 반복한다.

“싸인 부탁드립니다.”

여자가 성의 없이 동그라미 하나를 단말기 액정에 그린다.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그녀의 물건들이 채 떠나기도 전에 중년여자 하나가 나물이 든 일회용 봉지를 밀어 놓는다. 깐 도라지, 불린 고사리, 숙주나물 200그램, 팩 시루떡 두 개들이 하나, 약과와 산자, 동태포, 무, 양지머리 한 덩이, 양초 한 갑, 마감임박세일 백조기 세 마리. 제수용품들이다. 남편을 여의기에 이른 나이로 보이지만 그건 모르는 일이다. 화장이 짙다. 남편의 제삿날 마스카라와 붉은색 립스틱을 바른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조상의 기일일 가능성이 더 높다. 손가락에 낀 비취반지와 긴 손톱, 여자는 제법 여유롭고 한갓진 삶을 사는 모양이다. 오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니 자식들은 출가시키고 두 내외만 오붓하게 살고 있는지 모른다. 제사음식 치고는 소박한 편이다. 게다가 나물류는 중국산이다. 시부모의 제사라면 살아생전 그리 사이가 좋지만은 않았을 터다.

“봉투 드릴까요?”

“그게 그냥 주는 거유? 50원은 돈 아닌가. 안 해요.”

봉투가 필요 없다는 간단한 대답 대신 퉁명스런 말투가 중년여자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목과 팔목에 감겨 있는 두꺼운 체인 형태의 금붙이, 비만한 몸과 명품 지갑으로 보아 그녀의 살림살이는 그리 궁핍하지 않지만, 작은 것에는 손을 바들대는 피곤한 타입이다. 주식에는 수천만 원씩 쏟아 붓고 날리기를 반복해도 그러려니 하면서 왜 겨울에 애호박이 2000원이나 하는지 모르겠다고 투덜대는 얌체.

중년여자가 지나간 자리에 소설가가 다가섰다. 그는 격주로 월요일마다 마트에 들른다. 그가 소설가라는 건 아직 확실치 않다. 주머니에 든 두툼하고 낡은 수첩과 행색에 비해 눈에 띄는 만년필만으로 추측해 볼 뿐이다. 수첩을 들고 마트를 찾는 사람은 드물지 않다. 꼼꼼한 고객들은 인터넷으로 물건 값을 미리 확인 한 후, 마트가 더 저렴해야만 물건에 손을 댄다. 그런 사람들에게 사야 할 물건 리스트와 가격을 적은 수첩은 필수품이다. 하지만 남자는 보통 사람들처럼 보기 위해 수첩을 준비한 것이 아니다. 만년필을 꺼내 빠른 손놀림으로 무언가를 적고 또 적는다. 처음에는 경쟁업체의 직원이 아닐까 했지만 그가 바라보고 적는 것은 물건들이 아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카트에 몸을 숙인 채 마치 화가가 크로키 하듯 재빨리 글씨를 써내려간다.

한번은 바코드 판독기에 에러가 생겨 계산이 중단된 적이 있었다.

“손님, 죄송합니다. 판독기에 문제가 생겨서 옆 계산대를 이용해 주셔야겠는데요.”

다른 손님 같으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물건을 되담아 자리를 옮길 테지만 그는 달랐다.

“고치는데 얼마나 걸리죠?”

수첩을 꺼내고 만년필 뚜껑을 연 후, 침착한 표정으로 내 대답을 기다렸다.

“직원이 와 봐야 알 것 같은데, 오래 걸리지는 않습니다. 10분 내외요.”

그가 내 대답을 수첩에 옮기고 있었다.

“기다리겠습니다. 천천히 하세요.”

지원팀 직원이 내려와 바코드 판독기를 고치는 동안 그는 내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남자가 다시 수첩에 만년필 끝을 가져갔다.

“캐셔들도 회식이라든가 동호회가 있습니까?”

“아르바이트생도 있고 정식직원도 있어요. 정식직원들은 가끔 부서회식을 하기도 하죠.”

그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 입을 조금 벌리고 ‘아아’ 낮게 외쳤다.

“처음 알았네요. 이런 벌써 고쳤군요.”

지원팀 직원은 계산대 아래서 웅크린 몸을 펴고 그의 물건 중, 애완동물용 외날빗을 가져다 댔다. 단말기 모니터에 새 항목 ‘애완외날’이라는 제목으로 3000원의 금액이 올라왔다. 남자는 퍽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 계산된 물건들을 가져온 쇼핑 주머니에 담기 시작했다. 근무수칙 중에는 고객에게 사적인 질문을 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소설가세요?’라고.

“동물을 키우시는군요?”

소설가냐는 질문 대신 나는 그의 또 다른 면모를 훔쳐보고 싶어졌다.

“네. 야옹, 고양이를 키웁니다.”

그는 거짓말을 했다.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외날빗 대신 주로 실리콘빗을 산다. 개보다 고양이의 털이 훨씬 가는데다 빠지는 양도 몇 배는 많아 외날빗보다 털이 달라붙어 날리지 않는 실리콘빗을 사는 것이다. 설령 외날빗으로 빗겨야 하는 장모종이라 하더라도 그의 대답은 엉터리였다. 그가 입은 검은 재킷과 검은 와이셔츠에는 털이라곤 한 오라기도 붙어 있지 않았다. 외출을 위해 완벽하게 털을 제거했거나 새 옷이라고 가정한다 해도 그리 석연치는 않다. 고양이 사육의 필수품인 모래나 사료 따위를 구입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고양이를 키우지 않는다.

야간 근무조는 11시에 업무를 마감한다. 그리고 그날 들어온 현금과 카드명세표를 매출액과 맞춰야 퇴근을 할 수 있다. 대략 12시가 되어서야 옷을 갈아입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집과 마트는 차로 15분 거리다. 방향이 같은 동료의 자동차를 얻어 타고 집에 돌아와 샤워를 마치면 12시 40분이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 산 지도 7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 이 도시와 집이 낯설다. 수많은 사람들과 옷깃이 스치고 웃으며 대화를 나누지만 나는 그들이 두렵다. 물건을 내밀고 내 앞에 서는 그들의 표정은 하나 같이 굳어 있다. 내 손놀림이 끝난 후, 자신의 지갑에서 빠져나갈 돈을 셈하느라 입술을 꼭 닫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가끔 반짝 세일 품목이 정상가로 처리되기라도 하면 그들은 악에 받쳐 나를 몰아세운다. 마치 캐셔가 자신의 지갑을 열어 몇 백 원 혹은 몇 십 원을 훔쳐가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나는 그들이 두려우면서도 좋다. 그들은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내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고마운 존재들이다. 소설가인 그와 내 공통점은 사람들을 관찰하고 해부하는 것이다. 우린 같은 취미와 관심사를 가진, 어쩌면 같은 부류의 사람일지 모른다.

“서울 ㅇ동에서 오늘 오후 7시경, 이십대 여성이 피살됐습니다. 피해자 이모씨는 자신의 자취방에서 입술과 코, 눈이 본드로 붙은 채 이웃주민 박모씨에게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은 사망원인을 질식사로 보고 동일수법의 전과자를 대상으로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피해자의 몸에서는 일정한 간격의 바늘 형태 자국이 목과 테이프로 결박된 손목 등에 남아 있어 독극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습니다.”

본드, 일정한 간격의 바늘형태를 지닌 외날빗, 테이프. 소설가가 오늘 사 간 물건들 중 일부였다. 그는 이 물건들과 함께 머그컵, 마른오징어, 타월세트, 중간 크기의 냄비, 맥주 한 박스를 ㅂ동에 위치한 자신의 집으로 배달시켰다. 그가 이모씨라는 여자를 테이프로 결박한 후, 얼굴의 모든 구멍을 본드로 봉하고, 외날빗을 살에 박아 여자의 고통스러운 몸부림을 즐기기라도 한 것일까? 뉴스는 이내 도시가스 인상과 거리 가두시위에 대한 보도로 넘어간다. 나는 텔레비전을 끄고 가만히 눈을 감는다. 남자의 얼굴을 기억하려 애썼지만 어쩐지 이목구비가 선명히 떠오르지 않는다. 앞으로 2주를 더 기다려야 그와 다시 만난다. 아니다, 나는 그의 주소를 알아낼 수 있다. 그와 나는 호기심이 너무 많다.
출근을 하자마자 지원팀으로 찾아갔다. 직원들은 대부분 점심 식사를 갔고 여직원 하나가 컴퓨터로 메신저를 하고 있다.

“판매팀 오신잔데요.”

메신저에서 겨우 눈을 뗀 직원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네, 말씀하세요.”

“어제 제 고객 중에 ㅂ동으로 배달 요청하신 분이 계시거든요. 그분께 카드 영수증을 못 드렸어요. 클레임 생길까봐 걱정 돼서요.”

“저희 쪽으로는 클레임 접수된 거 없는데요?”

모니터 작업표시줄에 주황색 칸이 반짝이자 직원이 재빨리 메신저 창을 올려 자판을 두드린다.

“그분 연락처 좀 주시면 안 될까요? 사과드리려고요.”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될 것 같은데.”

직원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대답한다.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래요.”

“여기 어제 배달 내역이니까 확인해 보실래요?”

마뜩치 않은 표정의 직원이 모니터에 ‘배달고객 리스트’라는 제목의 엑셀 파일을 열어준다. 남자의 이름은 알 수 없었지만 마트에서 거리가 꽤 있는 ㅂ동의 배달은 단 두 곳뿐이었고 그중 하나가 여자 이름이라는 걸 감안하면 ‘우병철’이라는 이름이 유력하다. 나는 미리 준비한 메모지에 그의 이름과 전화번호, 주소를 옮겨 적는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11번 계산대에 선다. 매주 살치살을 사가는 여자가 내 앞으로 다가선다. 선글라스를 쓰고 붉은 립스틱을 바른 그녀는 매 맞는 아내다. 가끔 그녀는 자신을 샌드백처럼 두들기는 덩치 큰 남편을 대동할 때도 있다. 하지만 오늘은 혼자다. 그녀가 혼자 마트에 들를 때는 눈가의 붉은 멍을 선글라스로 가리는 날뿐이다. 고기는 두 사람이 먹기에는 턱 없이 모자란 양이다. 100그램, 두어 번 나누어 눈가에 붙이면 꼭 알맞을 크기다.

“마트에서 아르바이트 하려면 어떻게 지원해야 하나요?”

여자가 조금 머뭇대다 내게 묻는다.

“상시채용을 하고 있지만 정규직은 1년에 한 번밖에 안 뽑아요. 얼마 전에 끝난 걸로 아는데.”

그녀는 콧등으로 떨어지는 선글라스를 바짝 올려 쓰고 고개를 숙인다.

“잘 몰라서 그러는데, 주부사원이란 거 정말 주부여야 가능한가요? 이혼 ……을 했다거나 그럼 불가능해요?”

드디어 여자가 스스로 샌드백의 지퍼를 열고 기어 나오려 한다. 비좁은 곳에 몸을 끼워 맞출수록 빼기는 더욱 버겁다.

“아니요, 가능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손님, 봉투 드릴까요?”

내게 물건 값을 치르는 여자의 손목 위에 깊은 흉이 자리하고 있다. 휘적휘적 입구를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자 역광 때문에 눈이 시리다.

“빨리 해 주세요.”

유난히 실수가 많은 날이다. 계산대에서 물건을 떨어뜨리고 봉투 값 계산을 여러 차례 누락시켰다. 머릿속은 온통 우병철이라는 남자 생각으로 가득하다. 그를 찾아가서 나는 뭘 어째야 하는 걸까? 단순히 남을 관찰하는 취미만으로 증거 없이 그를 범인으로 내몰 수는 없다.

“언니, 안 가?”

집 방향이 같은 동료가 생각에 잠겨 우두커니 앉아 있는 내게 말을 붙여온다.

“먼저 가. 난 어디 좀 들렀다 갈게.”

그가 범인이라는 확고한 증거가 있더라도 나는 섣불리 그를 신고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애당초 내 목표는 관찰일 뿐이다. 알몸에 원피스 한 장 걸친 여자의 직업을 끼워 맞추는 것이 즐거웠듯 나는 내 추론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핸드백 속에 남자의 주소가 든 쪽지를 넣고 마트를 나선다.

ㅂ동은 같은 구에 있지만 자동차로 30여 분이나 달려야 도착하는 외곽에 속했다. 남자가 사는 곳은 신축 오피스텔이었다. 주변의 후줄근한 상가와 주택들 때문에 새로 지은 7층짜리 건물이 더욱 눈에 띈다. 경비원은 없어 보이지만 1층에 패스워드 패널이 있다. 예상치 못한 일이다. 일단 나는 1층 현관 옆에 붙은 우편함에서 남자의 방 번호와 일치하는 함을 열어 우편물을 확인한다. 두 통의 도톰한 봉투가 손에 잡힌다. 건물 옆면에 몸을 숨기고 우편물 하나를 뜯는다. 발신인은 카드사고 안에 든 내용물은 명세서다. 그가 지난 한 달간 어디에 지출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단서다. 내가 근무하는 마트에서 두 번의 결제 내역이 있었고, 여성의류매장에서 32만 원이 삼 개월 할부로 결제되었다. 또 식당인지 술집인지 알 수 없는 ‘미래와’라는 곳에서 3만 원씩 두 번 결제가 된 걸 제외하곤 휴대폰 요금, 보험료 등이 빠져나갔을 뿐이다.

다른 봉투는 남자의 이름 대신 ‘이성아’라는 이름 앞으로 배달된 것인데 발신인은 백화점이고 할인 쿠폰이 들어 있다. 남자는 결혼을 했을까? 문득 그의 손가락이 허전했음이 기억해 냈지만, 모든 기혼자가 다 반지를 끼는 것은 아니다. 그때 현관문 쪽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자고 가라니까.”

남자의 목소리다.

“됐다. 나이 찬 아들 집에서 왜 자고 가. 빨리 애인이든 색시든 만들어서 알콩달콩 살아. 밥해 놓고 간 지 사흘은 됐는데 그대로더라. 대체 뭘 먹고 사는 거니?”

나는 벽에 바짝 몸을 숨기고 목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내밀어 본다. 편안한 차림의 남자와 오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이야기를 나누며 대로를 향해 걸어간다. 둘은 얼굴이 많이 닮지는 않았지만 눈매가 서늘하고 어깨가 좁은 체형으로 누가 봐도 혈연지간이다. 미리 택시를 불렀는지 비상등을 켠 택시 기사가 둘을 향해 손을 내젓는다. 아주머니가 택시에 오르자 남자는 습관처럼 점퍼 호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택시 번호를 적는 듯했다.

“가셨어?”

택시가 출발하자, 곧바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건물 앞 주차장에서 들려온다.

“오래 기다렸지?”

검은색 자동차에서 긴 생머리의 키 큰 여자 하나가 내리더니 남자를 향해 종종걸음을 친다.

“지루해서 혼났네.”

“아들한테 장가가라고 성화이신 양반이 12시 넘도록 안 가시는 건 뭔지. 빨리 들어가자.”

“원고 마감은 끝났어? 설마 밤새 컴퓨터만 붙잡고 있는 거 아냐?”

남자가 현관 앞에서 비밀번호를 누른다.

“원래 소설가 애인들은 다 독수공방 하는 거야.”

둘이 동시에 유쾌한 웃음을 터트린다. 나의 예상대로 그는 소설가다. 그러나 살인자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 둘이 유리문을 밀고 사라지자 조명센서가 꺼지고 어둠이 자리 잡는다. 진눈깨비가 조금씩 흩날리는 대로변에서 택시를 기다린다. 갑작스런 피곤이 몰려와 눈이 스르르 감긴다. 미끄러지듯 택시 한 대가 내 앞에 선다. 뻑뻑한 눈을 바로 뜨려 하지만 온몸이 묵은 솜처럼 무겁다. 택시에서 내린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간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남자는 정확히 2주 후 다시 나타났다. 그 사이 남편에게 매를 맞던 여자는 파트타임 직원으로 채용되어 이제 막 일을 배우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소연이다. 그녀의 계산대로 남자가 카트를 밀고 다가선다. 나는 고개를 빼, 그가 사는 물건들을 확인해 본다. 몇 가지 식료품과 와인병따개, 스테플러심, 면도날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은 그는 소연과 이야기를 나누며 수첩에 메모를 하고 있다. 나는 마트 업무가 종료된 후에 남자의 물건을 계산한 소연에게 다가갔다.

“메모하던 남자 말야. 뭘 물었어?”

블라우스 단추를 풀며 이제는 멍자국이 사라진 해맑은 눈의 소연이 배시시 웃는다.

“왜? 그 사람한테 관심 있어?”

“그게 아니라, 지난번에도 좀 이상한 질문을 하길래. 궁금해서.”

“언니나 그 사람이나 궁금한 게 참 많아. 별거 안 물었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냐, 시간당 얼마를 받냐, 마트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냐, 같은 시시껄렁한 질문들.”

터틀넥 스웨터를 입고 재킷을 걸친 소연이 내 곁에 바짝 다가서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댄다.

“그리고 와인 좋아하냐고.”

“그래서?”

“좋아한다고 했지. 그치만 남자랑은 술 안 마신다고 딱 잘랐어.”

“왜?”

“미쳤수? 그렇게 데이고도 남자가 좋을 리 있어?”

그녀가 손을 흔들며 탈의실을 빠져 나간다. 소연은 자신을 두들겨 패던 남자와 아직 호적 정리가 되지 않았지만 그에게 새 여자가 생기며 별거에 합의했다고 한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어. 난 그 사람의 새 여자에게 감사해. 그런 인간을 떠맡긴 게 좀 미안하긴 하지만 지가 좋아 살겠다니 내 알 바 아니잖아.”

소연은 마트 근처 고시원에 산다. 나는 그녀가 머무는 집 앞을 지나 큰길 옆 인도를 걷는다. 늘 집까지 데려다 주던 동료가 마트를 그만두어 꼼짝 없이 택시를 이용하거나 걸어 다녀야 했다.

날씨가 많이 풀렸고 바람도 잠잠한 밤이다. 인적이 뜸한 인도 위에 포플러 가로수들이 긴 그림자를 드리워 도로보다 더 어둑하게 느껴진다. 옆으로는 6차선 도로가 있지만 차량이 거의 없어 반대편 인도가 뻔히 보인다. 20여 미터 건너편에 사람의 검은 실루엣이 나와 비슷한 속도로 걷고 있다. 근처에는 주택가나 버스 정류장이 없어 밤 시간이면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저 길을 걷는 누군가가 궁금해졌다. 키나 체형이 가늠되지는 않지만 모자를 눌러쓰고 안경을 착용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달리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에 안경이 잠시 반짝였기 때문이다. 나는 반대편의 그가 소설가는 아닐까 생각해 본다. 와인병따개와 스테플러심이 든 쇼핑 봉투를 들고 자신을 미행한 어느 캐셔를 살해하기 위해 그가 따라 붙은 것은 아닐까? 소설가에 대한 살인 의혹은 아직 명쾌하게 풀리지 않았다. 그가 노리는 다음 대상이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택시를 잡아야 한다. 손을 치켜들자마자 손님을 태운 택시 하나가 멈춰 선다. 제발 방향이 같기를.

“어디까지 가세요?”

운전석 유리창이 내려가고, 반백의 기사가 내게 묻는다.

“ㅍ오피스텔이요.”

“손님, 괜찮으세요?”

상체를 돌린 기사가 뒷좌석에 먼저 탄 부인에게 양해를 구한다.

“괜찮아요. 이 시간에 택시 잡기가 얼마나 힘들다고.”

재빨리 조수석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룸미러로 고급 자수가 놓인 투피스를 입은 여자의 가슴께가 비쳤다.

“귀가가 늦으시네요.”

그녀가 내게 먼저 말을 붙여온다. 서울 밖에서는 살아 본적이 없는 말투다.

“마트에서 일하거든요. 고맙습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세상에는 나와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을 가진 이들은 대부분 보통 사람보다 호기심이 많다. 그렇게 타고난 것이 아니다. 사람을 상대하다보니 그 싹이 움터 줄기와 잎을 돋워낸 것이다. 그런 호기심조차 없다면 하루가 너무 길고 지루하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데요?”

“우선, 유흥가나 주택가가 없는 외진 도로변에서 택시를 잡는다는 건 뭔가를 즐기고 돌아가는 사람이 아니에요. 아마도 근처에 직장이 있을 게 틀림없는데 여긴 보다시피 저 할인마트밖엔 없잖아요. 그리고 그 구두. 하루 종일 서 있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게 맞지요? 모양이 예쁘달 수는 없지만 무척이나 발이 편해 보이네요. 이런 구두를 신을 나이치곤 너무 젊잖아요. 그쪽이.”

그럴듯한 추리다.

“남자보다 여자를 추리하는 편이 더 쉽죠. 남자들의 거짓말은 주변의 한두 사람만을 속이지 않아요. 여자보다 거짓말에 능하달 수는 없지만 한번 작정을 하면 가족이나 친구,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속이죠. 자기가 속아야 완벽한 거짓말이 되거든요. 여잔 아무리 앙큼한 거짓말을 담고 있다 하더라도 옷차림이나 화장법에서 모든 게 탄로가 나죠. 정말 복잡한 건 남자 쪽이랍니다.”

어느새 오피스텔 앞에 택시가 멈춰 섰다. 나는 셈을 치르고 택시에서 내린다. 가슴 속에 무언가가 울컥하며 요동친다. 소설가가 살인마라면 그는 거짓말을 할 것이다. 가족과 친구,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 완벽하게 속이며 치밀하게. 그런 철옹성 같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면 좀 더 쉬운 쪽을 택해야 한다. 그의 최측근, 긴 머리 애인이다.

평소와 같이 샤워를 하고 텔레비전을 켠다. 그녀를 다시 만나기 위해선 그의 집에 다시 찾아가는 방법뿐이 없다. 다음 주부터는 근무시간이 오전으로 당겨진다. 기회다.

“오늘 오후 5시경, ㅊ동에서 이십대 여성이 살해되었습니다. 살해된 최씨는 자신의 자택에서 양쪽 눈이 훼손된 상태로 어머니 김모씨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전신에 예리한 흉기로 인한 자상이 발견되었으며, 입술과 성기가 스테플러로 훼손되어 있는 등 범행의 수법이 잔인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또 훼손된 눈의 일부는 변기 속에서 발견이 되었으며 사건 현장에 남아 있던 와인병따개를 이용해 적출한 것으로 보인다고 부검의는 전했습니다.”

나는 ㅊ동의 이십대 여성이 소설가의 애인일 거라 생각한다. 늘씬한 몸에 샴푸모델처럼 찰랑이는 머릿결을 가진 여자, 눈동자가 뽑히고 면도칼로 난자된 그녀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녀의 도톰하고 보드라운 입술에 박혔을 스테플러심들이 지네처럼 스멀스멀 내 입술 위를 기어 다니는 것 같다.

신문 사절이라고 현관 앞에 써 붙여도 매일 새벽 현관문 앞에 일간지가 쌓인다. 현관문을 열어 무릎 높이까지 쌓인 일간지를 집 안으로 끌어들인다. 수북한 신문들 사이에서 날짜를 확인해 가며 2주마다 한 부씩을 빼어냈다. 사회면을 펼친다. 거의 매일 살인이 벌어지고는 있었지만 2주 간격으로 죽어나간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십대의 젊은 여성이었고, 그 수법이 잔인했다. ㄱ동에 사는 24세 직장여성은 입부터 목까지 10인치짜리 빵칼이 들어간 상태로 질식사 했고, ㄹ동의 28세 번역가는 온몸이 낚싯줄로 결박되어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또한 그녀의 뽑힌 혀는 그릴에 익어 있었다. ㅅ동의 피아노를 전공하는 21세 여대생은 입과 코에 뜨거운 젤라틴이 가득 차 질식사했고, ㅈ동의 23세의 연기자지망생은 타정총으로 온 몸에 못이 박혀 살해된데다 머리카락까지 한 올 없이 삭발되었다. 특별한 패턴은 없어 보이지만 그녀들을 잔인하게 살해했을 법한 사내의 희고 멀끔한 얼굴만은 알 것도 같다.

자신의 애인을 어머니에게 떳떳이 소개하지 못했던 이유는 모두 2주 후면 사라질 존재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 차례는 이제 막 무거운 족쇄에서 발을 빼고 삶의 희망에 들뜬 여자일지 모른다. 지금쯤 비좁은 고시원에 몸을 뉘이고 내일을 꿈꾸며 잠이 들, 그 여자가 위험하다.
이튿날 출근한 소연의 손에 장미 다발이 들려 있다.

“나한테 와인 좋아하냐고 물었던 그치 기억나?”

소연은 유니폼으로 갈아입느라 장미 다발을 어찌할 줄 모르더니 결국 자신의 옷을 바닥에 내려놓고 꽃을 라커룸에 얌전히 올려놓는다.

“그 사람이 준 거야?”

“내가 하도 남자한테 데여서 여기에 빙하기가 찾아온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소연이 자신의 가슴을 검지로 가리킨다.

“잘 모르는 사람인데 좀 알아보고 사귀지 그래?”

“언니, 그 사람한테 마음 있는 거 아니지?”

입가에 웃음을 담뿍 머금은 소연이 핸드백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 내게 내민다.

“이걸 읽고 마음이 흔들린 거야. 어쩜 이렇게 로맨틱할까?”

소연이 건넨 종이를 펴자 소설가가 쓴 듯한 글씨들이 눈에 들어온다. 달필이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에 기술이라는 책을 읽어 보셨습니까? 우리 땐 워낙 유명한 책이고 연애를 해 본 사람들이라면 제목 때문에라도 한 권씩 있게 마련이었지요. 저 또한 어린 시절 얼치기 연애에 눈이 멀어 집에 한 권 가지고 있습니다. 거의 읽지는 않았지만 서문에 이런 글이 있더군요. ‘아무것도 모르는 자는 아무것도 사랑하지 못한다.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무가치하다. 그러나 이해하는 자는 또한 사랑하고 주목하고 파악한다. 한 사물에 대한 고유한 지식이 많으면 그럴수록, 사랑은 더욱이 위대하다. 모든 열매가 딸기와 동시에 익는다고 상상하는 자는 포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제가 이렇게 구닥다리입니다. 그냥 그쪽이 좋습니다, 라고 하면 될 것을. 이렇게 고민하다 책장까지 뒤지고 뒤져 어설피 에둘러 말하고 있다니. 부끄럽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내일 두 시간쯤 일찍 나오실 수 없을까요? 함께 점심을 나누고 싶습니다.

2주에 한 번씩 여자를 갈아치우려면 남다른 매력이 필요하다. 그는 눈에 띌 정도의 미남은 아니다. 시루에서 막 꺼낸 콩나물처럼 그에게선 비릿한 냄새가 풍긴다. 그를 살인자라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 냄새는 어린 시절 비옷에서 맡았던 싱그러운 추억을 되살려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 그건 피 냄새다. 끈적하고 음침한, 세상 모든 비극의 시작, 피.

“만날 거니?”

편지를 읽는 사이 소연은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서른 살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앳된 용모다. 그의 취향은 긴 생머리일지 모른다. 소연의 곧은 머리카락이 고무 밴드에 모아져 하나로 묶인다.

“봄이 오잖아. 진한 연애 같은 건 꿈도 꾸지 않아. 애인 말고 친구 하잘 거야. 설레는 친구.”

세상에 설레는 이성친구란 없다. ‘설레다’를 빼던지 친구라는 단어를 빼야 문장이 성립된다. 소연은 이튿날도 무척이나 상기된 표정으로 탈의실에 들어왔다. 품에는 연시를 잘 쓰기로 유명한 작가의 시집이 들려 있다.

“그 남자가 준 거야?”

“역시 세상엔 딸기만 있는 게 아니었어. 포도도 있고 사과도 있더라고. 그는 부드러운 멜론이야. 한 입 깨물면 달콤한 향기가 입 안 가득 퍼지는.”

소연은 마치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이야기 하고 일을 하고 밥을 먹는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렀다. 둘은 매일 낮에 만나는 듯하다. 근무 시간이 바뀐 다음부터는 밤에 데이트를 즐기는 눈치다. 퇴근을 준비하는 그녀의 손에 마트 비닐 봉투가 들려 있다.

“잔뜩 샀네?”

“낙지 물이 좋더라고. 초대 받았어. 아무것도 사오지 말라지만 나 실은 요리를 잘하거든. 뭔가 해주고 싶어. 입에 불이 나게 매운 낙지를 먹는 부드럽고 달콤한 남자를 보고 싶어. 고춧가루는 있겠지?”

초대를 받았다는 건 둘 사이에 꽤나 진전이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둘은 낙지볶음을 먹고 침대로 갈까? 아니면 곧장 침대로 갔다 뒤늦게 허기를 느끼곤 낙지볶음으로 빈속을 채우게 될까? 확실한 것은 아직 그녀의 목숨은 안전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의 집에서 만큼은 살인이 벌어지지 않으리라. 지금껏 그가 살인용의자로 지목되지 않은 이유는 주변인들에게 자신의 연애를 극도로 숨겨 왔기 때문이다.

아직 6일의 유예기간이 남아 있다. 그가 이번에는 어떤 물건을 사들일지 궁금하다. 어쩌면 다른 마트를 이용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패턴이 없는 살인을 저지르는 남자라면 태연히 연인을 죽일 물건들의 계산을 연인에게 맡길지도 모른다. 나는 일단 지켜보기로 한다. 딱히 내가 나설 계제가 아니다. 남자에게는 아직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 무엇보다 나는 관찰자일 뿐이다. 그가 살인자일지 모른다는 자그마한 단서를 들고 내 추측이 옳았나 옳지 않았나를 검증하고 싶을 뿐이다. 진짜 냉혈한은 그가 아니라 나다.

소연은 매일 저녁, 남자의 집으로 퇴근을 한다. 고시원에서는 필요 없을 식료품들이 그녀 손에 들려 있다. 그와 연애를 시작하며 소연은 부쩍 외모에 신경을 썼고 화장이 짙어졌다.

“그 남자, 내 과거를 다 알고도 이해해 주는 사람이야.”

6일의 유예기간이 끝난 아침, 소연이 출근을 하자마자 두 눈 가득 감격의 눈물을 머금고 내게 외친다.

“다 말했어?”

“응, 어젯밤. 내 손을 꼭 잡고는 그와 원만히 이혼하도록 도와주겠대. 아는 변호사도 소개해 줄 거고, 정식으로 이혼하게 되면 그땐 함께 살자 말했어. 너무 감동해서 나도 모르게 사랑한다고 말해 버렸어. 미련한 짓일까?”

“소연 씨, 그 사람 너무 믿지 마. 뭔가를 적는 사람들은 언젠가 반드시 그걸 풀어내게 돼 있어. 사실을 가장하고 있지만 그건 모두 허구야. 왜냐하면 주워들은 얘기들이니까. 자신의 얘기인 척 남을 속이는 거지.”

허황된 거짓말로 여자를 유혹하는 남자는 세상 어디에나 있다. 여자의 마음이 헐거워진 틈을 그들은 단박에 눈치 챈다. 그리고 얇디얇은 면도칼처럼 그녀들의 어수룩한 마음속에 제 성기를 꽂아 넣는다. 그 끝에 마취제가 묻어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자신의 상처를 헤집는 그것에 미련할 지경으로 감격한다. 소연의 가슴 어디께에도 그의 욕망이 붉은 혀를 날름거리고 있다.

지난 살인 사건으로부터 2주일이 되는 날이다.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평소보다 오래 장을 본다. 그의 카트가 소연의 계산대를 향해 방향을 잡는다. 자신의 계산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남자의 눈길이 소연을 향해 있다. 언뜻 고개를 돌릴 때마다 소연도 그와 눈을 마주치곤 생긋 웃는다. 고개를 빼서 남자가 카트에 담은 물건들을 들여다본다. 플라스틱 상자에 담긴 가정용 글루건, 열두 가지 컬러의 마카펜 세트, 미트해머, 구이용 치맛살, 갖가지 야채와 올리브오일 등이 들었다. 자신의 계산 차례가 되자 소설가가 소연의 앞으로 물건들을 내려놓는다. 계산을 하는 소연의 손길이 눈에 띄게 느려진다. 남자의 손이 소연의 손등을 가볍게 건드렸던 것도 같다. 오늘밤, 소연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내가 탈의실에 들어섰을 때 소연은 다급하게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든다.

“바쁜 일 있나봐?”

애써 태연한 척하며 그녀에게 묻는다. 오늘 남자는 소연을 만나지 않을 것이다. 만난다 하더라도 일찍 돌려보내고 그녀의 뒤를 밟을 터다. 소연이 고시원에 산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소동을 피하기 위해 모텔 같은 숙박업소를 이용할 수도 있다. 그가 범인이라는 단서를 잡으려면 나 또한 소연을 따라나서야 한다.

“응, 미용실 가. 급해서 먼저 나가.”

허둥지둥 유니폼을 갈아입고 소연을 따라나섰지만 소연은 벌써 택시를 잡아타고 저만치 사라져 가고 있다. 그녀는 주기적으로 스트레이트 퍼머를 한다. 하지만 일주일전 이미 새로운 퍼머를 했으므로 다시 미용실에 간다는 건 이례적이다. 소연을 놓쳤기 때문에 나는 곧장 남자의 집으로 향한다. 물건을 잔뜩 샀으니 일단 그가 집으로 돌아가 그것들을 냉장고나 서랍 안에 부려 놓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시간이 겹쳐 도로는 꽉 막혔다. 어둑해져서야 남자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다. 그가 사는 홋수의 창문에 불이 켜져 있다. 아직 그가 집 안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언제 나올지 모르므로 나는 몸을 숨기기 적당한 장소를 물색한다. 길 건너편 2층 건물에 다방이 눈에 띈다. 창가에 자리를 잡으면 오피스텔 입구가 눈에 들어 올 듯도 하다.

다방에는 손님이 없다. 배달 전문인지 늙수그레한 주인 여자가 커피포트와 커피 잔을 보자기에 싸 일렬로 배치하고 있다. 창가 가운데 자리에 앉아 오피스텔을 바라본다. 주인 여자가 마주 앉아 내 취향은 묻지도 않고 인스턴트커피에 크림과 설탕을 타 내민다.

6시 30분부터 시작된 나의 관찰은 밤 9시가 되도록 끝나지 않는다.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지만 남자의 집엔 변화가 없다. 그의 방에 분명 불이 켜져 있었지만 그건 방범을 위한 자구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든다. 내가 도착하기 전에 남자는 잠시 집에 들러 함부로 짐을 부려놓고 소연을 찾아 나섰는지 모른다. 핸드백에서 휴대폰을 꺼내 소연에게 전화를 건다. 받지 않는다. 그때 낯익은 모습의 여자가 오피스텔 입구를 서성인다. 머리를 세팅해 우아한 컬을 만들고 연분홍색 투피스를 차려 입은 소연이 과일 바구니를 들고 오피스텔 현관에 다가선다. 능숙한 손동작으로 비밀번호를 누른 그녀가 안으로 사라진다. 몇 차례나 더 소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끝내 받지 않는다.

9시 30분경이 되자 남자와 소연이 현관문을 밀고 걸어 나온다. 이어 택시 한 대가 오피스텔 앞에 멈춰 서고 모피코트를 입은 중년부인이 내린다. 중년부인은 지난번에 본 소설가의 어머니인 듯하다. 활짝 웃는 낯의 소연이 중년부인에게 인사를 하자 소설가가 현관문을 연다. 이내 셋은 건물 안으로 사라진다.

10시가 되자 다방 주인은 문을 닫아야 할 시간이라며 의자를 테이블 위에 겹친다. 아직 소연은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내일 아침까지 그녀가 살아있다면 내 짐작은 틀린 것이 된다. 나는 그것을 확인해야만 한다. 돌아가는 소연을, 그 뒤를 밟는 남자를 쫓아야 한다. 나는 다방을 나와 주차장에 몸을 숨긴다. 밤이 되자 한기가 스민다. 드문드문 다른 입주자들의 출입이 있지만 여전히 소연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그녀는 12시가 다 되어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중년부인 없이 남자와 단 둘뿐이다. 현관 앞에서 두 볼이 붉게 상기된 소연의 부푼 머릿결을 남자가 쓰다듬는다.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 듯 하지만 그녀의 훌쩍이는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는다. 잠시 후 택시 한 대가 오피스텔 앞에 서고 남자가 뒷문을 열어 소연을 태운다. 그는 택시가 떠난 후에도 한동안이나 그녀가 사라진 어둠을 묵묵히 바라본다. 그러곤 무거운 걸음을 터덜거리며 현관으로 들어간다. 1시가 가깝도록 주차장에 몸을 숨기고 누군가 나오기를 기다리지만 추리닝 차림의 젊은 남자와 야식 배달원이 들락거렸을 뿐, 남자와 그의 어머니는 나오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오며 지난 2주일간 품어온 의혹들이 눈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무색무취의 맑은 그것이 스커트 자락을 적신다. 소연이 목숨을 부지한 것이 다행이었지만 확고했던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비정상적인 집착이었다. 누군가 나를 정신병자라 몰아세워도 나는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내세우지 못할 터다. 고향으로 돌아가 늙어가는 어머니와 이제는 초등학교 3학년일 딸을 끌어안고 싶다. 그들과 같은 비누를 쓰며 같은 냄새를 풍기고 싶다.

남편은 나를 의부증 환자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겐 지켜야 할 가정이 있었다. 남편에게는 여자가 있는 게 분명했다. 새벽마다 조깅을 한다며 사라지는 그의 뒤를 밟아 그녀의 집도 알아냈다. 작은 담뱃가게였다. 남편은 담배를 피우지 않기 때문에 담뱃가게에 들를 이유가 없었다. 동이 터오는 담뱃가게 앞에서 남편의 목소리를 엿들었다.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나무문을 사이로 웅웅거렸다. 여자의 헤픈 웃음소리와 은밀하고도 불온한 작은 소음들이 그의 외도를 증명했다.

남편은 흙탕물을 뒤집어 쓴 표정으로 추궁하는 나를 바라보았다.

“거긴 칠십대 할머니 혼자 하는 가게야. 새벽잠 없는 노인네라 아침마다 거기서 우유를 사 마실 뿐인데 그것도 죄야? 당신은 의부증이야. 알아? 의부증!”

남편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귀에 맴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내 방이 있는 복도 끝을 향해 걷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문 사이에서 무언가가 팔랑이며 떨어진다. 작은 쪽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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