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섬 스트라이크! 볼링 게임

  • 장르: 추리/스릴러 | 태그: #이대환 #추리단편 #추리스릴러단편선 #보물섬스트라이크 #볼링게임
  • 평점×10 | 분량: 139매
  • 소개: 스타 추리 작가 감광준의 개인 섬에 초대받은 추리 마니아들. 감광준의 보물을 상품으로 벌어진 추리 게임, 그러나 게임은 사람의 목숨마저 앗아가는데. 더보기

보물섬 스트라이크! 볼링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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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섬

제주도 근처의 어느 무인도. 섬을 둘러싼 절벽으로 야트막한 파도가 계속 몰려와 부서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안경을 낀 당신이 ‘고려청자’, 턱수염 아저씨는 ‘비취불상’, 저 어리바리한 학생이 ‘조선백자’. 그리고 방금 화장실에 들어간 게 ‘은노리개’라는 거유?”

모두가 한눈에 보이는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일일이 호명한 사람은 정작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있었다. 대신 그의 옷자락 끝에 달린 이름표에는 ‘금불상’이라고 적혀 있었다.

“당신은 ‘금불상’으로 부르면 되겠군.”

비취불상이 말했다.

“쳇! 그러든가 말든가. 아무리 가명이라지만 좀 지랄 맞잖아. 부르기도 어렵고.”

“그렇지만 어, 어떡하겠어요? 다들 오자마자 식탁 위에서 하나씩 집어든 모양인데 전 늦게 올라오는 바람에 뭘 집었는지도 지금에서야 아, 알았는걸요.”

조선백자는 아직까지 낯선 환경에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고 보니 잘 보이는 거실 쪽 테이블을 놔두고 부엌 식탁 위에 이름표를 숨겨 놓은 건 무슨 장난질이람?”

은노리개가 화장실에서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살살 비비며 나왔다. 짧은 반바지 차림에 허벅지가 다 드러났다.

“거 아무리 비위 좋은 세상이라지만 좀 적당히 하지. 참는 데도 한계가 있으니까 말이야.”

“흥! 제 까짓게 뭐라고.”

은노리개는 금불상이 못 본 사이에 입을 비죽거렸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한 데 모인 지 네 시간이 지났다. 두 시간은 바다 위에서 보냈고, 두 시간 중 한 시간 삼십 분은 배를 타기 전 뭍에서 대기하면서 보냈고, 나머지 삼십 분은 이 섬에서다. 호칭과 얼굴을 파악하느라 작은 눈을 쉬지 않고 끔벅이던 고려청자가 드디어 굵은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조심스레 첫 마디를 꺼냈다.

“저, 초면에 조금 이상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지나친 신중함에 사람들은 조금 짜증을 부렸다.

“고려청자 님, 무슨 말인데 그렇게 뜸을 들입니까?”

“아, 어서 해봐요.”

“이게 원체 비밀스런 이야기라서. 에…… 그럼 하겠습니다. 여기 오신 분들은 모두 51p의 암호문을 해결하셨습니까?”

“……난 또 무슨 얘기라고. 그 암호문 외에 여기 오는 방법이 또 있던가요?”

“아, 그게 저로선 알 방법이 없습니다만. 그 암호문을 해결한 사람이 저 말고도 네 분이나 더 계실 줄은 생각도 못 했거든요.”

“하하, 대한민국 추리마니아들 실력을 너무 얕보시는군.”

“그럼 어떻게들 푸셨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그 정도라면 당장에라도 해드릴 수 있지.”

자신 있게 나선 금불상 주위로 사람들이 모이고, 부탁을 한 고려청자는 이내 손깍지를 끼며 지켜보았다. 지켜보던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의 풀이방법과 비교하려는 듯 손바닥 글씨를 써가며 기억을 떠올렸다.

몰두해 있는 사람들 위로 보이는 섬의 지도. 지도에 따르면 일명 보물섬이라고 불리는 이 섬은 무인도이며, 가로 1.7킬로미터, 세로 4킬로미터로 남북으로 길게 뻗어 해변으로는 두 개의 길 외엔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둘러싸인 섬이었다. 섬 한가운데에 일제시대 고사포 진지였다는 별장이 있고, 별장 남북으로 정원이라 하기엔 좀 민망한 공터가 짧게 펼쳐지고, 그 뒤로는 잡목림이 펼쳐져 있었다.

별장은 단층 건물로 섬모양을 따라 남북으로 긴 직사각형모양에 한가운데 위치한 거실과 그 거실 주위로 방 6개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남, 북쪽으로 현관문이 하나씩 있었다. 또 거실 한복판 바닥문 아래 지하실이 있었고, 거기에는 특이하게도 잔디깎이, 전지가위, 삽, 곡괭이 등 나무가꾸기에 필요한 물건들은 거의 다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괴팍하기로 유명한 추리소설가의 별장 치고는 흥행성이 낮았다. 다행이도 암호풀이 증명이 끝난 후에 다른 재밋거리를 찾던 이들을 만족시켜 준 것은 다섯 번째 방, 감광준의 서재였다.

시중에선 절판된 그의 초기 작품부터 최근작 『조선식 가옥 살인 사건』까지 모든 책들이 망라되어 있었고, 전설적인 추리 계간지 《괴인》의 창간호도 있었다. 그 무엇보다 사람들이 놀랐던 건 감광준의 초상화였다. 추상기법으로 그린 초상화는 얼굴이 조각조각 나뉘어져 뒤틀려 있었다.

“진짜 볼썽사나운 그림이네요. 어쩌면 저 모습이 진짜 감광준일지 모르죠. 책에 실린 프로필 사진 따위는 이미 예전부터 가짜라는 소문이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파다했었잖아요. 여기서도 진짜 감광준의 얼굴을 본 사람은 아마 없지 않아요?”

은노리개는 볼을 씰룩거리면서 감광준의 초상화를 응시했다.

“최근에 두 번째 결혼 실패 같은 개인적으로 불행한 일도 있었지만, 젊은 시절 여러 번의 자살 시도라든지, 몇 년도인가엔 당시 화제였던 무슨 사건에 수사자문의원으로서 용의자를 잘못 지목해 수억 원대의 소송을 당했다든지…… 뭐, 원체 둘러싼 악질적인 루머들이 많으니까요. 진짜 모습은 오히려 아무도 모르고 있는 작가죠.”

“쳇! 고려청자, 그렇게 감쌀 필요는 없지 않아? 억울하기는, 그런 게 다 유명세인 거라고. 또 아니 땐 굴뚝에 연기만 날 리도 없는 것이고. 그나저나 그놈의 괴팍한 면상을 이 눈으로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금불상이 투덜거리는 한편, 조선백자는 감광준의 물건을 감정하듯이 다루고 있었다. 진지하게 두드려보고, 불에도 비춰보고, 냄새도 맡고 있었다. 은노리개는 그런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이 봤다. 아랑곳하지 않고 상패 앞에 놓여 있던 볼링 핀을 잡아들은 조선백자는 묵직한 느낌이 마음에 들었는지 눈을 감고 무게를 가늠했다. 그러자 고려청자가 다가와 말했다.

“무게는 약1.2∼1.6킬로그램, 재질은 플라스틱 같군요. 보통은 단풍나무에 플라스틱을 코팅하는데…….”

“감광준 작가는 볼링도 곧 잘 쳤다고 어느 잡지 기사에서 본 것도 같은데 이 상패들을 보니까 대학시절 같지만 대회에서 수상도 여러 번 했어요.”

“아직 모르셨군. 그 인간 볼링이라면 죽고 못 사는 대단한 볼링광이라고. 나처럼 사업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래도 골프가 최고지만. 아무튼 감광준은 익명으로 프로볼러 테스트를 받았을 정도로 굉장한 실력도 가지고 있었지. 에에, 잠깐! 은노리개, 그런 걸 맘대로 휘두르면 위험하다고!”

어디서 찾아냈는지 번쩍거리는 볼링공 구멍에 손가락을 엉성하게 끼우고 겁 없이 휘두르는 은노리개 때문에 사람들은 벽에 바짝 붙을 수밖에 없었다. 붕붕 공기를 가르는 볼링공은 위태롭게 보여도 용케 손에 잘 붙어 있었다.

“추리작가와 볼링이라니 너무나 괴팍한 조합이지 않아요? 이따위 공놀이가 뭐 재미있다고 말인지. 근데 저…… 좀 비슷하게 폼이 나오는 거 같아요?”

다행스럽게도 은노리개의 볼링공 장난이 활력을 잃어가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았다.

“휴우― 떠벌이에 히스테리 환자까지 참 개성 넘치는 분들이네요.”

비취불상이 옆에 있던 고려청자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오히려 여기까지 오기 힘들었을 테죠.”

“고려청자 님, 그런 의미에서라면 우리 모두 정상은 아니겠군요. 하하.”

“음…… 글쎄요. 이걸 보면 다들 어떻게 반응하실지…….”

고려청자의 시선 끝에는 가로로 겹겹이 놓인 진열장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권수가 어림잡아 몇 백 권은 됨직한 ‘OO사’의 세계추리소설 전집이 있었다. 여기까지라면야 특이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겠지만 비취불상은 눈을 부릅뜨고 진열장 유리에 다가갔다. 그러자 보이기 시작했다. 규칙의 의도적인 어긋남이 만들어낸 우연적인 패턴들이! 그곳엔 거꾸로 꽂혀 있는 책등의 글자 위치와 길이, 기타 약호들이 제대로 꽂힌 책들의 그것과 어울려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하학적인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호오― 클루!”

누군가 외쳤다.

“감광준은 예술적 재능도 타고난 게 틀림없어! 이 무늬 너무 아름답지 않아요?”

“이게 바로 외딴 섬에서 맞게 되는 광인 작가로부터의 첫 메시지란 말인가? 정말 꼭 소설 속의 장면 같군요.”

이어서 고려청자는 진열장을 열었다. 정교하게 맞춰진 고급 진열장 문이 삐걱하며 열리자 메케한 먼지들까지 함께 쏟아져 나왔다. 기침을 하는 와중에도 책을 살펴보던 비취불상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근데 이 뒤집혀진 책들 간에는 일정한 공통점도 없는 것 같고, 어떤 식으로 풀어봐야 할지 난감한데……. 어떻게 생각들 하세요?”

“제대로 꽂혀진 책과 거꾸로 꽂힌 책, 이 두 가지라면 혹시 이진법 숫자를 나타낸 건 아닐까?”

“500자리가 넘는 이진수? 금불상 님, 그건 좀 너무하지 않아요?”

“그것보다는 이 연결된 책등의 무늬를 조사해 보는 건 어때요?”

“에이, 그것들 좀 이리 줘 봐요!”

성질 급한 은노리개는 거꾸로 꽂혀 있던 책 중 한 권을 건네받았다. 제일 먼저 책 겉표지를 벗기고 요리조리 살폈다. 그러다가는 책을 내려놓고 다른 책도 똑같이 요리조리 살폈다. 그 다음에는 진열장 문에 붙어 있는 긴 도서목록 표를 손가락으로 몇 번이나 그어가면서 보더니 한 곳에서 손가락을 멈추고 그곳을 톡톡 두들겼다.

“누가 431번 책 좀 찾아봐 줘요.”

“은노리개 님, 이거 같은데요. 이 책은 왜?”

“잠깐만 좀 있어 봐요.”

은노리개는 책을 펼쳐 거꾸로 들고 털어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뭐 하는 거야? 금방이라도 뭔가 보여줄 거처럼 해 놓고선.”

금불상의 이 말이 은노리개의 화를 돋웠는지 이번엔 다분히 신경질적으로 책을 몇 페이지씩 꼼꼼히 넘겨보기 시작했다.

“아, 사람 피곤하게 정말.”

은노리개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431번 책 속, 은밀하게 만들어진 공간에서 작은 테이프 하나가 나왔다. 은노리개는 귀찮은 일을 해치워버린 것처럼 활짝 웃었다. 떨어진 테이프는 조선백자가 주웠다.

“어떻게 한 거야? 마술인가요?”

테이프를 든 조선백자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은노리개 씨, 정말 대단한데?”

고려청자의 칭찬에 은노리개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게 아니라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에요. 너무 그렇게들 보지 마세요.”

“그래도 완전 마술 같았다니까요. 어떻게 한 건데요?”

“별 거 아니에요. 책 겉표지가 거꾸로 씌워진 책들이 눈길을 끌었던 거라서 겉표지를 벗겨서 보니까 그 책들, 그러니까 겉표지 안쪽의 본책들은 겉표지처럼 거꾸로 되어 있지 않더라고요. 이상하죠? 즉, 책 자체가 거꾸로 꽂힌 게 아니라 그저 겉과 속이 달랐던 거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너는 거꾸로 꽂혀진 책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책을 꺼내들고 테이프까지 찾아낸 거야?”

팔짱을 낀 금불상은 못미덥다는 표정으로 약간 따지듯이 물었다.

“간단해요. 이 500권 가까이 되는 세계추리소설 전집이 진열된 진열장들 속에서 ‘겉과 속이 다르다’라는 게 무얼 의미하겠어요. 이 OO세계추리전집과 관련해서 나왔던 몇 가지 논란들이 한 몫을 했죠. 지나치게 추리의 외연을 확장해 추리로 보기 힘든 작품들도 유명 추리작품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걸로 한창 말들이 많았잖아요. 그때 거론됐던 책들 두세 권 정도는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 중에서 난 내 취향대로 제일 추리소설답지 않은 추리소설 한 권을 골라봤을 뿐이죠. 다행히도 내 취향과 감광준 씨의 취향이 통했던 거라고 해야 할까요.”

“말대로 완전 ‘우연’이 작용했군. 제길, 난 운도 없으니.”

테이프는 크기가 작은 녹음용 마이크로테이프였다. 조선백자가 감광준 책상 위에 있던 녹음기에 끼워 틀어보니 심한 잡음과 함께 감광준의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치직) 『조선식 가옥 살인 사건』의 암호문을 풀어내고 여기 이 보물섬까지 오신 여러분들을 환영한다. 아, 이 테이프를 찾아낸 사람에게는 비슷한 취향을 가진 추리 독자로서 먼저 반가움을 표시해야겠군. 여러분은 앞으로 사흘 동안 이곳에서 꼼짝도 할 수 없다. 물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왔기 때문에 밖에서도 당신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 수 없을 테지. 핸드폰 지참을 금했지만 혹시 가져왔다 하더라도 전파차단 장치 때문에 작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사흘 동안 이곳에서 무엇을 하느냐, ……게임을 하는 것이다. ‘보물찾기’ 게임. 이 섬에는 실제 사건을 토대로 씌어진 내 최신작 『조선식 가옥 살인 사건』에 등장하는 보물과 유사한 진품 보물들이 숨겨져 있다. 당신들이 이 별장에 도착해 하나씩 주워든 이름표에 적혀 있는 보물들 말이야. 이 보물을 찾는 사람에게는 그 보물을 조건 없이 양도해주겠다. 설마 자신의 추리력을 시험해 보겠다든지 하는 고상한 이유 때문에 이 게임에 참가한 것은 아니겠지? 솔직히 모두 암호문 속 보물 얘기 때문에 일확천금을 노리고 온 사람들이니만큼 원하는 것을 꼭 얻어가길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 섬 모처에 숨어 당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것이다. 나를 찾아낼 생각일랑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시간낭비일 뿐더러 찾지도 못할 테니. 크흐흐흐. 이 집 안과 섬 곳곳에 숨겨져 있는 힌트를 찾아내 보물도 찾고 나의 무료함도 덜어주기를 바란다. 단, 3일이 지나면 내 법정 대리인들의 방문에 의해 게임은 자동 종료될 것이다. 게임의 시작 시간은 내일 아침 9:00부터이며 종료 시간은 3일 후인 아침 9:00다. 그리고, 에……(치직) 또……(치직)”

여러 번 녹음을 반복했던 탓인지 음질이 좋지 않아 마지막 부분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정적. 하지만 보물, 일확천금 같은 말들만으로도 사람들의 얼굴은 이미 충분히 상기되어 있었다. 이에 생각에 잠겨 두리번거리던 고려청자가 가슴 벅찬 얼굴로 말했다.

“우리 한 번 해봅시다! 어떻게 돼도 우리가 손해 볼 일은 없는 거니까!”

숨겨진 메시지

사람들은 다음날 아침까지 모두 단 잠을 잤다. 각자의 방에 들어간 이후, 정말 세상 모르게 잠든 나머지 9시 전에 일어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조선백자가 9시 10분경에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제일 먼저 일어났다.

몸이 원체 약한 편인 조선백자는 지난 밤 낯선 잠자리에 밤새 뒤척이다가 나중엔 천장이 뱅글뱅글 돌 정도로 속이 미식거렸다. 일어나 거실에 나왔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아 우왕좌왕하다가 겨우 자기가 할 일을 하나 생각해 냈다. 그건 동쪽 해안가에 있는, 자신들이 타고 왔던 보트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바깥세상과의 유일한 교통수단이기 때문에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씨도 아니었고, 보트가 없어질 이유 따윈 전혀 없었지만 자기도 모르게 비틀거리며 보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또한 감광준이 말했던 ‘3일 동안 꼼짝도 할 수 없다.’는 말이 왠지 그의 가슴엔 깊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보트가 없어졌다는 겁니까?”

비취불상은 놀라 수저를 내려놓고 입에는 밥 한 덩이를 그대로 담은 채 물었다. 문가에 서 있는 조선백자는 자신이 배를 잃어버리기라도 한 듯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럼 아침부터 지금까지 배를 찾아다닌 건가요?”

“우린 무슨 사고라도 난 줄 알았다고. 뭐, 그 편이 더 재밌기는 할 테지만. 혹시 엉뚱한 데 가서 찾다 온 건 아니겠지?”

“우리가 배에서 내린 데는 계단으로 내려가서 바로 보이는 곳이었잖아요. 어떻게 그런 장소를 헷갈리겠어요? 게다가 바다 쪽으로 배가 출입하기 딱 좋게 만든 것처럼 경사면이 있었던 걸 똑똑히 기억한다고요. 떠내려 갔을까봐 절벽을 따라서 동쪽 해안가를 샅샅이 찾아봤어요. 밧줄 매듭까지 없는 걸로 봐선 배에서 내릴 때 묶어두었던 게 좀 느슨했던 거 같기도 한데…….”

조선백자가 애써 딴 곳을 보며 얘기를 꺼냈다.

“지금, 날 보고 하는 소리지? 두어 번 확인까지 한 걸 봤잖아. 괜히 생사람 잡지 마!”

은노리개의 까칠한 말이 듣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그럼 무슨 일본군의 유령이라도 나타나서 훔쳐갔다는 말이야?”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금불상 님. 일본군의 유령이라뇨?”

“유명한 얘기잖소. 2차 대전 말엽, 연합군으로부터 일본 본토 진입을 저지하기 위한 방어선 중 하나였던 제주도에 일본군들이 비밀 활주로며, 땅굴, 비밀 기지 같은 걸 건설했다는 얘기. 하지만 정작 싸워보지도 못 하고 패전해 버리자 억울함에 목숨을 끊은 군인이 한둘이 아니었다지. 제주도에서 가까운 이 섬에도 무슨 해군 특수 부대인가가 주둔했었다고……. 이 별장 거실자리엔 고사포가 있었다지?”

이에 다리를 계속 주무르던 고려청자가 기어코 말을 꺼냈다.

“거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하고 정신들 좀 차리세요, 모두 지쳤다고요. 우리한테는 지금 휴식이 필요해요.”

넓은 식탁에 아무렇게나 퍼져 앉아 늦은 점심을 먹고 있는 이들은 조선백자가 밖으로 나간 이후 속속 일어나 한나절이 지나도록 별장 내부와 주변 곳곳을 뒤졌다. 하지만 보물을 찾을 수 있는 티끌만 한 단서도 찾아내지 못했다. 이렇게 머릿속에서 신비한 안개가 걷혀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때마침 배가 없어졌다는 소식은 큰 불안감을 더해 주었다.

하지만 금불상만은 이 상황에서 비껴 있는 사람처럼 혼자 키득거렸다.

“이 상황이 그렇게 재밌습니까?”

난처한 표정의 고려청자가 힐난하듯이 물었다.

“여기에 온 사람들이라면 이런 상황에 대해 굉장히 반길 줄 알았는데 모두 하나같이 얼어붙은 얼굴이라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지요. 다들 그런 표정하지 말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이 상황을 제대로 즐겨보자고. 그깟 고깃배 따위가 없으면 어때? 3일 후면 가고 싶지 않아도 이 섬에서 나가게 될 텐데. 실은 내 개인 변호사를 통해 모종의 조치를 취해 두었거든.”

“그럼, 안…… 안심해도 되는 겁니까? 하지만 그건 규칙 위반 아닙니까? 분명 초대장엔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혼자서 오라고 했을 텐데.”

고려청자는 약간 놀란 듯 말했다.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한테 무슨 일이 생겼을 때에만 유언장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해놨으니.”

“와아― 아저씨, 꽤 대단한 사람인가봐? 개인 변호사에 유언장까지……. 좋아! 아저씨 말 한 번 믿어보겠어. 그런데 우리가 하루 종일 킁킁거리면서 돌아다닐 때 혼자서 뭘 한 거야? 뭐 찾아낸 거라도 있어요?”

금불상의 유언장 덕분에 보트 건으로부터 마음이 가벼워진 은노리개가 얼굴색을 되찾고 금불상에게 들러붙었다.

“이거 징그럽게 왜 이래?”

금불상의 옷깃을 쥐고 얼굴을 요염하게 들이대던 은노리개는 금불상이 어물쩍거리고 있는 사이에 들고 있던 책을 홱 낚아챘다.

“오오― 보물을 혼자 차지하려고? 그렇게는 안 돼지.”

“뭐예요? 책에 뭐라도 있습니까?”

“에이, 이건 아까 그 책이잖아요? 추리문학 전집, 431번. 아, 그 작가 이름이…….”

사람들이 웅성거리면서 은노리개 쪽으로 몰려갔다. 그러자 금불상이 ‘하핫!’ 짧게 웃음소리를 냈다.

“그런 게 아니라고. 이 멍청이들아!”

붉으락푸르락 해진 얼굴에 묘하게 미소를 띤 금불상의 손에 아까의 마이크로테이프가 들려 있었다. 그는 보란 듯이 테이프를 모두 플라스틱 카세트 밖으로 끄집어냈다. 밤색 마그네틱테이프들이 그의 손과 팔뚝에 지저분하게 늘어지고 엉켜갔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테이프의 색깔이 바뀌기 시작했다. 하얀색 테이프가 쏟아져 나오자 사람들의 탄성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렇게 감광준의 깨알 같은 글씨가 적힌 하얀 테이프가 사람들 눈에 확인되고, 금불상은 하얀 테이프 부분만을 끊어 읽기 시작했다.

“용케도 찾아냈군. 내 무언(無言)의 메시지를 훌륭하게 읽어낸 당신은 칭찬을 받을 자격이 있다. 아래 이어진 메시지에 바로 당신이 원하는 것이 있다. 어서 빨리 찾아내어 기쁨을 누리도록.”

금불상은 여기까지 읽고 잠시 숨을 고르며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는 시선들을 즐겼다. 그 여유부리는 듯한 행동에 사람들은 속이 탈 지경이었지만.

“무언의 메시지라뇨? 무슨 얘기를 하는 거죠?”

잠자코 있던 비취불상이 자신의 발견에 대해 한 마디 하고 싶어 하는 금불상에게 졌다는 듯이 물었다. 하지만 금불상이 멋쩍게 대답을 하기도 전에 조선백자가 끼어들었다.

“그건 아마…… 아까 재생했을 때 뒷부분 메시지가 잡음과 섞이면서 끊어졌잖아요. 그 부분을 얘기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뭔가 할 말이 더 남아 있다는 느낌이었죠. 하지만 테이프는 더 돌아가도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으니 하려던 말을 어떤 식으로든 감춰놨을 거라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제 생각일 뿐이지만.”

조선백자는 뒷목을 긁적긁적거리면서 자신 없게 말했다. 듣고 있던 사람들은 이제야 알았다는 표정으로 저마다 무릎을 치고 말았다. 비취불상이 한숨을 크게 쉬더니 다른 사람들 눈을 일일이 마주친 후에 말했다.

“그럼, 금불상 씨. 테이프에서 말한 ‘원하는 것’…… 이게 만약 그 보물이라면…….”

뒷말을 잇기도 전에 금불상이 손사래를 치며 말을 꺼냈다.

“아,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닙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전 돈 때문에 이 섬에 온 게 아닙니다. 그 점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두 나눠 갖는 게 마땅한 겁니다. 전 대신 다른 걱정거리가 생겼답니다. 만약 이대로 보물이 발견된다면 너무 실망스럽지 않겠어요? 평생 악몽처럼 남을 겁니다. 설마 이대로 사흘 예정의 게임이 끝나버리는 건 아니냐 이겁니다. 제 관심사라는 건.”

금불상은 헝클어진 테이프 뭉치 속에서 남겨진 메시지 대목을 찾아 손가락으로 짚고 주위를 쓰윽 돌아보았다. 하지만 한 자, 한 자 읽어 내려가면서 호들갑스럽던 그의 목소리는 작고 느려졌으며, 끝에 가서는 윤기 있던 목소리가 끝이 심하게 갈라져 나왔다.

“마칠십더틴가칠하루늠지기터쇠차삼구돌길십”
(실제로는 긴 흰색 테이프에 세로로 적혀 있음.)

“어쩐지 너무 쉽다 했어!”

“이건 도대체 어느 나라 말입니까?”

“띄어쓰기가 전혀 안 되어 있어서 죽 이어 읽으면 불교 경전처럼 들리기도 해요.”

그러자 비취불상이 조선백자의 얼굴을 마주보며 말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할 또 다른 ‘암호’라는 거군요.”

마틴루터와 구

벽난로 불 위에 올린 냄비가 약하게 끓기 시작했을 때, 비취불상은 정사각형의 종이조각을 20개 만들어 각각에 아까의 그 메시지 글자들을 써서 퍼즐 맞추기를 하고 있었다.

“그게 잘 되겠습니까?”

고려청자가 비취불상에게 담배를 권하며 물었다.

“아,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조선식 가옥 살인 사건』 속 암호는 풀어서 여기까지 오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여기까지인가 보네요. 저는.”

“그래도 그 암호 페이지를 풀었을 정도면 상당한 추리 마니아의 실력을 가졌다고 보이는데, 저 같은 사람이야말로 이젠 머리가 굳었는지 잘 안 됩니다. 허허.”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지금 비취불상 님이 하신 것처럼 어쩌면 치환이라든가 암호 텍스트 자체의 변형과는 전혀 상관없이 재배열이나 그런 것들로 암호문을 해독할 수 있는 건 아닐까요?”

“사실 저도 그런 생각으로 이렇게 하고 있는 건데 그 배열의 기준이랄까 조금의 힌트도 주어지지 않아서 시작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잠시 후, 손톱을 물어뜯던 비취불상은 산책이라도 할 요량인지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아까 책 속에서 마이크로테이프를 찾아냈던 은노리개도 연습장에 뭔가를 끼적거리다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자신만만해 하던 금불상도 테이프를 왼쪽 검지에 빙빙 감았다가 풀었다가를 반복하고만 있었다. 또 거실 구석에 자신의 가방을 깔고 앉은 조선백자는 그런 금불상을 힐끔힐끔 쳐다볼 뿐이었고.

“너는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이란 말이냐. 마칠십더틴……!”

금불상은 집중력을 잃고 막연히 흥얼거리고 있었다.

“…….”

그렇게 감아 올라갈 때와 풀려 내려갈 때 테이프를 쫓는 조선백자의 눈과 고개는 같이 돌았다.

“뭘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금불상이 퉁명스럽게 내뱉자 조선백자는 또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딴청 부리듯 얘기했다. 금불상은 조선백자 흉내를 내는 것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쓸모없는 녀석 같으니…….”

잠시 후, 조선백자의 눈과 고개는 다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금불상이 신경질적으로 테이프를 다 풀어버리자 그때, 조선백자의 말문이 기적적으로 트였다. 밖에 나가 있던 비취불상이 황급히 뛰어 들어올 정도로 조선백자의 소리가 말 그대로 실내에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그, 금불상 님……. 사, 사이테일(scytale)! 우린 아마 그걸로 암호를 해독할 수 있을 거예요.”

조선백자가 제시한 암호해독법은 정말 단순한 것이었다. 기원전 5세기 경 스파르타인들이 사용했다고 하는 전치법의 일종인데 긴 띠 같은 것에 글자를 적고 일정한 지름을 가진 원형통에 띠를 감아 전혀 새로운 글자배열이 만들어지게 하는 방법이다. 문제는 감광준이 암호문을 만들 때 썼던 것과 같은 지름을 가진 사이테일에 테이프를 감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둥근 원통 물체를 찾아 온 집 안을 들쑤신 사람들은 감광준의 서재에서 발견한 몇 종류의 필기도구들을 조선백자 앞에 내밀었다. 깨알처럼 쓰인 글자 띠에 알맞은 원형 통이라는 건 역시 필기구보다 적당한 것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중 감광준의 손을 많이 탄 볼펜 하나가 눈에 띄었다. 어쩌면 마이크로 테이프 속 종이테이프에 깨알 같은 글씨로 암호문을 쓸 때도 이 볼펜을 사용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볼펜에 테이프를 5, 6차례 감아 글자를 수평으로 맞춰봤을 때 반응은 이랬다.

“제대로 감은 거 맞습니까? 다시 감아보죠.”

“아니, 그 볼펜 말고 이 만년필이 아닐까?”

하지만 조선백자는 이 볼펜이 감광준의 사이테일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너무 이상하게들 보지 마세요. ‘마틴루터구/칠가늠쇠돌/십칠기차길/더하기삼십’, 이 말들도 제대로 된 키워드만 찾아내면 익숙한 말들로 바꿀 수 있을 거예요. 뭔가 단서가 없을까요?”

“그래, 조선백자가 풀어낸 말이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맨 처음 암호문처럼 전혀 말이 안 되지는 않잖아요. ‘마틴루터’라든지 ‘가늠쇠’, ‘기차길’, ‘더하기’, ‘삼십’ 같은 유의미한 단어들도 보이고 말이죠.”

비취불상은 아까 금불상이 바닥에 버린 테이프 조각들을 이어 만지면서 생각에 잠겼다.

“자, 그럼 고유명사인 마틴 루터부터 해볼까요? 의미를 풀어보기엔 가장 만만할 거 같은데. 마틴 루터라면 서양의 종교개혁자 말하는 거 맞죠? 근데 ‘마틴루터구’는 뭐지? 누구 마틴 루터에 대해서 더 잘 아는 사람 없어요? ‘구’도 함께요.”

“다들 알다시피 종교개혁자고, 16세기 독일 사람이고, 95개조 반박문을 썼죠. 루터 교라는 교파도 있고. 직업에 관해서 소명의식을 얘기하기도 했고. 또 그리고…… 뭐가 있더라…….”

고려청자를 이어 조선백자가 진땀을 빼고 있을 때 은노리개가 뭔가를 떠올린 듯, 감광준의 서재에 들어갔다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그리고 볼링에 열광했던 남자였죠.”

은노리개의 손에는 다시 볼링공이 들려 있었다. 어설프게 자세를 잡는데 이번에는 공을 떨어뜨려 공이 마룻바닥을 쿵쾅쿵쾅 울리며 거실 한가운데를 가로 질러갔다.

“9핀 볼링게임을 고안해 낸 사람이기도 하고요.”

“대단하군요. 은노리개 님, 참 보기와는 다르게…….”

조선백자는 굴러온 공을 집어 들고 지공 구멍에 오른 손을 넣으려고 낑낑댔다.

“조선백자 님, 이 볼링공은 왼손잡이용 같군요.”

옆에서 보고 있던 고려청자는 자신이 자연스럽게 공을 쥐어 보였다. 눈부시게 빛나는 공에 사람들의 모습이 비쳤다. 볼링공 속 환상적인 요술 기류 속을 떠다니는 사람들의 얼굴은 난데없는 볼링 분위기에 모두 심취한 것처럼 보였다. 마틴 루터와 구, 이 구는 9핀의 숫자 9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첫 번째 행은 ‘볼링’을 의미했다. 아마 ‘볼링’은 전체의 키워드일 가능성이 높았는데 그것은 2, 3행으로 갈수록 명확해져 갔다. 볼링의 공이 굴러가는 레인을 보면 7개의 작은 쐐기모양이 삼각형 모양으로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칠(7)과 가늠쇠 돌을 의미한 것이었다. 이 가늠쇠 돌에 대해서는 일찍 별장 주변을 산책했다는 고려청자가 단서를 제공했다. 아무도 주의 깊게 보지 않았던 정원에서 고려청자는 작은 바위들(세어 보니 모두 7개였다.)을 발견했다고 했다. 일정한 간격으로 위치한 이 돌들이 볼링 레인의 가늠쇠(aim spot)가 되었다. 이제 남은 문젯거리는 무엇이 이 거대한 볼링게임의 핀이 되느냐였다.

“이 섬이 사실 볼링 레인처럼 보이기는 해요. 근데 볼링 핀이라니.”

“누구, 뭐 떠오르는 거 없어요?”

냄비의 끓는 소리를 완전히 외면한 채 골똘히 생각에 잠긴 사람들이었다. 한 20분 정도 지났을 때, 조선백자가 문을 기세 좋게 열고 밖으로 나갔다. 볼링 핀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때리던 은노리개가 문소리에 깜짝 놀랐다. 잠시 후, 다시 들어온 조선백자는 손에 나뭇잎을 한 움큼 쥐고 있었다.

“핀이라고 해서 다 저런 모양의 핀만을 말 하는 건 아, 아닐 거예요. 은노리개 님이 들고 있는 저 핀은 비록 플라스틱제이지만 보통의 핀들이라면 역시 처음엔 저 밖에 있는 나무들과 같은 모양이었을 테니까요. ……보, 보세요! 저 밖엔 단풍나무 천지라고요!”

볼링게임

지하 창고에는 삽이 두 자루, 곡괭이가 두 자루나 있었다. 고려청자가 준비한 멀건 스프와 빵으로 간단히 두 번째 날의 아침 식사를 마친 사람들은 무작정 정원으로 나갔다. 그리고 7개의 정원석(가늠쇠)을 통해 7개의 단풍나무 핀들을 어렵지 않게 정할 수 있었다.

3행의 ‘십칠(17)기차길’은 볼링 경기 중 스페어 처리 상황 중에서 두 핀 사이가 많이 떨어진 스플릿을 기찻길의 레일에 비유해서 레일로드(railroad)라고도 하는데, 좌우로 넓게 벌어진 10번과 7번 핀이 남게 되는 아주 어려운 상황의 스페어 스플릿을 뜻했다. 7개 정원석에 평행하고 있던 단풍나무 중 맨 뒤에 위치한 2개가 7번과 10번이었다.

비취불상이 면장갑을 낀 손바닥을 삭삭 비비며 사람들 앞에 섰다.

“누구 볼링 좀 치셨던 분, 없습니까? 이 어려운 스페어 처리에 대해 고견을 들어봐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럼, 이번 퍼즐이야말로 제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군요.”

고려청자가 말했다.

“지금이야 다리가 고장 나서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한 때는 꽤 쳤습니다. 지금 보이는 스페어 처리 같은 경우는 사실 거의 불가능한 스플릿입니다. 저도 10년 넘게 치면서 몇 번 보기 힘들었죠. 이론상으론 설명할 수 있지만 실제론 여러 변수 때문에 장담할 수 없는 스페어 처리죠. 프로들도 저 코스가 나오면 핀 하나만을 처리할 정도로요.”

“그 이론상의 방법이란 건 뭡니까?”

비취불상이 10번 나무를 매만지며 물었다.

“그 나뭅니다. 그 10번 나무를 키핀 삼아서 먼저 벽 쪽으로 쓰러트리면 벽에서 튕겨져 나온 10번 핀이 레인을 가로질러 7번 핀을 쓰러뜨리는 것이죠.”

“아, 그렇다는 건 핀에 운동 방향이 생긴다는 거잖아.”

“10번 쪽에서 7번 쪽으로 직선방향의 운동이죠. 맞아요! 그러면 ‘더하기 30’이 쉽게 풀리는군요! 10번에서 7번 나무로 직선을 긋고 그 직선방향으로 30미터에……!”

“거기에 보물이 묻혀 있겠군! 그럼 어디 보물 구경 좀 해볼까?”

금불상은 곡괭이를 들고 앞장섰다. 그러자 사람들은 누구라 할 거 없이 뒤늦게 손발을 휘저어 가며 금불상 뒤를 쫓았다. 월등히 앞에 선 금불상은 벌써 자리를 잡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땅에 녹슨 곡괭이를 탁하고 찍었다.

“여기 흙 색깔이 조금 달라. 땅도 덜 딱딱하고.”

두 번째로 곡괭이를 찍었다.

“빨리들 오라고! 안 그러면 내가 보물 다 갖습니다.”

세 번째 내리친 순간, 작은 금속성과 함께 불이 번쩍 하더니 고막을 찢는 굉음이 나면서 흙덩어리들이 작동 개시한 분수마냥 5, 6미터는 솟구쳐 올랐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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