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크홀

  • 장르: 추리/스릴러 | 태그: #싱크홀 #추리소설 #추리단편 #추리스릴러단편선
  • 분량: 138매
  • 소개: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던 밤, 청각 장애를 앓고 있는 아들과 함께 빗길에서 죽을 위기에 처한 혜원은 한 남자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그러나 남자의 태도가 이상하다. 더보기

싱크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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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오거라!”

죽음은 말했다.

“부디 동정하소서!”

노파는 대답했다.

“저는 아직 쓸모가 있답니다.”

노파의 말에 죽음은 자리를 떠났고 그날 밤 신에게 그 일을 보고했다.

“너는 내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도다.”

신은 ‘죽음에게’ 말했다.

“형벌로 너는 장님이 될 것이니라. 내일부터 네가 만지는 자는 누구든 죽게 될 것이다.”

그때 이후로 사람들은 나이에 관계없이 죽게 되었다.

—서아프리카 이그나이 사람들의 전설

*

오후 3:15

거대한 구름이 움직이고 있었다. 구름은 대기 중의 물방울을 탐욕스럽게 빨아들였다. 그리고 그것을 차가운 얼음 조각들로 만들어 일부는 상층부로 올려 보내고, 음전하를 띤 얼음 조각들은 하층부로 내려 보냈다. 음의 성질을 띠게 된 구름이 서서히 이동하자 위기감을 느낀 대지는 양전하를 지표면에 모아들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구름과 지표의 상대적 차이가 폭발할 정도로 커졌고, 전위차가 1미터에 100만 볼트까지 증가하였다. 이제 구름 속에 축적된 음전하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지상으로 내리 꽂혔다. 지표도 고송을 대포로 삼아 자신이 품고 있던 양전하를 쏘아 올렸다. 3만 도의 열기가 서로 맞부딪혀 시커먼 하늘을 반으로 쪼개놓았다. 제 할일을 다한 고송이 그 속까지 새카맣게 타버리고 나서야 우르릉 쾅하는 소리가 대기를 울렸다.

남자는 번쩍이는 빛에 놀라 지하실에 나있는 조그만 환기창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는 대기 중에서 비릿한 비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서둘러야 했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있었다.

남자는 금속 철제 테이블 위에 알몸으로 누워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입을 벌려 어금니 뒤에 솜을 채워 넣었다. 중력 때문에 아래로 처져 있던 뺨이 통통하게 부풀어 올랐다. 남자는 여자의 볼에 조직생성액(tissue buider)을 넣을까 하다가 솜으로 충분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남자는 조명 위에 투명 테이프로 고정시켜 놓은 여자의 사진을 보았다. 여자는 놀이 공원의 회전목마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입술 곡선을 유심히 관찰했다. 아랫입술은 도톰하게 부풀어 있었고 윗입술의 산은 낙타의 등처럼 선명했다. 남자는 윗이빨에 명주실을 단단히 감고, 아래 송곳니도 그렇게 했다. 그리고 힘껏 잡아당겼다.

입이 다물어졌다. 남자는 여자의 입술에 바세린을 곱게 펴 바르고 핀셋으로 너덜너덜한 피부조직을 떼어낸 다음, 입술 봉합 크림을 발라주었다. 흔히 초보자들은 입술 선을 일직선으로 만드는 실수를 하고는 한다. 하지만 사람의 입은 말발굽처럼 각이 져 있기 때문에 중간부분을 약간 튀어나오게 해야 한다.

다음은 눈이었다. 남자는 사진 속 여자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여자의 눈에는 프레임 밖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에 대한 애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여자의 눈동자는 연한 갈색이었다. 장난기로 반짝이던 눈은 이제는 그저 하나의 구멍에 불과했다.

남자는 여자의 눈꺼풀을 열고 안구와 안을 꼼꼼하게 닦았다. 눈꺼풀 밑에 마사지 크림을 발랐다. 그리고 윗눈꺼풀을 집어 올리고 포셉(forceps)을 사용해서 솜을 밀어 넣었다. 어느 정도 모양이 잡히자 안구 캡을 이용해서 볼록한 형태를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 있는 형태가 잡히자 강력접착제로 붙였다.

“도 선생님, 퇴근 안하세요?”

남자는 뒤를 돌아보았다.

조수가 말을 걸고 있었다.

“해야지. 어머니 걱정도 되고.”

“어머님은 좀 어떠세요?”

“여전하시지 뭐. 그렇다고 요양원에 보내기도 뭐하고.”

“그러게 말이에요. 나이 들수록 치매 보험이라도 들어둬야 한다니까요.”

조수는 말을 꺼냈다가 멈칫했다.

“대강 끝냈으니 위생 처리 준비를 해줘.”

“알겠습니다.”

조수가 동맥에 튜브를 연결했다.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핸드폰 바탕화면에는 생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자와 사내 아이가 병원 로비에 앉아 있는 모습이 비스듬하게 찍혀 있었다. 두 사람은 카메라를 의식하지 못하고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이의 보송보송한 솜털이 나 있는 귀밑머리 옆에는 흰색 이어폰 같은 것이 꽂혀 있었다.

성욱은 핸드폰을 닫고 다시 한 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악의로 가득 찬 것 같은 검은 먹구름이 대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오후 5:45
몇 만 년 전보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더워진 지구는 바다를 통해 더 많은 물을 증발시켰다. 구름은 만삭의 여인처럼 한껏 부푼 몸을 이끌고 자신을 내려놓을 내륙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암초에 걸렸다. 인간이 세워놓은 건물들에서 더 많은 열이 방출되었고, 대륙에서는 사막의 바람이 메마른 모래를 안고 휘몰아쳐왔다.

구름은 바다를 건너 거친 언덕을 넘었지만 결국 내륙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양수가 터진 임산부처럼 엄청난 양의 물을 해안 도시에 쏟아 붓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그녀가 당한 원한을 모두 토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세차고 강렬했다.

혜원은 낡은 아토스 승용차의 운전대를 움켜쥐고 앞을 뚫어져라 주시하면서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린 자신에게 욕설을 퍼부어 댔다.

고속도로에 진입할 때 한두 방울 부딪히던 비는 어느새 양동이로 퍼붓는 것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규정 속도 이상으로 쌩쌩 달리던 차들도 비상등을 켜고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었다.

어머니와 밥상머리에서 다투지만 않았다면 지금쯤은 따뜻한 방 안에서 일기예보에 귀를 기울이며 철지난 연예인들의 이혼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늘 그렇듯 일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그 놈은 아직 소식도 없다니?”

어머니가 포문을 열었다.

“그 얘기는 그만해요.”

“확실하게 이혼을 하던지 해라.”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하고 어떻게 이혼을 하라는 거예요?”

“석현아, 흘리지 마라. 김치도 먹고.”

어머니가 말했다.

“네.”

아이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애가 흘릴 수도 있지 뭘 그래요? 밥이나 좀 맘 편히 먹게 가만 좀 내버려 두세요.”

“지 애비도 그렇게 질질 흘리더니만. 오죽하면 상견례 자리에서도 그랬잖니.”

“제발 석현 아빠 얘기는 그만할 수 없어요?”

“알았다. 그런데 내가 알아보니까 실종된 지 7년이 넘으면 자동 이혼을 할 수 있다더라. 법원에 서류만 내면 된대.”

“엄마아아아!”

그 후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그녀는 가시 방석 같은 곳에 앉아 있느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 싶어서 부랴부랴 출발했다.

혜원은 비상등을 켜고 전조등을 상향으로 조절했다. 하지만 여전히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와이퍼를 최대한 빠르게 작동시키면서 작은 욕설을 뱉어냈다. 그녀의 욕설에 잠을 깬 것인지 뒷좌석에서 모포를 둘둘 말고 자고 있던 석현이 작은 신음소리를 뱉어냈다.

“아들, 깼어? 조금만 참아. 금방 집에 갈 수 있을 거야.”

혜원은 룸미러를 내려 아들을 보며 말했다. 아이는 미키마우스가 그려진 푸른색 모포를 목에 감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이 사라지고 예전에 일했던 직장에 취직하려고 했지만 서른일곱이나 먹은 여자를 써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특별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미모가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사실 젊었을 때에야 제법 남자들에게 호감을 얻을 수 있는 미모라고는 했지만 지금은 세파에 찌든 여자일 뿐이었다. 그녀가 시작한 일은 알로에 판매 사원이었다. 몇 주의 교육을 마치고 방문 판매에 뛰어들었다.

가방에 알로에 화장품이며 건강 식품을 넣고 주로 학교를 찾아가 판매를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품목이 급식에 사용되는 현미나 잡곡으로 바뀌었을 뿐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부딪히는 빗소리가 마치 전쟁터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했다. 언젠가 보았던 범죄 영화에서처럼 차에 자동화기의 격철이 넘어갈 때까지 총알을 퍼부어대는 것 같았다.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원은 급한 마음에 운전대를 더 움켜잡았다. 아이만 아니라면 담배 한 대만 피웠으면 좋을 것 같았다.

*

오후 5:50

아이는 엄마가 내뱉는 욕설을 들었다. 사실 엄마는 아이가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엄마가 가끔 자신은 못하게 하는 욕을 한다는 것도, 때로는 빌라 앞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고 들어온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할머니 집에 갔다 온 날이면 싱크대 아래 숨겨둔 소주를 꺼내 마신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또 엄마의 손목에 지렁이가 기어간 듯 한 상처가 두 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할머니와 엄마는 그것에 대해 말하기를 싫어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돈이 없어서 ‘인공 와우’를 심지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건 머릿속에 전기로 움직이는 달팽이를 집어넣는 것인데(우웩!) 많은 수술비가 필요했다. 엄마는 돈이 없었다. 아빠는 집에 없다. 할머니는 돈이 있지만 도와주기 싫어한다. 간단한 문제였다.

아이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에는 형광별들이 붙어 있었다. 사라지기 전 언젠가 아빠가 온 가족이 차에 누워서 보자며 붙여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형광별은 별이 아니었다. 그저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파는 싸구려 모조품일 뿐이었다.

하늘이 갈라지면서 번개가 울리고 천둥이 쳤다. 폭탄이 터지는 듯 굉음이 울렸다. 아이는 귀에서 보청기를 빼내었다. 세상은 아득한 소리로 바뀌었다. 아이는 언제부터인가 엄마와 아빠가 싸울 때면 슬그머니 보청기를 빼는 버릇이 생겼다. 석현은 모포를 더 끌어안으며 차창에 흘러내리는 커다란 어둠을 바라보았다.

오후 8:04
혜원은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퍼붓는 비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시야는 전혀 트이지 않았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오면서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세상이 물로 멸망되려는 것 같았다. 해안도로의 사면에서 낙석이 떨어지며 천장에 부딪혔다. 바다는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이런 상황에서 휴대폰을 받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벨소리는 끈질기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면서 울려댔다.

“아들, 전화 좀 받아.”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뒷좌석의 아이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때때로 그녀는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가 있었다. 아이는 그저 자신만의 세상에 빠진 채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벨소리가 계속 울렸다.

어머니의 잔소리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계약을 연장하자는 전화일 수도 있었다. 가능성이 거의 희박하다고 해도 그동안 들인 공을 생각하면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핸즈프리의 버튼을 눌렀다.

“집에 도착했니?”

어머니였다.

“아직 가고 있어요.”

그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텔레비전에서 그러는데 비가 많이 온단다.”

“알아요. 엄마. 저 운전 중이니까 끊어요.”

“얘, 아까 하던 얘기 말이다…….”

“제가 어떻게든 해 볼게요. 제 자식이니까 제가 알아서 해야죠.”

“그게……”

지직거리며 전화가 끊어졌다.

재다이얼 버튼을 눌렀지만 통화권 이탈이라는 메시지만 떠올랐다.

그것은 갑자기 나타났다.

샤워 커튼 너머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뿌연 물 막 속에서 둔덕이 나타났다. 해안 도로 사면이 무너지면서 토사가 쓸려 내려와서 차선을 완전히 막고 있었다.

혜원은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들을 오른쪽으로 틀었다.

타이어는 ABS시스템을 가동하면서 바닥을 움켜잡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도로에 생긴 수막현상으로 차는 이리저리 제멋대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핸들을 틀었지만 미끄러지는 차체를 바로 잡을 수 없었다.

“잡아아앗!”

그녀가 석현에게 소리 질렀지만 아이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차체가 왼쪽으로 확 쏠리자 머리를 손잡이에 쾅 부딪혔다. 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뒷좌석에 쌓아 놓았던 곡물 샘플이 터지면서 좁쌀이며 시래기나물, 콩, 팥, 수수 같은 것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가드레일을 들이받으며 그 충격으로 차체가 옆으로 쏠리면서 탄력을 받아 장난감 자동차처럼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시커먼 아스팔트 바닥이 휙 스치고 지나갔다. 충격으로 전면의 안전유리가 깨지면서 혜원의 얼굴로 쏟아져 내렸다.

죽음의 순간에 지나간 인생이 스쳐지나 간다더니 남편과 처음 만났던 일, 결혼, 실종과 같은 것들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지나 갔다. 첫 아이를 낳던 일, 힘겨웠던 진통, 하혈이 멈추지 않았던 일. 결국 그녀는 자궁을 들어내야만 했다. 그리고 친구들과 빈궁마마라며 우스개 소리를 했던 일…….

아들!

그녀는 아들을 찾아야만 했다. 만약 깨진 창문으로 튀어나가기라도 한다면 아이는 차에 끼인 채 토마토처럼 으깨지고 말 것이다. 아이는 어디 있지? 차가 휙 돌아가면서 차가운 빗줄기가 얼굴을 때렸다. 그녀는 온통 옷이 젖는 것도 모른 채 하늘을 쳐다보았다. 시커먼 하늘은 어디가 아스팔트 바닥이고 어디가 하늘인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다시 안전벨트가 세차게 당겨지면서 허공에 들렸다.

아들!

혜원은 안전벨트에 매달려 아들을 찾았다. 아이의 비명이 들렸다. 석현은 괴성을 지르면서 차 안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옆 유리창에 부딪히고 밖으로 튕겨져 나가려고 했다. 잡았다. 하지만 모포뿐이었다. 다시 쾅 하는 충격과 함께 빗줄기가 얼굴을 때리고 유리조각이 우수수 떨어졌다. 한 번 더 차가 굴렀다.

잡았다!

그녀는 곡물 찌꺼기들과 함께 밖으로 튀어 나가려는 아이의 목덜미를 잡았다. 있는 힘껏 끌어안고 움켜쥐었다. 차는 모로 세워진 채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빗물의 레일을 타고 차는 계속해서 미끄러지고 있었다. 혜원은 제발 반대편에서 오는 차가 없기를 빌었다. 만약 다른 차가 질주해 온다면 영락없이 들이 받혀 종잇조각처럼 구겨지고 말 것이다. 그녀의 귀에 끼익하고 반대 차선에서 급브레이크를 잡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차는 영원처럼 미끄러지고 있었다.

드디어 차가 멈췄다! 빠져 나가야 한다.

그녀는 허공에 매달린 채 서둘러 안전벨트를 풀었다. 간신히 벨트를 풀자 몸이 밑으로 떨어졌다.

“석현아. 어서 차 밖으로 나가.”

아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공황장애에 빠진 아이처럼 충격을 받아서 얼이 빠진 것 같았다.

“밖으로 나가라고.”

아이가 자신의 귀를 가리켰다.

“아, 아…….”

“보청기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가 찾아볼 테니까 어서 나가.”

혜원은 아이의 엉덩이를 받쳐서 모로 세워진 창문 밖으로 밀어 내었다. 아이가 올라가자 차체가 기우뚱하고 움직였다. 그녀는 아이의 손을 잡고 차 밖으로 밀어냈다.

“뛰어. 석현아.”

아이가 도리개질을 했다.

“어서 뛰어.”

그때 아이의 겨드랑이를 잡는 손이 있었다. 남자는 아이를 번쩍 들어서 도로로 내려주었다.

“괜찮으세요? 빨리 나와요.”

남자가 물었다.

“잠깐만요.”

혜원은 차 안을 손으로 더듬었다. 깨진 유리 조각들과 곡물 알갱이들이 부유하고 있었다. 손으로 아무리 더듬어도 보청기처럼 생긴 것은 찾을 수 없었다. 세차게 퍼붓는 빗줄기는 차 안을 호리병처럼 만들고 있었다.

“어서 나와요.”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혜원은 포기하고 남자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억센 손이 느껴졌다. 남자가 주는 힘을 따라서 밖으로 나왔다. 혜원이 차 밖으로 나오자 차가 기울면서 옆으로 쓰러졌다.

오후 8:49
성욱은 히터를 더 세게 틀었다. 여자는 아이를 끌어안고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비에 젖어 속옷이 그대로 드러났다. 다행히 다친 곳은 별로 없었다. 여자의 이마에 상처가 나기는 했지만 일어난 사고에 비하면 기적 같은 일이었다.

차는 어쩔 수 없이 버려두고 왔다. 핸드폰 통화도 되지 않아서 사고 연락을 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성욱의 핸드폰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해안가에서 장사를 하는 집들도 모두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그만하길 다행입니다.”

“그렇죠.”

“몇 살이니?”

아이에게 물었다. 하지만 아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것은 그를 무시하는 눈빛이 아니라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한 눈빛이었다.

“귀가 거의 들리지 않아요.”

여자가 말했다.

“사고 나면서 보청기를 잃어버렸어요.”

“저런.”

“쉿! 쉿!” 와이퍼가 불길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하지만 노인의 무기력한 몸짓처럼 물을 제대로 퍼 나르지 못하고 있었다.

“해안 도로를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여자가 물었다.

“적당한 기회를 봐서 그렇게 해야겠어요.”

성욱이 산타페의 속도를 줄이면서 말했다. 해안도로 곳곳에서 토사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탁한 물줄기에 의해 도로 상황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바다에서 비바람이 몰아쳐 차를 불안하게 흔들어 댔다. 라디오를 틀자 기상 특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범성동 일대가 물에 잠겨가고 있습니다. 현재 시간당 150ml가 넘는 많은 비가 내리고 있으며 이 상태로 계속 내리면 도시는 완전히 물에 잠기고 말 것입니다.”

“어쩌다 이런 날씨에 차를 끌고 나오셨어요?”

“어머니 때문에 집에 가봐야 해서요. 어머니가 치매시라 밖으로 돌아다니셔서 문을 잠가놓고 나왔거든요. 지대가 낮아서 비가 계속 오면 물이 찰 텐데 걱정입니다.”

오후 8:54
아이는 엄마의 품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방금 전 사고 때문에 속이 쓰려왔다. 하지만 아픈 곳은 없었다. 사실 온몸의 감각이 둔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손이 떨렸다. 엄마에게서는 젖은 흙냄새가 났다. 아이는 엄마 냄새를 찾으려 품속을 더욱 파고들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깊은 수면 속으로 가라앉아 있는 것처럼 웅 하는 소리뿐이었다. 아이는 검게 코팅된 선루프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바라보면서 차 안이 심해를 탐사하는 잠수함 같다고 생각했다.

오후 9:01
“저 분이 어머니신가요?”

대시보드 앞에 있는 사진을 가리키며 혜원이 물었다.

“네.”

남자가 사진을 힐끗 보면서 말했다. 운전 때문에 신경이 쓰이는지 남자는 어딘지 불편해 보였다.

사진 속에서는 흰색 원피스를 입고 손으로 뜬 것 같은 갈색 숄을 걸친 노부인과 남자의 부인으로 보이는 여자, 그리고 남자 아이가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숲에서 찍은 것인지 굵은 참나무와 소나무들이 배경으로 있었고, 아이의 발치에는 조잡한 색이 칠해진 목마가 있었다. 부인의 표정이 결혼식에서 사진사의 신호에 따라 억지로 웃음을 짓는 것처럼 굳어 있었다.

“어머님께서 참 고우시네요.”

“그렇죠?”

“치매에 걸리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원래 치매는 주변 분들이 힘들다던데.”

여자가 물었다.

“그렇다고 요양원 같은 곳에 있으시기는 힘들 것 같아서요. 요양원에 가 계신 적이 있었는데 오히려 전화가 너무 자주 와서 더 번거롭더군요.”

“저도 그래요. 어머니가 한 분 계시는데 점점 어린 아이가 되어 가는 것 같아요. 늙으면 아이가 된다고 하더니.”

차는 해안 도로를 벗어나 시내로 들어섰다. 그곳은 전쟁이 터져 대피령이 내려진 폐허가 된 도시 같았다. 도시의 온갖 쓰레기가 물 위에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도시를 가로지르고 있는 창대교는 물에 잠길 듯 넘실거리고 있었고, 탄천 주차장에는 몇 대의 차들이 곧 물에 잠길 것 같았다. 한 남자가 자신의 차에 시동을 걸려 애쓰고 있었지만, 곧 경찰에 의해서 끌려나왔다. 급하게 도시를 빠져 나가려는 차들이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자 파출소가 보였다.

“저기 내려주세요.”

혜원이 말했다.

“내려서 사고 신고도 하고 어머니께 전화도 드려야겠어요.”

노란색 우비를 입은 경찰이 금방이라도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우산을 들고 파출소에서 나왔다. 강풍이 불어 우산을 꺾어버렸다. 경찰은 못쓰게 된 우산을 팽개치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 같은 날엔 경찰도 정신없을 겁니다. 비가 좀 그치면 하는 것이 좋겠군요.”

남자가 그녀의 팔을 움켜쥐었다. 남자의 길고 하얀 손가락은 마치 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해골처럼 그녀의 손목을 죄어왔다.

“더 이상 폐를 끼칠 순 없어요.”

그녀는 남자의 손에서 손목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차 문을 열려고 하자,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잠겼다. 창문도 내려가지 않았다.

경찰이 고개를 돌렸다.

혜원은 손으로 경찰을 불렀다.

“집으로 가야지 어디로 가려고 하는 거야.”

남자가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의 손에는 날카로운 칼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훅 숨을 들이마셨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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