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이 되어도 변하는 건 없었다. 몸을 옹송그린 행인들의 거무칙칙한 패딩 점퍼도, 겨우내 뿌연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방치된 주차장의 자전거도. 월급날에도 늘지 않는 통장 잔고나 짜증 섞인 한숨도 꼭 2월 그대로였다. 봄이 오긴 왔는데 말이야. 삐죽삐죽 싹이 움튼 여린 나뭇가지를 올려다보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던 그때였다.
휴대폰 알림음이 울렸다.
‘여기는 김녕 해수욕장. 오늘 집으로 간다.’
‘새로 산 잠바가 무거움. 해녀의 집에서 회는 먹지 마라.’
‘얘, 프리패스 이용권이 뭐냐?’
전송된 사진의 주인공은 엄마였다. 해변의 흰 모래사장에서 두 다리와 양팔을 활짝 벌린 포즈로 아무 근심 없이 웃고 있다. 알이 동그란 미러 선글라스와 녹색 야상 점퍼, 안에 받쳐 입은 아이보리색 니트가 경쾌해 보였다. 그래, 제주도 물빛이 이런 고운 에메랄드 색이었지. 희준이 낳고 마지막으로 제주도에 놀러 간 게 언제였더라.
무심히 손가락을 움직여 엄마의 웃는 얼굴을 확대했다. 숱 없는 머리와 주름진 눈가를 벙거지와 선글라스로 감춘 덕분에 팽팽한 두 볼만 봐서는 오십 대 저리 가라할 만큼 젊어 보인다.
1억의 미소인가. 흐뭇하게 벌어진 입꼬리와 탱탱하게 밀려 올라간 광대를 보며 다경은 감탄했다. 통장에 현금 1억을 가진 여자의 미소. 선입견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엄마는 사진 속에서 그런 미소를 짓고 있다.
현금 1억. 정확히 말하면 1억 원짜리 수표 한 장이었다.
“나 노령기본연금 신청했다.”
지난 토요일 오후, 모처럼 엄마를 만난 그녀가 대학로의 한 솥밥집에서 솥 안의 누룽지를 박박 긁어내고 있을 때였다. 노령기본연금? 기초노령연금이겠지, 하고 튀어나오려는 말을 꿀꺽 삼키고 휘휘 주변 눈치부터 살폈다. 은은한 조명 아래 식당 분위기는 차분했고, 손님들은 다만 진지한 표정으로 누룽지를 긁는 데 온 정신이 팔린 듯 보였다. 그래도 다경은 목소리를 죽였다.
“엄마가 무슨 기초노령연금이야. 집도 있으면서.”
“그래, 그래서 재작년엔 안됐지. 근데 법이 바뀌어서 이제 집 있는 사람도 해준다더라.”
기초노령연금은 국민연금 혜택을 받지 못하는 노인에게 주는 나랏돈이었다. 65세 이상에 집이 없고 고정소득도 없으며 일정 액수 이상의 현금이나 승용차도 없는 순백의 무소유 노인이라야 받을 수 있는 돈이라던가. 시세가 6억이 될까 말까 하는 아파트 한 채에 약간의 현금까지 보유한 엄마가 심사의 문턱을 넘을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하여간 우리나라는, 애매하면 안 돼. 아예 있거나, 아예 없거나 해야지, 어지 중간하게 있는 사람들이 항상 피해를 봐요. 엄마가 재작년에 했던 말을 거의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되풀이했다. 불평을 쏟아내는 입과는 별개로 두 눈에는 ‘빈곤 심사를 통과하지 못한 노인’이라는 자부심이 떠올라 있다. 그래요, 맞아. 애매한 부모도 문제예요. 자식한테 1억 정도 턱, 도와줄 만큼 있지 않을 바에야 매달 용돈이나 야금야금…
“암튼 엊그제 그것 때문에 은행 가서 1억 뽑고 생쇼를 했지 않니.”
고개가 절로 번쩍 올라갔다. 1억? 무슨 1억? 아빠가 살아 계실 때 시골 땅을 팔아 빚잔치를 하고 남은 현금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1억이나 남아 있었다고? 엄마에게서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은행 직원이, 쭉 보더니 애매하다는 거야. 글쎄 통장에 있는 1억을 빼래. 그게 재산명세에 잡히면 통과 안 될 거라면서. 그래서 글쎄 1억을 수표로 뽑았지 뭐니. 집에 오는 길에 어찌나 살이 떨리던지…”
“그래서? 돈은 어디에다 뒀어?”
“서재에 책 속에다 넣어 놨지. 그것도 응, 어디다 숨길까 꼬박 반나절을 고민했다. 책상 서랍 밑에 숨길까, 화장실 변기에다 숨겨 놓을까, 아니면 베개 속에 넣고 바느질을 해야 되나…”
“쉿 조용히 좀 말해. 엄만 하여간, 간도 커. 그렇게 큰돈을 집에다가 보관하겠다고? 그러다 도둑이라도 들면 어쩌려고.”
듣기만 해도 살이 떨릴 지경이었다. 엄마의 아파트는 1층이었다. 온갖 재앙의 변수와 집안의 현금과 관련한 괴담들이 일제히 부스스 일어나 머릿속을 뛰어다녔다. 가스 불을 깜빡해서 집까지 홀랑 탔다더라, 지인이 알고는 싹 훔쳐 갔다더라, 천장에다 숨긴 걸 잊어버리고 이사했다더라…
“아이, 글쎄, 걱정하지 말라니까. 우리 집에 올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래.”
“제발 거실에 커튼 좀 잘 치고 살아. 밖에서 빤히 들여다보이게 해놓고, 아주 노인네 혼자 사는 집이라고 광고를 해요, 광고를.”
흥, 코웃음을 쳐도 딸의 잔소리 폭격이 그리 싫지만은 않은 눈치였다.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로 작은 행동 하나도 서운해하고 작은 관심 하나도 반기는 엄마를 볼 때마다 다경은 마음이 짠해지곤 했다. 천하의 우리 엄마도 약해졌구나. 많이 늙었구나.
한데 그 1억, 정말 그렇게 보관해도 괜찮을까. ‘프리패스는, 나 같은 딸을 낳은 엄마의 인생 같은 거라고나 할까’. 농담 같은 답장을 써 내려가던 다경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아무리 심사가 끝나는 4월까지만 그런다고 쳐도, 혼자 사는 노인네 집에 무슨 일이 어떻게 생길 줄 알고. 은행에 가면 귀중품을 금고에 보관해 준다는데, 그런 거라도 알아봐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엄마가 알아서 한다는데, 딸년이 뭐라고 이러쿵저러쿵 간섭이란 말인가. 이런 걸 두고 쓸데없는 오지랖이라고 하는지도 몰랐다. 뭐든 관심이 지나치면 의심을 사는 법이니까.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분양 사무실이었다.
‘은빛 별숲시티 일반분양 – 계약자 분양대금 잔금 납입일을 알려드립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다경은 눈을 한번 질끈 감았다 떴다. 그렇게 하면 잔금 납입일이 한 일 년 뒤로 미뤄지기라도 할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