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을 고하는 건 2월이 어울린다.
그래서 나는 거지 같은 학원에 퇴사를 고했다. 내 말을 들은 서무팀장은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볼펜을 들어 탁상달력을 톡톡 두드렸다. 딱 신입 등록생들 들어온다고 이래저래 바쁠 시기인데 꼭 가야겠어요? 난처한 말투와 좁혀진 미간이 연기인지 진짜 곤란해서 나온 표정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내가 크게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이 지옥 같은 환경에서 계속 근무해 봤자 애꿎은 정신만 더 깎여 나갈 뿐이다.
마찬가지로 내 사정 따위 관심도 없을 서무팀장은 이런저런 곡소리를 늘어놓으며 끝까지 나의 퇴사 일자를 잡아 늘리려 들었다. 그 기간을 대패로 갈아 내듯 박박 깎는 건 누구도 칭찬해 주지 않을 지난한 작업이었다.
퇴사 날짜를 맞추는 데에 든 수고에 비해 학원을 떠나는 일 자체는 깔끔하게 끝났다. 마지막 짐을 담은 종이가방과 숄더백을 메고 이제 두 번 다시 찾지 않을 건물을 떠나는 동안 아무도 내 이름을 부르거나 아쉬움을 표하지 않았다. 퇴사 면담으로부터 정확히 한 달 하고도 일주일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든든한 이직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뾰족한 계획이 있지도 않다. 가족들이 이 사실을 알면 혀를 차며 흘겨볼 뿐 그동안 잘 버텼다고 격려해 주진 않겠지. 나도 알고 있다. 이런 불경기에, 이런 취직난에, 주어진 일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게 얼마나 바보 같고 위험천만한 짓거리인지. 하지만 사람에게는 누구나 한계가 있지 않은가? 다들 내게는 한계가 없어야 하는 것처럼 굴지만 나도 그 정도는 판단할 수 있다.
* * *
다음 날 은행 앱을 열어 보았다. 당장 돈 들어올 곳은 없었지만, 2년간 죽도록 일만 하고 제대로 쉬지도 못한 대가는 월급통장의 숫자로 쌓여 있었다. 물론 성실한 회사원의 자산관리 성공 사례로 쓰일 수준의 금액은 아니다. 낯익은 듯 낯선 숫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화면에 뜬 알람을 눌러 보았다.
문지을 고객님의 만기 적금이 1건 있습니다!
메시지를 눌러 보니 매달 얼마씩 모아 12개월을 꽉 채운 적금 내역이 튀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작년 이맘때쯤 적금 이율이 높은 상품이 있다고 온 사방이 떠들썩했었지. 괜히 뒤처지기 싫은 마음에 아등바등 가입한 적금은 당시의 광풍에 비하면 웃음이 나올 정도로 소소한 이자와 함께 만기 입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잊고 있던 목돈이 들어왔는데 기분이 바닥을 칠 이유는 또 뭐가 있겠는가. 나는 또 다른 예적금 상품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은행 상품에 다시 가입하려는 건 아니었다. 그런 상품들이 가지게 마련인 희망차고 긍정적인 단어나 홍보 문구를 보면 기분이 나아질까 싶었을 뿐이다. 물론 적절한 기분 전환은 되지 않았다. 다만 멍하니 화면을 훑어보는데 하단 구석의 아이콘이 눈에 띄었다. 은행의 마스코트로 추정되는 분홍색 악어 캐릭터가 둥근 말풍선을 띄우고 있었다.
어떤 예적금 상품이 좋을지 망설여지시나요?
리마가 당신에게 알맞은 상품을 추천해 드릴게요!
마스코트 이름이 리마인가? 은행이 보이스피싱 사이트도 아니고, 상품 추천받는 정도야 괜찮겠지. 상담 아이콘을 누르자 악어가 방긋 미소 짓더니 그대로 앱 화면을 바나나 껍질처럼 벗겨 내고 설문조사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요즘은 은행도 이런 전환 연출에 돈을 들이나?
안녕하세요, 문지을 고객님.
저에게 말을 걸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문항에 솔직하게 답변해 주세요!
01 약속 시간에서 10분이 지났는데 친구가 약속에 늦는다고 한다. 당신의 반응은?
A. 말도 안 돼! 친구에게 마구 화를 낸다.
B. 괜찮아? 무슨 일 있었어? 일단 친구를 걱정한다.
C. 내색은 하지 않지만 다음부턴 친구와 놀지 않기로 한다.
첫 문항을 보자마자 감이 왔다. 아무래도 상품 추천을 빙자한 성격검사인 모양이다. 근데 이런 검사로 예적금을 추천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싹싹한 성격이든 배배 꼬인 성격이든 조건이 동일할 경우 적용받는 금리는 똑같을 텐데.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문항 체크를 시작한 이유는 뭐든지 간에 집중할 거리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11 불합리한 이유로 나를 괴롭힌 친구가 죽을 위험에 처했다. 당신의 반응은?
A. 잘됐다. 눈물 좀 쏙 빼 보라지!
B. 그래도 마음이 안 좋다. 도와주자.
C. 방관한다.
요새 성격검사에는 이런 질문도 나오나? 살짝 주저하던 나는 금방 마음을 고쳐먹었다. 하긴 무료로 하는 검사에서 얼마나 전문적인 질문이 나오겠어. 분명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심리검사 자료를 이것저것 가져오다 보니 이렇게 된 거겠지. 무난하게 B를 누르기로 했다.
12 정말로?
A. 물론이야!
B. 사실은 아니다.
C. 사실은 내가 죽이고 싶다.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감각의 문제다. 눈동자를 살짝 움직여 화면 상단을 바라보니 여전히 분홍색 악어 캐릭터가 둥실둥실 떠 있었다. 입가는 귀엽게 올라가 있지만 동그란 점 같은 눈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는다. 그 섬뜩함을 의식한 순간에야 근본적인 문제가 떠올랐다. 이 은행의 마스코트가 분홍색 악어였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