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쓰는 사람에 대한…

  • 장르: SF, 기타 | 태그: #환상문학 #단편선 #환상문학단편선 #소설을쓰는사람에대한 #정희자
  • 평점×5 | 분량: 137매
  • 소개: “사실 여러분들은 다 제 소설 속 등장인물입니다.” A는 소설을 쓴다. 그것은 소설가인 B에 관한 이야기인데, B는 또 다른 소설가인 C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C 역시 소설... 더보기

소설을 쓰는 사람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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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반복

나는 단지 순환적인, 원형의 책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 페이지와 첫 번째 페이지가 동일해 무한히 계속될 수 있는 그런 책 말입니다.

― 보르헤스,「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중

*

이제 A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의 손에서 하나의 이야기가 태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소설을 쓰는 사람에 대한 소설이다.

그 남자, B(남성, 36세)는 SF를 쓰는 작가다. 어릴 때부터 독서를 좋아했으나 특별히 어떤 장르나 작가를 의식하지 않은 잡식성 독자였다. 그런 B가 SF라는 연못, 혹은 늪에 몸을 담그게 된 것은 고등학생 때 가족 전부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것이 계기였다.

자연히 영어 공부를 위해 영어로 된 소설을 읽기로 했지만 넉넉치 못한 사정으로 헌책방을 찾아갔는데 거기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채로 먼지와 동화되고 있던 페이퍼백, 그리고 그 옆에서 본래의 색을 잃어가며 폐지로 늙어가던 펄프 잡지들의 숲을 헤쳐갔다.

잡지와 페이퍼백은 주로 판타지, SF, 추리와 같은 장르 소설들이었고 손에 집히는 대로 몇 권 집어 들다가 자연히 자력처럼 SF에 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순조로이 미국의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지만 SF에 대한 애정은 점점 더해 갔고, 왜 한국에는 이 신세계가 거의 소개되지 않고 있는지를 생각했다. 과거 그가 읽은 SF는 아동용 도서 정도가 전부였기에 그에게는 SF 자체가 신세계요 경이와 환상의 현현이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 미국에서 부모님의 식당이 번창하여 가계에 여유가 생기자 B는 고국과의 연결이 가능한 수단인 PC통신에 대해 알게 되고 비싼 통신 요금을 감수하며 통신망을 통해 사람들에게 SF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동호회를 만들고, 명작들을 소개하고, 단편을 번역하는 등의 활동을 했지만 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한국에서 SF는 몇 번 번역되어 나왔으나 잘 팔리기는커녕 금방 절판되고 소수의 마니아들이 헌책방을 전전하는 사정이었다. B 자신도 장기간 접속이 부담되어 통신망의 활동에는 한계가 있어서 왕성한 활동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과학 기술의 발전이 과학 소설을 뒷받침해 주는 시의적절한 일이 일어났다. 인터넷이라는 통신 혁명으로 저렴하고 빠르게 전세계가 연결되자 B는 기다렸다는 듯 좁고 느리고 비싼 PC통신을 떠나 인터넷에 홈페이지와 커뮤니티 사이트를 만들어 더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으려는지, SF의 출간이 많아지고 반응도 좋아지며 저변이 확대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출판사들이 창작 SF 출간을 생각해 보는 상황에 이르렀다. 하지만 SF를 쓸 수 있는 작가를 찾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추리 작가 협회 같은 단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판타지처럼 문학상이 열리거나 출간작이 많은 것도 아니었기에 출판사들은 결국 인터넷의 SF 사이트를 찾아다니며 조언을 구했다.

비로소 시대가 자신을 원한다는 확신이 든 B는 커뮤니티 회원들의 작품 중에서 괜찮은 글을 모아서 출판사에 보내 출판을 의뢰했다. 그 안에 B의 글도 포함되어 있던 덕분에 B도 작가로서 데뷔할 수 있었는데, 다행히 SF 단편집의 반응이 좋아 출판사는 후속작을 부탁해 왔다.

B는 기분도 좋고 자신감도 넘쳤다. 무지몽매한 너희들에게 SF의 훌륭함을 마음껏 보여주마 라는 포부도 있었고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자 하는 공명심도 그 못지않게 있었다.

그래서 B는 졸업 시즌임에도 연구와 졸업 논문은 뒷전으로 미루고 대학 기숙사에서 글을 다 쓰기 전에는 나가지 않을 각오로 통조림과 냉동식품을 잔뜩 사서 냉장고에 채워 놓은 후 책상에 앉아 컴퓨터와 노트북을 켜 놓고 모니터만 들여다보며 창작에 매달리고 있었다.

처음에 그는 평소에 감명깊게 읽은 작품에서 영향 받은, 혹은 스스로 고안한, 또는 잠결이나 길을 걷다 무심코 떠오른 아이디어를 모아놓은 메모가 가득 담긴 폴더를 열었다. 이 중에서 아무거나 하나만 골라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SF에 있어서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대한민국이다. 내가 평작을 써도 한국에선 걸작 대접을 받을 거란 오만이 가득했다.

B는 뷔페 앞에서 무엇부터 먹을까 고민하는 사람처럼 행복하게 입맛을 다시며 텍스트 파일을 차례로 열었다 닫았다 하며 메모들을 훑었다.

자, 무엇을 쓸까. 냉동 수면으로 미래에서 깨어나 불치병을 치료한 후 그 사이에 발명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는 미래의 의료 서비스 이야기? 유전자 조작으로 인간보다 더 똑똑해진 침팬지가 살인을 저지르는 이야기? 화석 연료가 고갈된 세상에서 가솔린 차를 타고 세상을 떠도는 부호의 이야기?

그런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B는 자신도 모르게 엉뚱한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새로운 빈 문서를 만들 때까지만 해도 그는 이민 우주선에서 식량 부족으로 인육을 먹는 이야기를 쓸 생각이었다.

구성원의 인구 증가로 인한 식량 수요를 우주선 안에서 재배하는 작물과 가축이 따라잡지 못하자 배급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 급기야 폭동이 일어나기 직전, 대표자인 선장은 하나의 결단을 내린다…….

하지만 막상 자판에 손가락을 올려놓자 그에게는 다른 멋진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무언가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이지만 충분히 SF라 부를 만한 어떤 심상이랄까.

그것은 하나의 풍경으로, 소설을 쓰고 있는 소설가의 모습이었다. SF, 그런 공상 과학 소설 같은 건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는 듯한 태도를 가진 주류 문단의 소설가 C(여성, 28세).

그가 사는 지방 신문의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 그 다음해 문예지에 실은 단편이 좋은 평가를 받아 주목받는 신예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런저런 작가들의 모임에 초대받아 기성 작가들과 안면을 트고 인맥을 넓히는 등 꿈에서 바라던 소설가로 대접받게 된 것이다. 이에 용기백배한 C는 전업 작가로 살겠노라 작심하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전재산이라곤 신춘문예 상금과 그동안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 약간 뿐. 별 수 없이 평소에 별로 왕래도 연락도 안 하며 살던, 경기도 고양에 살고 있는 작은 이모네 집에 찾아가 신세를 지기로 했다. 마침 이모네 큰아들이 군대에 갔기 때문에 그 방을 노린 것이다.

갑작스런 조카의 방문을 이모는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는 눈치였다. C의 엄마와는 부모님(즉 C의 외할아버지) 유산 문제로 근 십 년 가까이 사이가 틀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히 이모부는 C를 대환영했다. 자기 집안에서 소설가가 나온 것이 기쁘다며 자리를 잡을 때까지 머물러도 좋다고 했다. 하지만 이모는 나중에 살짝 오더니 자기 아들이 제대할 때까지만 있는다는 조건으로 허락한다고 못을 박았다.

그렇게 저녁 식사와 잠만 해결하기로 약속하고 C는 이모의 집에 둥지를 틀었다. 독하게 각오를 하고 온 만큼 회사원처럼 규칙적으로 생활했다. 아침에 집을 나와 커피숍에서 커피와 빵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독서실에서 소설을 쓴다.

오후에 늦은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밤까지 소설을 쓰다가 집에 돌아온다. 이모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모부가 보통 집에 돌아오는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후에 왔다.

그렇게 쓴 첫 장편 소설은 신춘문예 선배이자 대학 선배인 기성 작가의 인맥을 통해 친해진 아동 도서 출판사의 편집자를 통해 출간하여 좋은 반응을 얻고 책도 생각보다는 많이 팔렸다.

덕분에 그동안의 주눅 든 태도를 털어 버리고 이모에게 당당한 표정으로 방세라며 약간의 돈을 건넬 수도 있었다. 그 후로는 이모의 태도도 한결 누그러진 가운데 C는 다른 문예지의 청탁을 받아 단편을 하나 쓰게 되었다.

늘 그렇듯 어둡고 음악도 조용한 것이 마음에 들어 자주 찾는 안락한 카페 구석 창가자리에서 소파에 깊숙하게 등을 파묻고 앉아 노트북을 열어 놓고 C는 생각에 잠겼다. 뭔가 새로운 것을 쓰고 싶다. 그 단 한마디만이 그의 머리를 뱅뱅 맴돌다가 원심력으로 두개골을 뚫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돌이켜 보면 C가 쓴 신춘문예 당선작은 돌연 직장을 그만두고 가출을 한 남편을 찾아서 시댁으로 찾아간 여자의 이야기로, 어머니의 실화를 듣고 살을 붙여서 만든 소설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겪는 중년 남자의 불안과 고뇌를 그렸다는 호평과 함께 무난히 당선되었고, 문예지에 썼던 단편은 유부남과 불륜 관계에 빠진 젊은 여성이 이루어질 수 없다면 함께 죽자는 남자의 권유로 모텔까지 따라왔지만 결국은 죽어가는 남자를 두고 도망친다는 이야기로, 유부남과 잠깐 사귀었던 자신의 경험담을 적절히 섞어서 쓴 글이었다.

이어서 발표한 장편 소설은 조부의 장례식에 따라간 중학생 주인공의 시각으로 본 추한 어른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조부가 남긴 유언장에서의 유산 분배에 대한 언급이 명확하지 못하고 불합리한 조건들이 많자 주인공의 아버지를 포함한 자식들은 유언장의 해석에 대해 저마다 다른 의견을 내며 다툰다.

어른들의 모습에 실망한 주인공은 조부가 기르던 개가 입관식까지 따라오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는다. 그 개를 따라 조부의 논밭과 선산을 누비며 시골 마을의 정경을 둘러본 주인공은 부모에게 조부의 집에서 살고 싶다고 말한다.

펄쩍 뛰며 반대하던 어른들도 자신들이 어릴 적 지냈던 마을과 산을 둘러보며 깨달음과 뉘우침을 얻고 화해한다는 내용이다.

사실 이것은 외조부의 장례식에서 자신이 봤던 유산 다툼을 모티브로 삼은 것으로 따지고 보면 C가 썼던 글은 사소설과 창작의 중간쯤에 위치한 셈이었다. 완전한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 겪은 일을 섞어 놓은 글이었다.

소설가로 살고 싶은 C는 자신의 상상만으로 인물과 사건과 세계 자체를 만들어 내고 싶다는 생각은 늘 있었지만 마음뿐이었다.

얼마 전엔 몇몇 작가와 함께 한 술자리에 동석한 이름 있는 비평가가 자신에게 현대 사회에서 억눌리고 뒤틀린 남자를 그 자신의 시선이 아닌, 지켜보는 여성의 시야를 통해 그려내는 것이 아주 좋다며 칭찬을 해 주었던 일도 있지 않던가.

그 자신도 곰곰이 생각해보니 신춘문예 당선작과 문예지에 실었던 소설 둘 다 여성이 주인공으로 고뇌하는 남성의 모습을 바라보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좋은 평가를 받는다는 건 물론 기분 좋은 일이지만 이대로 자신의 작풍이나 성격이 규정된다는 건 두려운 일이기도 했다. C는 더 이상 자신의 경험담에 의존하거나 편집자와 비평가가 바라는 유형의 글을 쓰는 ‘전형적인’ 작가로 굳어지기 전인 바로 지금이 완전히 새로운 글을 써야 할 때라고 느꼈다.

카페 창문을 통해 C는 지나가는 차와 사람들, 저편 산중턱에 새로 지어지는 아파트 건설 현장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어제는 비가 왔고,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새파란 하늘. 아무리 쳐다보아도 머리는 텅 빈 듯 했고 새로운 생각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문득 여고 시절 성폭행을 당했던 친구 이야기가 떠올랐고, 사귀던 남자의 술버릇이 생각났다. 이걸 넣어 보면 어떨까, 이걸 요렇게 꾸며서……

하지만 C는 잡념을 떨칠 때 응당 하는 버릇이 된, 거칠게 머리를 흔들거나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돌돌 말아 잡아당기는 행동을 하며 그런 유혹을 떨쳐 내었다.

새로운 것을 써야 한다, 자기 자신을 포함한 누구도 쓸 수 없는 새로운 소설을. 하지만 자신이 보고 듣고 겪은 것들이 자꾸 그 굳은 결심의 구석에 실금을 내고 그 사이로 비집고 올라오며 유혹의 손짓을 거듭했다.

어느덧 해가 지고 어둑해진 하늘, 유리창엔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20대 후반의 여성, 피곤과 절망으로 초췌해진 한심한 모습이로구나 하고 자학이 담긴 한숨을 내쉰 그때 자신의 뒷자리에서 만화책을 읽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순간의 착시였을까, C는 자신이 있는 자리에 그 남자가 앉아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C의 안에서 무언가가 부풀어 올랐다.

바로 이거다. 소설을 쓰는 남자. 그의 이야기를 써 보자. 자신의 경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지만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대상, 소설을 쓰는 사람에 대해 말이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그 이야기의 주인공 D(남성, 31세)는 소설가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소설가가 아니었다. 소설에 대한 권위를 독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주류 문단에서는 소설가 취급도 안 해주는 부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D는 신춘문예나 문예지 및 출판사가 주최한 신인상에서 수상을 한 것도 아니고, 유명 소설가나 비평가가 추천을 해서 데뷔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는 문단의 관점에서 볼 때는 제대로 된, 혹은 정식의 코스를 밟아서 등단을 한 작가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가 출간한 책은 십수 권이 넘고, 팬레터만 수백 통을 넘게 받았다. D는 바로 인터넷에서 글을 써서 발표하는 판타지, 무협 작가였다.

D가 책을 내게 된 경위는 소설가 지망생들이 보면 맥이 빠질 정도로 싱거웠다. 그는 어릴 때부터 형이 잔뜩 빌려온 무협지며 만화책을 탐독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활자 중독에 가까운 상태로 자랐다. 그의 형은 고등학생이 되면서 공부를 한다며 만화와 소설을 등한시하게 되었건만 D는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소설을 읽었다.

그가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서점에는 한창 판타지 소설이 붐을 일으켰고, 처음엔 또래들과 마찬가지로 신이 나서 사서 읽고 빌려 읽고 학교에서 서로 돌려 읽고 했지만 점점 이야기의 질이 떨어지고 판에 박힌 이야기만 반복되자 흥미를 잃고 실망감을 느꼈다. 한 마디로 ‘이런 것쯤은 나라도 쓰겠다’라는 생각이 불거져 나온 것이다.

더 이상 서점과 대여점에 쏟아져 나오는 판타지와 무협, 퓨전이니 오리엔탈 판타지니 게임 판타지니 하는 유사 장르들로는 만족을 못하게 되자 D는 인터넷을 뒤져서 판타지 소설 커뮤니티를 찾았다. 거기엔 비록 출간되지 못했지만 재기 넘치는 글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D도 글을 쓰긴 했지만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즉흥적으로 쓰다 보니까 도입부만 반짝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날 뿐 이내 그 뒤로 이어질 이야기가 생각이 나질 않았고 싫증이 나기도 해서 더 쓸 수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약 10회 정도 연재하다가 그만둔 장편만 다섯 편 정도 되자 커뮤니티 게시판엔 그를 가리켜 연중작가, 조루작가 같은 달갑지 않은 호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재미있는데 왜 중단하냐는 응원의 글도 제법 있어서 용기를 얻은 D는 제대로 된 글을 쓰기로 결심하고 등장인물 이름과 줄거리의 흐름을 처음부터 모두 생각한 후 완성된 상태에서 글을 쓰기로 작정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글이 그의 첫 출간작이었다.

세 개의 위성이 주위를 도는 판타지 세계관의 행성. 세 위성이 한 줄로 늘어서는 날 마왕이 나타나 세상을 멸망시킨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가운데 점성술사는 드디어 위성이 하나로 모이는 날이 불과 1년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린다.

그 무렵 세계는 두 개의 거대한 제국이 서로의 영토를 노리며 전쟁에 돌입한 상태였는데 각국의 예언자와 점성술사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고 탄원을 했으나 탐욕에 물든 지배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결국 소수의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강림하는 마왕을 막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 전설의 무기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고등학생이 판타지 세계로 넘어가서 난장판을 만들거나 무협이나 온라인 게임이랑 마구잡이로 섞어서 잡탕을 만드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던 당시 연재란에서 보기 힘든 묵직하고 진중한 내용을 펼친 D의 소설은 호평을 받아 20회 정도 연재했을 때 두 군데 출판사에서 출판을 의뢰하는 이메일이 날아오는 성과를 이뤘다. 하지만 D는 완결할 때까지 책으로 낼 수 없다며 거절하고 약 8개월 동안 120회를 넘는 분량을 연재하여 끝을 맺었다.

그 다음에 D는 자신에게 책을 내자고 한 출판사가 아닌, 예전에 자신이 좋아하던 글을 많이 낸 출판사에 직접 투고를 하여 책을 내게 되었다. 다행히 반응도 좋았고 인지도도 올라간 덕에 예전에 심심풀이로 연재란에 썼던 저급한 글도 다른 출판사를 통해 출간할 수 있었다.

대여점의 평가도 좋고 출판사의 격려도 받자 기고만장한 D는 이참에 본격적으로 소설을 쓸 생각에 멀쩡하게 다니던 대학을 휴학한 후 컴퓨터를 최신형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시판된 중에서 가장 큰 LCD모니터까지 갖춰 놓고 하루종일 집에 틀어박혀 글만 썼다.

고대에 봉인된 신을 과학 기술의 힘으로 깨워서 이를 이용해 세계를 정복하려는 세력에 맞서 싸우는 일본 RPG 같은 이야기, 2000년마다 멸망하는 세계를 구하기 위해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며 싸우는 시간 경찰대의 이야기, 운석 충돌으로 인한 시공의 분열을 이용해 판타지 세계의 마왕과 수하들이 무협 세계로 넘어갔으나 절정 고수들에게 당하고 또다른 세계로 도피했지만 그곳을 지배하는 괴물 신들의 노리개로 전락하는 코믹한 이야기 등을 그린 장편 소설을 잇달아 써서 출간했다.

대여점 못지않게 서점에서의 판매량도 증가하며 업계에서의 입지를 굳혀 갔고, 이제 판타지 소설계에서 D는 일정 수준 이상의 글을 기대할 수 있는, 결코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는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에게 돌연 단편소설 청탁이 들어왔다.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판타지 소설 출판사의 편집자가 판타지 소설가들의 단편을 모은 단편집을 내려고 한다며 부탁을 한 것이다.

단편이라고는 데뷔 이전 커뮤니티의 단편 소설 게시판에 올린 몇 편의 습작밖에 없다며 완곡하게 거절하려 했으나 소재와 내용에 제한이 없고 분량도 중편 정도까지 가능하다며 간곡히 부탁하는지라 거절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그 출판사에서 낸 책 중에 대여점에서 인기가 없다며 대량 반품된 작품이 있어서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던 터라 더욱 그랬다.

그리하여 다섯 권에서 열 권 정도 되는 분량의 장편만 열 편 정도 썼던 D가 돌연 원고지 100매 정도의 단편을 쓰는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사람이 놀던 물에서 놀아야 한다고, 장편만 쓰던 D에게 있어 단편이란 새로운 영역이고 엄두도 안 나는 높은 벽이었다. 어떻게 그 짧은 분량 안에 기승전결을 갖추고 인물의 매력과 놀라운 사건을 담아서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전달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연락을 받을 때 마감까지의 기간은 한 달하고도 보름 정도였으나 D는 그 중에서 한 달을 고민만 하며 보냈다. 물론 그 동안에 기존에 하던 연재는 이상 없이 했지만 단편 생각을 할 때마다 담배에만 손이 가는 것이었다.

장편을 구상할 때 이상으로 소주와 담배가 소비되었으나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장편으로 쓸 만한 소재 두세 가지를 떠올리긴 했으나 그걸 단편으로 쓰다보니 내용이 너무 설명적이고 장편 줄거리 요약한 것 모양으로 되어서 영 시시했다.

마침내 마감이 보름밖에 남지 않자 D는 쓰던 장편 연재도 잠시 중단하고 단편에만 매달리기로 결심했다. 최후의 수단으로 못 쓰겠다고 말하는 방법도 있긴 했으나 작가로서의 프라이드와 출판사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런 식으로 도망가는 걸 스스로 용납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지 않자 D는 머리도 식힐 겸 평소에 가끔 가던 서점에 갔다. 거기서 소설이며 만화책의 표지를 한참 보고 있노라면 새로운 인물이나 소재의 아이디어를 얻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 이미 출간된 단편집을 몇 개 사서 읽어보고 소재의 힌트라도 얻을 속셈이었다.

오전, 서점이 문을 연 직후에 가서 그런지 내부는 한산했다. 직원들도 책을 정리하고 청소를 하는 등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D는 아무런 생각 없이 소설란의 서가를 지나다니며 수많은 활자들이 그려낸 기발하고 희한하고 평범하고 지루하고 독특하고 진부한 제목들의 사이를 스쳐갔다.

그런데 그의 눈을 끈 것은 책이 아니라, 서가 구석에서 책을 정리하는 직원의 모습이었다. 20대 중반의 여성으로 서점 유니폼이 너무나 잘 어울려서 마치 그를 위해 디자인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로맨스 소설 코너에서 책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한참 책을 쌓고 꽂는 와중에 그중에서 한 권을 들어 유심히 살펴보는 것이었다.

D의 눈에 그 모습, 그 시선이 주는 느낌은 출간된 자신의 책을 바라보는 작가 그 자체로 비춰졌고, 자신의 책을 서점에서 발견한 D 자신의 모습과 겹쳐지며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때 D의 뇌리에 섬광이 번뜩였다. 그렇게 바라마지 않던 소재가 떠올랐으니, 서점에서 일하며 로맨스 소설을 쓰는 작가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그 작가 E(여성, 25세)는 D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작가가 되었다. 로맨스 소설을 탐독하며 지내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비슷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서 교류하고, 거기에 올라온 좋은 글을 읽고 평도 해 주고 자신이 쓴 글을 올려서 감상을 받기도 하며 활동을 했다.

그런 도중에 E는 생각도 못하던 출간 제의를 받게 되었다. 사실 그 커뮤니티는 로맨스 소설을 전문적으로 출간하던 출판사의 편집자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거기 연재란에 올라오는 소설 중에 재미가 있고 인기가 많은 글을 책으로 내곤 했다.

E도 그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자신의 글이 책으로 나오리란 생각도 못했기에 감개무량, 감격의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 길로 출판사에 가서 계약을 하고 인사도 나눴다.

책이 나온 후에는 편집자와 함께 평소 동경하던 로맨스 작가들을 만나서 사인도 받고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야말로 꿈같은 시간이었다. 아이돌 가수를 동경하던 소녀가 가수로 데뷔해서 그들과 같은 무대에 서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그런데 이후 그 출판사에서 몇 권의 책을 내고 그 덕분에 이름이 팔려서 다른 출판사에서 책을 내게 되어 E는 그제야 비로소 계약서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덕분에 지금껏 책을 냈던 그 출판사의 계약 조건이라는 게 얼마나 형편없고 불합리한 것이었는지, 다른 출판사의 제대로 된 계약서를 보고 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전 출판사의 계약은 그야말로 매절로, 원고에 대한 출판권만이 아니라 저작권, 2차 저작권을 모두 출판사에 양도하는 불합리한 계약이었던 것이다.

인기 로맨스 소설이 만화, 드라마, 영화 등으로 만들어지던 추세를 생각하면 상당히 불합리한 조건일 뿐만 아니라 계약 기간은 3년에 인세는 겨우 3%로, 출판에 대한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던 E는 인세가 많고 적은지는 알지도 못했고 신경도 쓰지 못했다.

그저 통장에 돈이 들어오자 내가 소설을 써서 돈을 벌었다는 사실이 놀랍고 기쁠 뿐 그 액수와 절차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이번 출판사에서 계약기간 5년에 인세 10%를 제시하자 자신이 그동안 속칭 노예 계약을 맺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와 따진다 해도 무슨 소용이랴. 그 출판사에선 한 달에도 몇 종의 신간을 내고 있었고 E의 책도 벌써 반 정도는 절판된 상태였다.

팬으로부터 책을 사고 싶은데 서점에선 죄다 절판이라는 메일을 받고 출판사에 물어봤으나 편집자는 로맨스 소설이란 게 원래 금방 팔리고 유행에 민감하여 소수의 베스트셀러를 제외하면 1년 정도만 낸다는 대답을 들었을 뿐이었다.

계약서엔 3년으로 계약했는데 안 팔린다는 이유로 1년만에 책을 절판시키는 바람에 2년 동안은 다른 곳에서 낼 수도 없는 상태.

이런 식으로 자신의 글에 대한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자 E는 그 출판사와 인연을 끊기로 결심했다. 비록 로맨스 소설을 많이 내 주고 신인에게 기회를 줘서 그 덕분에 자신도 데뷔하게 되기는 했으나 출판사로서의 도의에 어긋나는 계약을 강요하는 등 작가에 대한 대우가 너무 좋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는 결심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러나 E의 앞길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 출판사는 속칭 질이 떨어지는 소설이 쏟아지는 곳으로 인식되고 있었기에 다른 출판사에서 글을 내기 위해서는 지금 이상으로 노력해서 더 좋은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절치부심, E는 어디 바닷가 여관에라도 가서 글쓰기에 매진할까 생각했으나 가정 형편도 그렇고 소설로 얻는 수익에 대한 전망도 어두워서 도저히 하던 일을 그만둘 수는 없음을 알고 있었다.

별수 없이 E는 지금껏 그랬듯 서점에서 일하며 밤에는 졸린 눈을 비비며 소설을 붙잡았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연습장에 떠오르는 대로 글을 끄적거리기도 했고, 낮에 자꾸 졸다가 한 소리를 듣기도 하며 힘들게 쓴 글이 마침내 새로운 출판사에서 흡족한 계약을 맺고 나오게 되었다.

서로의 얼굴과 이름을 아는 사이라면 상대의 이름을 적는 것만으로 사랑에 빠지도록 만드는 신비한 수첩. 평범한 여고생이었던 주인공이 그 수첩의 힘으로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던 남학생과 사귀게 된다.

수상하게 여기던 주인공의 친구가 수첩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것을 훔쳐, 인기 배우의 사인회에 찾아가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고 수첩에 사인을 하게 만들어 그에게서 열렬한 고백을 받게 된다.

이로 인해 소동이 일어나고 주인공은 수첩을 돌려받으려고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수첩의 주인 이름란에 자신의 이름을 써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이전 주인이 썼던 기록이 사라지면서 상대는 그를 사랑했던 기억을 모두 잃고 만다.

주인공이 수첩을 되찾자 배우는 친구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잊고 떠나가 버려, 친구는 주인공을 원망하며 슬퍼한다. 되레 이 사건을 계기로 배우마저 주인공에게 호감을 갖게 되고, 친구는 수첩을 되찾기 위해 주인공을 괴롭힌다는 기묘한 삼각관계 로맨스로 발전하는데, 결과적으로 수첩은 불에 타서 사라지지만 배우는 이미 수첩이 없이도 주인공을 좋아하게 되어서 둘은 맺어지며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이 소설은 멋진 장정과 적극적인 홍보의 힘을 등에 업고 많이 팔렸음은 물론, 마침내 드라마로 제작되는 성과를 얻게 되었다. E는 그제야 일하던 서점에 그간 필명으로 썼던 책들이 자신의 글임을 밝힌 후 축하를 받았고, 드라마 제작 발표회에서 평소에 좋아하던 유명한 배우들과 만나기도 했다.

드라마 제작 회의에 원작자 자격으로 참석한 E는 극중의 인기 배우 역을 자신이 평소 좋아하던 배우의 이름을 지명하며 그가 맡았으면 좋겠다고 큰 기대 없이 말했는데, 캐스팅이 그의 바람대로 이루어져서 감개무량이었다.

이렇듯 작가로 성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판권료도 얻으니 마음이 해이해진 것일까. 이름 있는 중견 출판사에서 ‘묻지 마’로 출간 제의가 들어왔다. 어떤 글을 쓸 것인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책을 내고 싶으니 계약하자는 것이다.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E는 자신있게 그러자고 하고 아주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했다. 계약 내용은 일 년 안에 두 권짜리 장편 로맨스 소설을 내자는 것이었다. 그 정도야 얼마든지라고 생각하며 다니던 서점을 그만두고 일 년만에 두 권 분량의 소설을 무려 네 편이나 썼는데 편집자가 그걸 다 읽어 보고는 만족스럽지 않다는 회답을 내놓았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E는 그중에서 편집자가 그나마 가장 낫다고 말한 한 편을 나름 수정하여 출간을 했으나 유명 출판사의 마케팅 지원에도 불구하고 신통치 않은 결과를 낳았다.

독자들의 주된 평은 ‘평범하고 시시한 로맨스물’이며 ‘작가가 돈 좀 벌었나 보다’ 였다. 전작에서 보여 준, 기묘한 아이템을 매개로 한 독특하고 긴장감이 넘치는 특이한 로맨스라는 호평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사실 E가 썼던 네 편의 소설 모두 여고생이 주인공이고 사귀는 남자로 인기 배우 혹은 가수 등 연예인이 등장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 두 편은 다른 출판사에서 냈는데 모두 비슷한 반응이었다. 작가가 돈 좀 벌더니 맨날 똑같은 것만 쓴다는 식이었다. 로맨스 커뮤니티와 인터넷 서점 리뷰란에는 혹평만이 쇄도했다.

E는 매우 상심하여 집에 틀어박혀 온종일 울었다. 며칠 후부터는 무서워서 인터넷도 접속하지 못하게 되었다. 완전히 백수로 탈바꿈하여 집에서 TV만 보며 살기를 몇 달, 용기를 내어 인터넷에 접속해서 옛날에 다니던 로맨스 커뮤니티에 갔다. 요즘은 어떤 소설, 어떤 내용이 인기가 있나 알고 싶은 순수한 호기심에서였다.

그러던 중 며칠 전에 온 메일을 읽었는데 소설을 다루는 웹진에서 단편 소설을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작은 웹진이라 원고료를 드릴 수는 없고 나중에 소설을 모아 책으로 내면 인세를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드라마 판권료를 두둑하게 받았다고 하지만 그동안 놀고먹느라 저금한 돈을 꽤 많이 쓰기도 했고 이제 서점도 그만둔 상태에서 글 쓰는 것 외엔 돈을 버는 재주도 없던 터라 하겠다는 답장을 보내고 오랜만에 워드 프로그램을 띄웠다.

망설임도 없이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무런 생각의 정리도 없었다. 무엇을 어떻게 쓰겠다는 구상조차도 없었다. 그런데도 글은 마치 막혔던 봇물이 터지듯 쏟아졌다.

E의 머리에 가득한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로맨스는 쓰지 않겠다. 자신에게 원고를 부탁한 웹진이 어떤 내용의 소설을 다루는지 살펴보지도 않았다.

로맨스 전문이 아니고 여러 장르의 글을 모두 다룬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로맨스가 아닌 글을 쓰고 싶었다.

E는 로맨스로 데뷔했고 인기 작가가 되었다가 좌절을 겪은 지금 처음으로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의 손끝에서 풀어져 나오는 소설은, 그 자신이 읽어 본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완전히 새로운 내용의 글이었다. 그것은 추리 소설이었다. 아니 추리 소설이 아니었다. 그것은 추리 소설가에 대한 소설이었다.

추리 소설가 F(남성, 39세)는 원래 번역가였다. 추리 소설에 대한 인식이 그리 좋지 못한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로 번역을 시작했는데, 그 소설들은 모두 유명 번역가나 대학 교수 등의 이름을 달고 출판되었다.

그는 오직 추리 소설에 대한 애정과 학교를 다니면서 할 만한 아르바이트라는 생각만으로 대학을 다니며 번역 일을 계속했다. 방학 때면 번역량을 늘렸고, 학기 중에는 조금 줄이는 식으로 졸업할 때까지 꾸준히 해 왔다.

F는 중고생 시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최고의 명문대에 보란 듯이 합격한 시골 마을의 자랑거리였다. 하지만 그렇게 서울에서 자취를 하며 공부를 하다보니 자신 이상의 수재들이 많아서 장학금을 타기가 녹록치 않음을 깨달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방에서 올라온 학과 동기들은 모두 고액 과외를 하며 학비를 벌고 있었으나 F는 사람 앞에선 말을 더듬고 눈을 심하게 깜박이는 등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도저히 과외를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향집의 농사가 흉작으로 사정도 어려운 판이라 차마 손을 벌리지 못한 F는 장학금과 과외로 학비를 충당하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거짓말을 한 후 필사적으로 돈을 벌 방도를 찾았다.

성격 탓에 서빙 같은 것도 하지 못하니 생각다 못해 방학 동안 육체노동을 해 봤지만 건강 체질도 아니라 며칠 버티지 못하고 몸져눕고 말았다.

그 후 이런저런 허드렛일로 푼돈을 벌면서 고민을 거듭하던 F의 앞에 졸업을 앞둔 선배가 담당 교수로부터 받아서 하던 아르바이트를 연결해 주었다. 교수는 유명 소설의 번역가로도 이름이 높은 분이었는데 사실 그 소설 대부분은 대학원생이나 학부생들이 나눠서 번역한 것을 자기 이름으로 내고 있던 것이었다.

그렇게 물에 빠지고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시작한 번역 아르바이트였으나 계속 되다보니 출판사 측에서 마감도 잘 맞추고 번역 질도 좋다며 F를 지속적으로 쓰게 되었다.

특히 F가 추리 소설에 흥미가 있다고 밝히자 그쪽 일을 많이 주었고 F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추리 소설 전문 번역가가 되었다.

다행히도 시간이 흘러 출판계가 커지고 베른 조약을 계기로 외국 소설의 번역도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이뤄지게 되자 F도 정식으로 번역자로 자기 이름을 내걸고 책을 내게 되었다. 마침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직을 못한 F는 아예 취직을 포기하고 전문 번역가의 길을 걸어가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F는 이걸로 만족하기엔 왠지 가슴 속이 미진함을 느꼈다. 번역일로 혼자 먹고 사는 정도는 벌었지만 가정을 꾸리기엔 모자라다는 생각도 들었고, 번역을 하면서 커진 추리 소설에 대한 애정을 표현할 다른 길을 찾고 싶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추리 소설 창작. 유일하게 있던 추리 소설 전문지의 신인상에 투고했으나 번번이 떨어졌고 하도 낙방을 거듭하다보니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심정이 될 정도였다.

그래도 F는 추리 소설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스스로 추리 소설을 읽고 쓰는 인터넷 카페를 만들어 운영하고 몇몇 출판사에 미출간 추리 소설의 번역을 하고 싶다는 의뢰를 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자 그는 추리 소설계에서 제법 이름 있는 번역가이자 기획자로 알려지긴 했으나 여전히 창작에 있어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F에게 마침내 기회가 왔다. 추리 소설을 공모해서 우수작을 모아 단편집을 내려는데 심사를 봐 달라는 부탁이 들어온 것이다. 그는 즉시 가명으로 여기에 투고하기로 결심하고 창작에 매달렸다. F는 뭔가 새롭고, 추리 소설 같지 않으면서, 그렇지만 뒤통수만이 아니라 온몸을 감전시키는 것만 같은 충격을 주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어쩌면 F가 추리 소설 신인상에 계속 떨어진 것은 그런 아득히 높은 야망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가 추구한 소설은 추리 소설 같지 않지만 무언가 충격적인, 한마디로 뜬구름 잡는 듯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의 투고작은 유령들이 모여서 인간에게 복수하는 방법을 모의하다 자기 꾀에 넘어가 자멸하는 이야기, 미스터리 마니아들이 산장에 모여 암호풀기 시합을 열었는데 암호의 내용대로 한 명씩 죽어나가다 결국 암호를 만든 이까지 죽고 암호는 수수께끼로 남는다는 이야기, 108가지 방법으로 살인을 거듭해 온 살인마의 고백담, 추리 소설의 계율을 의도적으로 어기는 내용 등 결과적으로 미스터리라기보다는 호러나 괴기, 환상 쪽에 가까운 글이 되는 바람에 추리 소설 전문지의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이번에 F가 쓰려는 이야기도 조금은 판타지의 분위기가 나고 있었다. 그것은 소설을 쓰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다. 그 여자 A(여성, 30세)는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만으로 하루를 살고 있다.

덕분에 이 시대의 전형적인 대졸 백수로 나이만 먹고 있는 형편이지만, 가족들에게는 언젠가 한 방으로 인생 역전할 거라며 큰소리만 치고 있다. 신춘문예는 벌써 몇 번을 떨어졌는지 손가락으로도 다 못 셀 정도이고, 이런저런 문예지의 신인 공모에 한 번씩은 응모해 본 것 같다.

갑 문예지에 응모했다 떨어진 것은 다음해에 조금 고쳐서 을 문예지에 응모했지만, 호박에 줄그어서 수박이라고 포장한 걸 다들 알아봤는지 연거푸 떨어지곤 했다.

그러다 A는 이른바 장르 소설 쪽으로 눈을 돌렸다. 여기는 비교적 젊은 세대의 작가들이 이제 막 새로이 등장하여 활발하게 글을 쓰고 이름을 알리는, 그러니까 블루 오션인 셈이었다.

그에 비하면 신춘문예와 문예지 등단코스는 레드 오션이다. 경쟁자는 너무 많아 들어가기는 바늘구멍인데 그렇게 들어가도 살아남기가 힘들다.

그 자리엔 하늘 같은 대선배님들이 무거운 엉덩이로 각자 자기 터전을 잡고 눌러앉아 있어서 비켜주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는 정말 누구라도 혀를 내두를 엄청난 걸작을 연달아 뽑아내지 않는 이상은, 선배 작가나 출판사하고 안면을 틔우고 술자리라도 쫓아다니지 않는 한 살아남기가 힘들다.

반면 장르 소설쪽은 아직 학연, 지연 같은 인맥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판타지 소설, 무협 소설, SF 같은 식으로 장르에 따라 나뉘어지긴 했지만 어차피 서로 하나의 독자를 두고 밥그릇 싸움하는 관계가 아니어서 알력 다툼 같은 것은 없었다.

그렇긴 해도 장르 쪽이 주류 문단보다 만만한 바닥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어설프게 신춘문예를 기웃거리던 작가 지망생이 자기 글솜씨만 믿고 주류문단보다 하수들이겠거니 하고 생각하며 덤벼들 자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A가 장르 소설 커뮤니티나 공모전 같은 곳에 보낸 단편들은 모두 혹평은커녕 반응 자체가 없었다. 남녀의 애정을 다뤘다는 이유로 로맨스 커뮤니티 연재란에 올린 글은 지루하다는 댓글만 몇 개 달렸고, 유령이 나온다는 이유로 공포 소설 카페에 올린 단편은 ‘이건 호러가 아니다’, ‘쓴 사람이 호러에 대해 모른다’는 식의 싸늘한 반응만 얻고 그만이었다.

그나마 처음으로 잘 썼다는 댓글을 얻은 글은 환상 소설 웹진의 투고란에 올린 단편이었다. 현실에 절망한 작가 지망생이 앨리스처럼 거울 속 세상으로 들어가서 그곳에서 인기 작가로 살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을 만난다는 내용이었다. 난생 처음 가족도 친구도 아닌 타인에게서 자신의 글에 대한 칭찬을 듣게 되어 용기백배한 A는 더 좋은 글을 써서 모두를 놀래키려는 야심에 부풀었다.

물론 그런 생각만으로 좋은 소설이 써질 리는 만무했다. 방에는 맥주캔이 뒹굴기 시작했고 엄마의 잔소리도 더 잦아졌다. 밤새 대학 노트와 컴퓨터 키보드를 붙잡고 있다가 해가 뜰 무렵 지쳐서 잠이 들곤 했다.

그러던 무렵 어느 날에 심심해서 인터넷의 바다에서 해류를 떠도는 난파선처럼 헤매다가 누군가의 블로그에 올려진 에셔의 그림을 보았다. 서로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손을 그린 그림이었는데, 그걸 보고 A는 불현듯 멋진 생각을 떠올렸다.

그것은 바로, 소설을 쓰는 사람에 대한 소설이었다. 그 소설은 소설을 쓰는 사람에 대한 소설로, 그 안의 소설 역시 소설을 쓰는 사람에 대한 소설이었다. 결국 그 소설 안의 소설은 돌고 돌아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게 된다.

그렇다면 결국 지금 소설을 쓰고 있는 A 자신도 누군가가 쓰고 있는 소설의 등장인물이 되고, 결국 어디서부터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소설인지 알 수가 없게 될 것이었다. 이거야말로 멋진 환상 소설이 될 거란 자신이 생겼다.

그래서 A는 띄웠던 인터넷 브라우저며 음악 재생 프로그램이며 할 것 없이 모두 꺼 버리고 워드 프로그램 하나만 띄웠다. 모든 잡념을 지우고 두 눈과 손끝에만 온 정신을 집중한 상태로 잠시 숨을 골랐다.

마침내 안개가 걷히듯, 돌덩어리 안에 잠드는 조각상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내듯 이야기가 손에 잡힐 듯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제 A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의 손에서 하나의 이야기가 태어나고 있었다. 그것은 소설을 쓰는 사람에 대한 소설이다.

〈되돌아감〉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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