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은 SMC 방송 예능국 작가입니다. 이런 소개로 제인을 온전히 대변해줄 순 없겠지만 방송 작가 혹은 기획자라는 직업을 알고 계신 분들이라면 그가 생업을 위해 무엇을 활용하고 무엇을 보류하고 있을지 짐작 가실 겁니다. 어차피 인간은 타인을 접할 때 자신의 이해가 용이한 방향으로 정보를 왜곡하기 마련이고, 지금은 정확한 전달보다 빠른 전달이 중요하니까요.
아무튼 제인은 지금 방송국 회의실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 자판 위에 손가락 끝을 얹은 채 눈치만 보는 중입니다. 자판 하나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다란 사각 테이블 앞쪽에는 선배 작가님들이 앉아 계셨지요. 그들을 포함해 회의실의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기에 침묵은 차가온 창문에 내려앉은 습기처럼 온 사방에 끼어있었습니다. 제발 이 와중에 갑자기 트림이나 배울림이 터져나오지 않기를. 재채기가 나오는 바람에 괜히 트집잡히지 않기를. 혹자는 가까이 있는 이들이 생리현상도 이해해주지 못하겠냐고 묻겠지만, 그걸 기대하느니 차라리 신에게 매달려야죠.
“부장님 지시라고?”
“그래.”
언제 어디서 어떤 이유로 분노가 폭발할지 몰라 시한폭탄이라 불리는 마리 선배. 그리고 마리 선배가 그나마 이성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스미스 선배 외에는 다들 입도 뻥긋하지 않습니다. 현재 상황에서 목소리를 낼 만한 경력자가 둘 밖에 없었던 탓입니다. 이런 상황이면 차라리 자기들 아래로 다 내보낸 다음 둘이서 결론을 내고 공지해준다면 참 좋겠지만, 선배들은 그 정도로 후배들을 배려해주진 않습니다.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지진 않을테니 다행입니다. 제인은 어깨의 긴장을 천천히 풀며 노트북 화면을 응시했습니다. 방송작가라면 당연히 다룰 수 있어야 하는 문서 편집 프로그램. 행여 빠지는 내용이 없도록 열심히 기록한 회의록은 맨 마지막 줄에 간략한 기록만 남긴 채 멈춰있었습니다.
-부장님 콜. 컨셉 변경????? 지금??
“말할 거면 빨리빨리 말해줘야 할 거 아냐! 우리가 무슨 넣으면 튀어나오는 A.I냐?”
동기 앞에서 누그러진 태도였다 해도 별명이 폭탄인 인간은 결국 터지게 됩니다. 마리 선배가 성질을 내며 핸드폰을 던지고 짜증스레 혀를 차자 회의실은 누구 하나 빠져나가지 못할 정신적 밀실이 되었지요. 그렇게 불만이면 선배들 따까리나 다름없는 저희한테 성질내지 말고 단독으로 부장님이나 국장님을 찾아가세요…. 실제로는 때려죽인데도 말 못할 생각들이 무성히 자라납니다. 스미스 선배는 동기 앞에서 그저 태연할 뿐입니다.
“그럼 가서 개길래? 면담 일정 잡아줘?”
“미쳤냐?”
“못 간다는 거지? 그럼 다음주까지 기획서 전면 수정이야.”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공감할 순 있습니다. 물리적으론 별개의 육체로 존재하는 이들이 동시에 같은 개념을 떠올릴 수도 있죠. 이러한 경험의 공유는 상호의 의견과 감정을 인지하게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회적 교류활동이라 할 수 있습다. 하지만 마리 선배는 언제나 그렇듯, 다른 이들의 의견을 묻기보다 자신의 잣대로 모든 상황을 짧게 대변했지요.
“씨발.”
“말 좀 곱게 써라.”
“그럼 웃냐? 몇 달 동안 회의하고 만든 기획서가 지금 다 엎어졌는데?”
“웃어야지 어쩔 거야. 쳐들어가서 사고치고 뉴스팀이랑 인터뷰 찍을래?”
제인은 도저히 웃을 수 없었지만 그 농담을 들은 당사자는 웃었습니다. 지금 당장 상대의 멱살을 쥐고 벽에 처박아줄까 싶지만 일단 너랑 내 연차를 봐서 참아준다는 코웃음이었죠.
“제인.”
“네!”
왜 하필 이런 타이밍에 회의록 담당이 된 걸까요? 캐빈이나 마리가 맡았을 땐 이렇게 골치 아픈 일이 생기지 않았었는데. 하지만 지금은 허리에 힘을 주고 턱을 당기면서 선배들이 토의하는 동안 늘 성실한 자세로 있었다는 티를 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할까요. 슬쩍 살펴본 선배들은 제인 쪽을 쳐다보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컨셉 보고서 월요일까지 수정할 수 있지?”
“네.”
“좋아. 그럼 수정해서 가져와. 더 빠르면 더 좋고.”
“네.”
“여기까지 하자.”
회의는 그렇게 끝났습니다. 선배들이 모두 나갈 때까지 허리를 빳빳이 세우고 있던 제인은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모두 사라졌을 무렵 억울함을 억누르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부장님도 진짜 답이 없으시네. 하다못해 회의 시작하기 전에 말해주셨으면 좀 좋아? 입술을 삐죽이며 스크롤을 끌어올리자 《22년도 세이브 미, 플리즈! 컨셉 회의록》이라는 타이틀이 볼드체로 나타났습니다.