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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왔네.”
슬기가 현관문을 비뚜름하게 연 채 말했다. 사선으로 잘린 슬기의 얼굴은 비스듬하게 썬 수박 속처럼 붉었다. 전날 과음을 했나. 많은 상상을 하게 만드는 얼굴이다. 학생 때 슬기의 얼굴은 말하는 바가 명확했다. 하지만 지금 슬기의 얼굴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슬기의 갈색 눈, 낮은 콧대, 아무렇게나 잘라낸 회 두 점 같은 납작한 입술. 그들이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었다. 두려움에 현관문을 활짝 열어버린다. 문에 기대고 서 있던 슬기가 중심을 잃고 비틀댄다.
“들어간다.”
대답도 듣지 않고 신발을 벗는다. 현관문이 닫힌다. 도어락의 자동잠금장치가 돌아가는 소리가 말한다. 더 이상 이 문을 열기 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고.
“술 마셨어?”
그렇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공고히 하듯 목소리를 높인다. 내가 묻자 슬기는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엄지와 검지를 붙여 자그마한 원을 만들어 보였다. 그리곤 웃음을 터뜨리며 현관과 이어져 있는 거실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들어가 맥주 두 캔을 가지고 돌아왔다. 나는 내 눈앞에 건네진 맥주를 받을 생각은 안 하고 노려보기만 했다. 그러자 슬기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방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원 모양의 탁자 앞에 풀썩 주저앉았다. 칙, 공기가 빠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터지는 소리가 시원하게 울린다.
“앉아서 얘기하자. 일단 마셔, 목 탈 텐데.”
“네가 언제부터 나한테 그렇게 친절했다고?”
“마셔. 그게 도움이 될 거야.”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슬기가 덧붙인다. 나는 슬기를 내려다보다가 어쩔 수 없이 슬기 앞에 앉았다. 내 몫의 맥주를 잡아당겨 앞으로 끌고 온다. 얼음처럼 차가운 캔에 송골송골 맺혀 있는 물방울들이 어떤 섬뜩함을 전한다. 심장이 뛴다. 그것을 제지하기 위해 싸한 알코올로 목을 적신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바로 그 얘기로 들어가는 거야?”
“그럼 내가 너랑 얼굴 맞대고 정답게 회포라도 풀어야 하겠니?”
“많이 컸네, 이바다.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장난 같지도 않은 말 떠벌릴 거면 나 간다.”
“기다려 봐. 그렇게 쉽게 할 얘기 아니니까. 말했잖아, 중요할 수도 있는 얘기라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도 말했지.”
슬기는 말을 잃은 듯 묵묵히 맥주를 마셨다. 나도 맥주를 마셨다. 맥주가 도움이 될 거라던 슬기의 말은 사실이었다. 에어컨은 고사하고 선풍기조차도 틀어놓지 않은 방 안은 사우나나 다름없었다. 우리는 뻘뻘 땀을 흘리며 한참이나 말없이 맥주를 마셨다. 나는 어쩐지 이 시간이 다정하다고 느꼈는데, 학창 때 나를 괴롭힌 아이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으면서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런 의무도 없고 기약도 없이 같은 동작을 반복하게 되면 인간은 안정을 느끼는 걸까? 그렇다면 죽은 아저씨의 몸을 도끼로 후려 팼던 그 시간은, 모든 것을 얼싸 안는 침묵으로 가득했던 그때는 왜 그토록 심장이 아팠던 걸까. 자문하는 사이 슬기가 캔을 내려놓았다. 나도 따라서 캔을 내려놓았다. 아니, 나는 캔을 떨어뜨렸다.
“너, 사람 죽인 적 있지?”
슬기가 말했다. 슬기가 말했는데, 말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 할 만큼 나는 정신이 멍했다.
“그럼 한 명만 더 죽여주라.”
슬기가 그 갈색 눈에 아릿한 살의를 품고 말했다.
“이우진. 그 새끼를 네가 죽여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