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자

  • 장르: 추리/스릴러 | 태그: #대리자 #김주동 #추리단편 #추리스릴러단편선
  • 분량: 113매
  • 소개: 위조지폐범의 죽음 뒤에 의문의 남자가 있다. 그런데 그 남자의 살인이 뒤를 쫓던 형사와 깊은 관계가 있는데… 더보기

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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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들어올려진 대변기에 손을 살짝 담그고 있었다. 대변기는 핏물로 얼룩져 있었다. 벽에 머리를 기대고 깊은 잠에 곯아떨어진 듯 미동이 없었다. 출근길 지하철 화장실에서 정체불명의 남자는 이렇듯 죽어 있었다. 하얀 단추가 떨어져나간 풀어헤쳐진 와이셔츠 안쪽 러닝셔츠 위로 둥글넓적하게 혈흔이 남아 있었다. 자세한 건 부검을 해봐야 답이 나오겠지만 언뜻 보기에는 칼 같은 날카로운 것에 찔린 것 같았다.

피살자 주변에서는 범인과 관련된 증거품을 찾기 어려웠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렸을 화장실은 지문 천지여서 정확히 누구의 지문인지도 골라내기 쉽지 않았다. 다행히 피살자의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찾아냈다.

이름 조경갑. 온순하면서도 희멀겋게 잘생긴 피살자는 이제 스물 하나였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렇게 초라한 개죽음을 당했을까.

화장실로 들어오려던 사람들이 모두 정복경찰의 제지를 받고 있었다. 웅성거리는 구경꾼들 사이로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시커먼 얼굴에 꼬질꼬질한 차림으로 돌아가는 꼴을 살피고 있었다. 노숙자처럼 보였다. 지하철에서 노숙을 하는 자라면 뭔가 본 게 없을까.

그가 나를 봤을 때 흠칫 놀라는 것 같았다. 기겁하는 것 같기도 했다. 뭔가 봤을 거란 짐작이 확신으로 바뀌려 들 때 그가 몸을 돌려 다급히 현장을 떠나려 했다.

“어이.”

내가 불렀지만 그는 못 들은 척 잰걸음을 놓았다. 나는 속으로 세고 있었다. 열을 세기 전에 한 번은 돌아볼 거라고. 내 짐작은 맞았다. 넷을 세고 있을 때 그가 돌아보았고 나를 보고는 당황해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가 출근길을 서두르는 어떤 아가씨와 부딪쳤다. 아가씨의 손가방이 바닥에 떨어졌고 가방에서 립스틱이 미끄러지듯 흘러나왔다. 사람들 틈을 잘도 피해 굴러가던 립스틱을 보던 남자가 잠깐 멈췄다. 그것도 잠시. 남자는 다시금 빠르게 발을 놀렸다.

남자는 개찰구 쪽으로 다급히 향하더니 몸을 움츠려 쏙 개찰구를 빠져나가 승강장 계단으로 내려갔다. 그를 따라 나도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마침 전동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 틈에 섞여 내게서 멀어지고 있는 그를 발견했다. 내가 그를 가리켰다. 나를 보고는 더 서두르는 것 같았다. 내 앞을 가로막는 사람들을 밀쳐내고 그를 쫓아갔다. 전동차가 멎고 문이 열렸을 때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사람들이 다 나오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무작정 전동차에 올랐다. 나도 전동차에 몸을 실었고, 그가 있는 칸으로 달려갔다. 다음 칸으로 옮겨 탔을 때 웬 사내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내가 쫓던 남자가 보였다. 내 앞을 가로막던 자를 밀치고 그쪽으로 가려하는데 다시금 사내가 나를 막았다. 그러면서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나는 다음 역에서 내려 멀뚱히 떠나는 전동차를 보았다. 나를 가로막았던 사내는 소매치기 조직을 수사하고 있던 형사였다. 노숙자처럼 보였던 남자는 경찰 끄나풀이었다.

“그놈 주변에 다른 소매치기가 있었거든요. 경찰하고 접촉하는 거 보이면 좋을 거 없죠.”

“난 뭔가 아는 놈인가 했지.”

“그런 거 있으면 확실히 알아봐드릴게요.”

이렇게 그를 놓친 게 어쩐지 맘에 걸렸다.
조경갑은 재수생 신분이었다. 말이 좋아 재수생이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냥 놀고 있는 놈이었다. 그런 놈이 뭣 때문에 이렇게 피살됐는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누구에게 원한을 살 만큼 오래 산 놈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고.

주변 인물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그가 다니고 있는 학원을 찾아갔지만 헛수고였다. 등록만 해놓았지 나오지 않을 때가 더 많아 딱히 그를 기억하고 있는 선생과 학생들은 없었다. 간혹 학원에 나왔을 때도 화장실 가는 것과 밥 먹는 걸 제외하곤 하루 종일 말없이 멍청하게 책상만 지키고 있었다는 게 주변 학생들의 진술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와 친하게 어울리는 학생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의 집으로 찾아갔을 때 집은 비어 있었다. 영남대학병원 사거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주택가 골목길에 그의 집은 위치해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덩그런 마당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 곁엔 썩은 배추들이 놓여 있었다. 흙이 덕지덕지 붙은 금 간 화분 위에는 이름 모를 푸른 꽃이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내가 헛기침으로 인기척을 했음에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곧이어 따라 들어온 후배가 주인을 불렀지만 방문을 열고 나오는 이는 없었다. 곧 비라도 퍼부을 듯한 우중충한 날씨였다. 나와 후배는 대책 없이 누군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밥이나 먹으러 가죠.”

잠시 뒤, 문지방에 걸터앉아 있던 후배가 일어서며 말했다. 배가 고프기는 했다. 늦은 오후가 되기까지 제대로 밥 한 끼 못 먹었다.

우리는 도로로 나와 길 건너 식당으로 들어갔다. 정식을 시켜 먹는데 텔레비전에서는 추악한 범죄관련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범인의 엽기적인 행각에 눈을 반짝이며 관심 있게 지켜봤지만 나와 후배는 밥만 떠먹기 바빴다. 한 그릇 비우는데 둘 다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티슈로 입을 닦고 있는데 이번엔 뺑소니 사고 뉴스가 아나운서의 입을 타고 나왔다. 꾸물대는 후배에게 신경질을 냈다.

“그만 가자.”

후배는 군말 않고 집고 있던 동그랑땡을 그대로 놓아버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로 돌아오면서 후배에게 짜증을 낸 게 마음에 걸렸다. 후배는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괜찮아. 잊었으니까.”

후배와 헤어져 혼자 차를 몰면서 나는 정말 잊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후배는 세 살배기 딸아이가 아파 잠깐 집에 갔다 온다고 했다. 나도 딸이 있었지. 은미라고.

신호에 걸려 차를 세우다 보면 가끔씩 뺑소니 목격자를 찾는다는 현수막을 접하곤 했다. 그때마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뺑소니 친 새끼의 면상을 보는 순간, 말 그대로 확 돌아버렸다. 그 순간을 어떻게 참고 넘겼는지. 뺑소니 수사에서 철저히 배제된 채 매일 술로 지낸 게 엊그제 같은데. 동료들은 그를 나로부터 철저히 보호했다. 나는 그에게 이를 갈았다. 하지만 운명은 가혹하게도 그 새끼에게도 고등학생 딸이 있단 걸 알려주었다. 후배가 내게 들려준 얘기였다. 고등학생 딸은 그때 조수석에 앉아 있었고, 죄책감에 시달린 그 딸은 아버지의 죄를 털어놓고 말았다. 사고현장에서 아버지를 설득 못한 자신의 죄가 더 크다면서 자신도 처벌해 달라는 말까지 했다는 것이다. 딸의 자수로 사건은 쉽게 해결되었고 그걸 후배에게서 들은 난 원한의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후배가 그 얘길 해준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 뒤 난 그 딸을 만나보았다. 그런데 그는 내게 이상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아저씨한테는 참말 죄송한 얘기지만요. 아저씨 딸이요, 갑자기 도로로 뛰어들었거든요. 뭐에 쫓기는 사람처럼요.”

문득문득 그 말이 떠올랐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사고를 낸 데 대한 부담이나 죄의식에서 벗어나려는 변명 같은 건 아닐까하고 짐작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갑작스런 휴대폰 진동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전화를 받고 보니 그때 그 소매치기 담당 형사였다.

“왜?”

“그놈이 당했어요.”

“그놈이라니?”

“소매치기요.”

“소매치기?”

경찰 끄나풀이라고 했던.

“그래서?”

“그게요. 그놈 주변에서 돈이 발견됐는데, 모두 위조된 겁니다. 그 돈으로 우리 몰래 마약 거래하다 상대편에게 당한 거 같아요.”

“자세히 얘기해 봐.”

“근데, 그 돈이 죽은 조경갑이 거였답니다.”
소매치기는 병원 응급실에 실려와 있었다. 지독한 폭행을 당한 모양이었다. 가슴에는 무가지 신문을 한 장 덮고 있었는데 얼굴을 찡그린 채 얕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얼굴은 멍투성이였다.

소매치기 담당 형사가 말했다.

“조경갑은 위폐 운반책이었던 거 같습니다. 이 소매치기가 죽은 조경갑이 옆에서 위폐를 발견했고요. 웬 떡인가 했겠죠. 그 위폐로 약을 거래하려다 거래 상대자에게 당한 거고요.”

내 생각도 그랬다.

“근데 이상하잖아. 조경갑을 죽인 놈은 왜 돈을 안 챙겼을까. 가짜인 걸 알았을까.”

“일반인이 볼 때는 가짜를 식별하는 건 어려울 텐데요. 약 거래하는 놈들이야 이런 일이 있을 테니 알 수도 있을 테지만요.”

“그렇담 돈을 노린 게 아니란 말인데.”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원한.’

한때 나 역시도 가슴에 품고 살아왔던 것. 어쨌든 이 추측은 옆으로 치워두기로 했다.

“위폐범들 조사해 봐야겠다. 그놈들 내에서 무슨 트러블이 생겼을 수도 있으니까.”
며칠 동안, 위폐범들 중에서 구속된 놈이나 출소한 놈들 기록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요전에 조경갑의 집 근처 한 호프집에서 위폐 신고가 접수된 적이 있었다. 범인을 잡았지만 조무래기에 불과해서 사실 수확은 없었다.

정씨는 출소한 뒤 마음을 잡았는지 현재는 친구가 하는 고물상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손을 씻었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는 거의 매일 나이트클럽에 들렀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나이트클럽에서 나온 그는 여자 궁둥이를 주무르며 모텔로 들어갔다. 나는 모텔 앞에서 담배를 연거푸 피워대며 졸음과 지루함을 견뎌냈다.

두 시간이 채 안 돼 여자가 모텔에서 나왔다. 여자는 모텔 앞에서 휴대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삼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웨이브 머리의 그 여자는 전화를 끊고 주변을 살피며 발을 구르고 있었다. 건너편 도로, 내 쪽으로 시선을 던지다가 문득 나를 보고는 눈을 떼지 않았다. 잠시 뒤 검은 승용차가 도착한 뒤에도 잠깐 내 쪽을 흘깃거렸지만 별다른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여자가 차에 오르자 차는 출발하기 시작했다. 나는 움직였다. 차가 도로로 나서려 할 때 재빨리 도로를 건너기 시작했고 차 앞을 가로막았다. 운전석 창문이 열렸다. 나는 창문 앞으로 다가섰다.

“뭐꼬!”

큰 두상에 넓적한 코를 가진 꽤나 인상 더럽게 생긴 남자가 소리쳤다.

“뭐 좀 조사할 게 있다.”

“문 헛소리고!”

“화대 조사 좀 해야겠다.”

“이 미친 새끼 봤나. 무슨 소리 지껄여. 화대라니. 존 말 할 때 꺼져라. 알았나.”

“신고 들어와 조사 중이다.”

“문 신고?”

남자가 그제야 긴장하는 빛을 보였다.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위폐가 돌고 있거든. 아마 여자가 받은 돈도 그럴걸.”

바로 여자가 받았던 돈을 압수해서 조사에 들어갔다. 빙고. 위폐가 맞았다. 나는 그 사실을 바로 그날 두상 큰 남자를 찾아가 그대로 일렀다.

“뭐요. 그게 참말입니꺼.”

“그러니까 그 새끼 다시 연락 오면 나한테 즉방으로 연락하라고.”

“그건 염려놓으세요. 단골이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씨발 새끼, 가만 놔두나 봐라. 어디 장난칠 게 없어서 이런 장난을 쳐. 그 새끼. 신성한 자본주의 근간을 흔든 놈 아닙니꺼. 불순한 새끼. 맞지요?”

“그런 건 모르겠고, 여튼 잘 붙들어 놓기나 해.”

“걱정 붙들어 놓으세요.”

그러면서 그는 분하다는 얼굴로 혼자 욕을 뱉었다. 진한 향내와 짬뽕 냄새가 뒤섞인 그의 사무실을 나왔다. 2층 계단을 내려오면서 이제는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뿐해졌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남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남자의 사무실에서 얼마 멀지 않은 모텔이었다. 모텔 3층에 있는 방문을 열어젖혔을 때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화장실을 가리켰다. 화장실로 들어가니 코가 깨진 정씨가 피투성이 코를 쥐어 잡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달랑 수건 하나로 성기를 가린 채 무릎 꿇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니 끔쩍 놀란 듯 고개를 푹 숙이고 바들바들 떨었다. 남자가 뒤따라 왔다.

“좆만 한 새끼. 운 좋은 줄 알아. 이만한 걸로 끝난 걸.”

나는 남자를 내보낸 뒤 쪼그려 앉았다.

“고개 들어.”

정씨가 눈치 보며 어렵게 나와 눈을 맞췄다.

“너, 조경갑이 알지?”

정씨가 멍청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니는 알지? 그 새끼 어쩌다 죽은지.”

“모릅니더.”

“모른다고?”

“예.”

“진짜?”

“예.”

나는 피식 웃었다. 그도 나를 따라 웃으려 했다.

“이 새끼가. 어디서 수작이야. 니 조경갑이 죽기 전에 만났잖아!”

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의 귓바퀴를 세게 쥐어틀었다. 그가 죽는다고 비명을 질러댔다. 그럴수록 나는 더 세게 비틀었다.

“뭐든 얘기하란 말이다! 조경갑이하고 관계된 건 뭐든!”

정씨의 귓바퀴를 움켜쥔 채 나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가 무력하게 딸려 올라왔다. 그가 내 명치 근처에 머리를 비볐을 때 물이 반쯤 찬 욕조 쪽으로 그를 밀어버렸다. 그가 욕조에 무릎을 부딪치며 바닥에 자빠졌다.

“뭐라도 생각나면 얘기해라.”

나는 그 말을 던지고 변기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바지 지퍼를 열었다. 변기에 소변을 시끄럽게 쏟아냈다. 거품 낀 노란 오줌이 부글거렸다.

“운반만 해서 그쪽으로 아는 것도 없습니다. 그냥 건이 들어오면 하는 거라서.”

“그러니까 니한테 일주는 새끼 대라고.”

“그게.”

나는 그의 머리칼을 꽉 움켜잡으며 중얼거렸다.

“오줌 맛 좀 볼래?”

그를 변기 쪽으로 끌고 갔다. 사색이 된 그가 소리쳤다.

“이 일하고는 관계없스요!”

“문 소리야?”

그를 놓으며 물었다.

“한날 술자리를 했는데, 술김에 말하더라꼬요.”

“뭘?”

“여자 하나 잘못 건드렸다가 죽었다꼬.”

나는 그 쪽으로 몸을 숙였다.

“자세히 얘기해 봐.”

“거의 먹을라 캤는데, 여자가 팔을 깨물고 도망가더랍니다. 그카다가 여자가 도로로 뛰어들었는데, 그만 차에.”

“그래서?”

그가 멀뚱히 나를 보았다.

“그래서!”

“그…… 그래서 놀라 그냥 도망쳤다고.”

“그라고?”

“암만 생각해도 그 여자하고 아는 사람 짓 같은데예.”

나는 머리가 복잡했다. 그가 주저하듯 말을 이었다.

“근데 경갑이를 죽인 놈이 누군지는 몰라도 또 나타날 겁니다.”

“뭐라?”

“그날 경갑이 혼자 그런 게 아니고 경갑이 고등학교 동창도 있었다고 했거든요. 경갑이를 죽였으니 아마 그 동창도 죽이려 할지도……”

“그 동창이 누구야!”

“나도 아는 놈인데요, 요 근처 PC방에서 아르바이트 하는데요.”

나는 일어서서 세면대에 기댔다.

“꼼수부리는 거 아니지?”

“예?”

“지어낸 얘기 아니냐고!”

“아닙니더. 그런 거. 절대로. 위폐 운반 일은 아무 문제없이 잘 돌아갔거든요.”
다음 날 오전 중에 조경갑의 동창이 일한다는 PC방 앞에 서 있었다. PC방은 왕래가 많은 사거리 5층 건물 지하에 위치해 있었다. 그는 야간 근무를 했다. PC방에서 일을 마치고 나올 시간은 이미 지나 있었다. PC방에서 늦장을 부리는 것 같았다.

나와 후배는 길 건너 주유소 앞에서 PC방 입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기를 삼십여 분. 드디어 누군가 PC방에서 나왔다. 인상착의를 봤을 때 어젯밤 정씨가 얘기해 준 놈과 비슷했다. 짧은 스포츠형 머리였다. 170센티미터 정도 되는 신장에 덩치가 있는 놈이었다. 웃음기를 머문 크고 희멀건 얼굴은 대체로 인상 좋게 보였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편의점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주변을 별로 살피지 않고 걷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눈에 띄는 여자가 지나가면 걸음을 멈춘 채 뒤돌아보면서까지 여자의 뒤태를 살폈다. 역시나 혼잣말을 뱉으며 웃었다. 다시 걸음을 옮겨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계산을 치르고 나서 담배를 뜯으며 편의점을 나왔다. 그때서야 주위를 한 번 휙 둘러보고는 다시 PC방 쪽으로 걸어왔다. PC방 옆 골목으로 향하면서 자취를 감췄다.

다급해진 내가 길을 건너 골목 앞에 닿았을 때 낡은 소나타 한 대가 나타났다. 차는 나와 후배 옆을 유유히 지나갔는데 그가 운전하고 있었다. 불이 타들어가는 담배를 입에 물고. 차는 좌회전을 하면서 사거리 쪽으로 서행하고 있었다. 나는 수첩에 차 번호를 적었다.

그런 뒤 나와 후배는 차로 돌아왔다. 차로 그를 미행했지만 그날 별다른 일은 없었다. 그는 집 가까이 차를 세워두고 찜질방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오후 한나절을 보냈다. 늦은 오후 친구들을 만나 가볍게 술을 마신 뒤 다시 PC방으로 돌아왔다. 차 번호를 통해 인적사항을 조회해 보았다. 이름 김창식. 전과는 없었다.

첫 미행과 같은 일정이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반복되었다. 그리고 금요일, 비로소 나와 후배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김창식이 PC방으로 들어가기 전, 야구 모자를 눌러 쓴 어떤 남자가 먼저 건물로 들어간 것이다. 김창식이 또래였다. 그런데 남자는 여러 번 그냥 엘리베이터를 올려 보냈다. 나는 주의 깊게 건물 맞은편 주유소에서 남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김창식이 소나타를 몰고 출근시간에 맞춰 나타났다. 소나타가 건물 앞을 지나갔다. 차를 본 남자가 재빨리 비상계단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주차를 마친 김창식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더니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김창식의 모습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그때 비상계단에서 남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청재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 상태로 그는 지하로 내려갔다.

우리는 찻길을 건너 지하로 들어섰다. 계단에서는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PC방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김창식은 보이지 않았다.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직원이 물었다.

“뭐 하실 건데요?”

“잠깐만.”

내부를 죽 살폈다.

“아는 사람이 있어서.”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 옆을 지나쳤다. 후배는 출입구 곁에 서 있었다. 나는 구석자리에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야구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인터넷 창만 보면서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시 카운터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김창식이 화장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나는 남자 뒤를 지나쳐 김창식의 앞에 섰다.

“인터넷 할 건데.”

야구 모자가 잘 보이는 곳에 나와 후배는 거리를 두고 자리를 잡았다. 나는 다만 남자를 살피고 있었다.

남자는 청재킷 안에 흉기를 숨기고 있을 것이다. 흉기는 김창식을 위한 것일 테지. 마우스를 탁탁 두드리다가 이런 의문이 들었다. 죽은 여자와는 어떤 관계일까. 애인 아님 가족.

남자는 한 시간 가까이 인터넷을 한 뒤 일어섰다. 그러면서 후배 쪽을 흘깃 보았다. 후배가 고개를 들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후배를 이상스레 바라보는 그의 눈길이 맘에 걸렸다. 남자가 카운터 쪽으로 다가갔다. 내가 그쪽을 보았다. 후배가 일어서려는 걸, 잽싸게 다가가 자리에 다시 앉혔다.

그때 김창식 앞에 남자가 섰다. 그런데 남자를 보던 김창식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짧은 순간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후배도 그걸 봤는지 다시 일어나려 했다. 나는 후배의 어깨를 누르면서 속삭였다.

“나 혼자 갈게.”

“하지만.”

위험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든 모양이다.

“염려 마. 무슨 일이 터지면 곧장 연락할 테니.”

우리가 동시에 남자를 미행한다면 남자에게 들킬 위험이 다분히 컸다.

“걱정 마.”

나는 후배의 어깨를 툭 쳤다. 김창식은 직원 뒤로 약간 물러나 있었다. 직원이 의아한 얼굴로 김창식을 보았지만 군말 없이 대신 요금을 받았다. 계산을 마친 남자는 문을 열고 나갔다. 내가 계산을 치를 때까지 김창식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김창식 역시 그 남자를 아는 것 같았다. 그건 나중에 조사하기로 하고 우선 남자 뒤를 밟아보기로 했다.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들어선 남자는 전동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동차가 도착했고 남자와 같은 칸에 올랐다. 밤 9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고 승객들은 많지 않았다. 남자는 야구 모자를 올린 채 골똘히 뭔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는 대각선 방향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자의 얼굴이 낯설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역을 몇 차례 지나쳤지만 그는 일어서지 않았다.

어디서 봤을까 하는 걸 알아내려 머리를 짜내면서 숙였던 고개를 문득 쳐들었다. 남자가 없었다. 남자는 정차한 전동차 밖, 승강장을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출입문이 닫히기 전 재빨리 전동차에서 내렸다.

남자는 지금 승강장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잠시 뒤, 개찰구를 빠져나가 2번 출입구 계단으로 향했다. 나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뒤를 밟았다. 남자가 흘깃 뒤돌아보았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태연한 척했다. 남자가 다시 시선을 돌렸고 곧이어 역을 빠져나갔다. 내가 역을 나왔을 때 남자의 모습은 눈 깜짝할 새에 온 데 간 데 없었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데 남자가 근처 약국에서 나왔다. 약 봉지를 들고 천천히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남자는 다시 뒤돌아보았다. 왠지 들켰을 거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내 직감은 맞았다. 남자가 걸음을 빨리 놀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대로 놓치면 끝이란 생각에 나도 서둘렀다. 그는 건너편 도로를 잰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내 쪽을 힐끔거리면서. 도로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같은 방향으로 걸었다. 그런데 남자는 직진을 하는 척하다, 우측으로 난 골목으로 방향을 틀어버렸다. 그러면서 내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들킨 마당에 얌전떨고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차를 피해 도로를 건넜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남자는 종종걸음 쳤다. 아무래도 약국 안에서 나를 지켜본 것이리라.

남자는 지금 대형 불상이 내려다보는 쪽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건물만 달랑 있는 불교 대학이었다. 불빛 때문에 대낮 같은 대학 앞에는 주차된 차들로 붐볐다. 남자는 차들을 피해 왼쪽 골목으로 휙 사라졌다. 내가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 남자가 저 앞에서 황급히 뛰어가고 있었다. 모텔이 죽 들어선 골목이었다. 조용한 골목은 우리의 발자국 소리와 숨소리로 채워졌다. 남자는 여러 번 어지럽게 뚫려 있는 좁은 골목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다.

그를 쫓아 어느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 더 이상 길이 없었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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